125화
그날 오후.
실습수업에서 열외된 한수호는 한쪽에서 지켜만 보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을 때, 최지혁은 한수호를 부축해서 기숙사가 아닌 컨테이너 하우스로 향했다.
그 뒤를 여학생들이 우르르 쫓아가려 했지만, 한수호가 딱 잘라 거부했다.
최지혁도 컨테이너 하우스까지만 동행했을 뿐, 곧바로 돌아와야 했고.
한수호는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잠시 쉬다가 냉장고에 넣어 둔 음식을 다시 꺼내 억지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이하윤이 고마움을 담아 준비해 준 음식을 그냥 버릴 수는 없기에 어떡하든 먹으려는 것이다.
음식을 다 먹은 한수호는 빈 그릇을 촬영한 뒤 이하윤에게 보냈다.
한수호>>이미지
한수호>>맛있게 잘 먹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기숙사에서 쉬어. 괜히 왔다가 또 오해 사지 말고.
한수호도 수업 시간에 친구들이 주고받은 칙톡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기에 자기 때문에 이하윤이 오해받는 걸 미안해했다.
그런데 이하윤에게서 의외의 답신이 왔다.
이하윤>>언니들 오해는 신경도 안 써. 그래도 밥 챙겨 먹을 정신은 있는 거 보니까, 좀 괜찮아졌나 보다. 조금 안심되네.
오해를 사도 상관없다는 말에 한수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수호>>얼마나 호전됐는지 좀 볼 수 있을까?
이하윤>>아, 맞다. 오빠가 준 선물인데, 보여 줘야지. 잠시만.
칙톡에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1분 정도 지났을 때, 다시 이하윤에게 문자가 왔다.
이하윤>>이미지
이하윤>>어때? 많이 좋아졌지?
한수호는 이하윤이 셀카로 찍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그린 사진.
그런데 얼굴 아래로 헐렁한 민소매 티를 걸치고 있어, 남자가 보기엔 조금 민망한 수준의 노출이 있었다.
그걸 이하윤도 이제야 파악했는지 서둘러 수습하려 했다.
이하윤>>오빠, 잠깐. 잠깐만. 사진 보지마!
이하윤>>메시지가 삭제되었습니다.
뒤늦게 사진이 삭제되었지만, 한수호는 이미 본 뒤였다.
잠시 침묵에 빠진 두 사람.
한수호는 창피함을 덜어주려고 먼저 말을 걸었다.
한수호>>상처가 정말 많이 좋아졌다. 다행이다.
이하윤>>사진 봤구나…. ㅠㅠ(우는 이모티콘)
우는 이모티콘을 본 한수호는 뺨을 긁적이다가 한마디 더 썼다.
한수호>>얼굴만 봤어.
이하윤>>이미 다 본 걸 뭐 어쩌겠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한수호>>그럼 다행이고.
이하윤>>역시…. 얼굴만 본 거 아니었네. ㅠㅠ(우는 이모티콘)
이화윤의 함정수사에 딱 걸린 한수호는 딱히 회신할 말이 없었다.
이하윤>>농담이야. 난 정말 괜찮아. 설마 저장까진 안 했을 거잖아? 그치?
당연히 저장 따윈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이미지 어플을 열어 봤다.
그런데, 몇 장 없는 사진들 속에 방금 이하윤이 보낸 사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예전에 톡으로 주고받는 이미지를 일일이 다시 저장하는 게 귀찮아서 자동 저장으로 설정해 놓았었다.
아뿔싸 싶은 한수호는 바로 삭제를 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이하윤이 밝게 웃으며 브이를 그린 얼굴이 너무도 예뻐 보였다.
검은 딱지는 거의 사라졌고, 불그스름한 자국만 살짝 남아 있는 상태라 본래의 미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이하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한수호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폰으로 통신이 이루어졌습니다. 개발자에게 통신 내용을 전달하겠습니까?
(YES/NO)
뜬금없이 떠오른 메시지에 화들짝 놀란 한수호는 황급히 NO를 눌렀다.
하마터면 이하윤의 사진이 그대로 스티커 개발자인 이산에게 넘어갈 뻔했다.
이하윤은 이하이의 동생이고, 이하이는 이산의 딸이다. 그럼 이하윤 역시 이산의 딸이라는 단순명료한 사실이 나온다.
‘어우야. 아버지한테 딸 노출 사진이 넘어갈 뻔했네.’
그것도 본인에 의한 게 아니라, 한수호의 폰에서 넘어갈 뻔했으니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한수호는 이하윤의 사진을 클릭해 한 번 더 자세히 보다가 결국 삭제해 버렸다.
이건 순수하게 얼굴 상처를 확인한 것이지, 노출을 보기 위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어쨌든 삭제하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근데 좀 아쉽…. 아니다. 내가 뭔 생각을.’
머리를 휘저으며 생각을 털어낸 한수호는 바로 칙톡을 보냈다.
한수호>>미안. 잠깐 전화가 와서. 내가 그 사진 저장했을 리가 없잖냐.
이하윤>>대답이 늦어서 혹시나 했는데, 휴….
한수호>>이제 쉬어. 나도 오늘은 푹 쉬어야겠다.
이하윤>>응. 내일 봐.
그렇게 칙톡 어플을 끈 한수호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제 2시간 정도면 약탈을 사용한 대가로 견뎌야 하는 고통도 끝난다.
‘미션은 고통이 사라진 다음에 하자.’
한수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2시간 동안 용의 박동 호흡법을 하기로 했다.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수호.
그의 입에서는 금세 규칙적인 호흡이 진행되며,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 * *
그 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한수호는 한 번 정도 더 이하윤의 흉터에 약탈을 사용해 주려고 했으나, 지난번 한수호가 크게 앓아눕는 걸 본 뒤로 치료를 받지 않으려 했다.
이젠 그 정도로 아플 일이 없을 거라고 설명을 해 줬지만, 이하윤은 계속 나중에 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완벽하게 치료를 끝내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것 말고도 한수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가양 게이트에서 헤어진 지 일주일이 훨씬 넘었음에도 이하이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는 것.
자신이 안달 난 것처럼 보이기 싫어 먼저 전화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소식이 너무 길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김재우와 던전을 돌 때도 그다지 적극적이질 못했다.
어쨌든, 던전 아홉 곳을 돌았고 큰 문제 없이 포인트를 흡수해 이젠 88만이라는 엄청난 포인트를 보유하게 되었다.
NP도 크게 늘었다.
매일같이 수행하는 미션에, 아침마다 먹는 소원의 열매 덕분에 NP가 이젠 155나 된다.
‘처리할 일은 많은데, 일 진행은 더디니 참 답답하네.’
한수호는 지금 포인트를 사용할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수호가 기다리는 건 여러 가지였다.
우선, 백진성이 성형을 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백윤후가 알아내길 기다려야 했다.
다음은 이하이로부터 연락을 받아 이산을 만나야 했고, 사기환의 도움을 받아 몇몇 인물의 정보와 가족사진에 대한 걸 확인해야 했다.
‘그냥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나?’
이제 곧 4월 중순이라 스승 부부가 서울에 올라올 시기도 다 됐다.
그렇다는 건, 서울 대법원 앞의 5급 게이트가 3급으로 격상되는 시점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한수호는 대법원 게이트를 먼저 들어가서 조사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들어간다고 3급 격상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5급 게이트라 중화기 대대가 엄중하게 경계를 하는 곳이라 몰래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뭐라도 하나 답이 나와야 하는데, 죄다 깜깜무소식이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한수호에게 희소식이 날라왔다.
전투 영역에서 빠져나온 직후, 공법폰으로 사기환의 연락이 와 있었던 것.
[많이 늦었지? 그동안 연구에 몰두하느라 딴생각은 전혀 못 했거든. 그래도 오늘 여유가 생겨서 네가 부탁한 거 모두 확인해 봤다. 그런데, 참 신기하네. 네가 준 사진 속 인물들 말이다. 하나같이 정보가 막혀있어. 그나마 몇 번의 우회로를 거쳐서 간신히 알아낸 건 딱 한 명이야. 그런데, 기막히게도 그 한 명이 바로 네가 전에 확인 요청했던 장한설이더라. 자세한 정보는 여전히 막힌 상태고. 아무튼 알아낸 정보는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라.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얼굴 한번 보러 가마.] – 사기환
부재중 전화도 있는 거로 봐서는 직접 전화로 설명해 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부탁을 잊지 않고 챙겨준 고마움에 한수호는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번엔 사기환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새 또 연구실로 들어갔나 보네.’
입맛을 다신 한수호는 할 수 없이 문자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랩톱을 켜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자신이 건넨 사진에 대한 정보였다.
엄마인 이태희와 형 한성찬, 동생 한설아와 막내 한별이까지.
그중 조금이나마 정보가 확인된 건 한설아뿐이었다.
한설아의 사진 옆으로 9살 이전의 기억을 잃은 채, 장현오라는 인물에게 입양되었다는 설명을 보는 순간 한수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미 99.9%의 확률로 장한설이 한설아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기환의 확인 덕분에 100%가 채워졌다.
0.1%의 차이는 컸다.
과거의 기억이 없는 쌍둥이 동생 한설아.
그녀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멀쩡히 살아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고, 감격스러웠다.
안타깝게도 다른 가족의 정보는 꽉 막혀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 모두 살아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수호는 눈물을 훔치고 사기환의 다른 정보를 훑어봤다.
가장 먼저 방태식에 대한 정보였다.
[방태식]
-나이: 46세
-현 위치: 특정 불가. 14일 전 인천 송도 XXX-XX에 이틀간 머무름
-보유 특성: 생체 조작
-가족 관계: 아내(이소연)와 딸(방민경)이 있었으나 얼마 전 딸 사망. 아내와는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
-추가 정보: 많은 인물의 죽음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이 깊으며, 14일 전에도 실험 중이었음. 정의국, 특무부, 대한맹의 추적을 받고 있으나 행적 묘연.
꽤나 자세한 정보에 한수호는 혀를 내둘렀다.
현재 위치까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그걸 빼고는 그 어떤 자료보다도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역시 인천에서 황가련 가족을 해친 건 방태식이었나?’
14일 전이면 딱 인천에서 사건이 일어난 날이고, 그날에도 실험 중이라고 했으니 황가련의 부모를 실험체로 썼음을 의미했다.
‘많은 인물의 죽음과 연관이 깊다라….’
어쩌면 방태식이야말로 이프리트의 수장에 가장 어울린다고 볼 수 있었다.
‘이자부터 찾아야겠어.’
생체 조작 능력이 있는 방태식.
이자라면 한설아의 기억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형과 어머니, 한별이까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정의국, 특무부, 대한맹이 온 사방을 뒤지고 다니는데도 버젓이 살인을 저지르는 흉악한 놈이다.
‘황가련 부모의 시체에 기계장치가 붙어 있었다고 했지?’
갑자기 떠오른 생각.
기계장치는 분명 방태식이 실험하다가 남긴 흔적일 터.
거기에 개조 특성을 이용한다거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빼는 거로 코스트를 부여한다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시체가 있는 곳에 직접 가봐야 했다.
‘또 재우 형한테 도움을 요청해야겠구나.’
황가련 부모의 시체는 중요한 증거나 다름이 없으니 아직 시체를 매장했거나 화장했을 리 없었다.
‘이번 주말에 만나야겠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이틀 후 만나면 딱이다.
한수호는 그렇게 일정을 정하고, 다음 정보를 살폈다.
[김명중]
-나이: 26세
-현 위치: 특정 불가
-보유 특성: 대범종
-가족 관계: 특정 불가
-추가 정보: 메디컬 게이트 CEO. 가양 게이트 소유주. 스카이 우드캐슬 대표이사. 수많은 행운의 주인공. 과거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인물.
메디컬 게이트의 CEO인 김명중에 대한 정보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미 아는 내용뿐이었고, 몇몇 정보는 특정 불가로만 나온다.
‘과거가 의심스럽다라…. 나와 같은 회귀자라서?’
문뜩 생긴 의문.
만약 사기환이 한수호 자신을 목표로 정보를 확인한다면 어떤 내용으로 나올까?
어쩌면 회귀자로 의심되는 김명중처럼 과거가 의심스럽다고 나올지도 모른다.
언제 한번 사기환에게 자신의 정보도 확인해 달라고 부탁해 보기로 마음먹은 한수호는 곧바로 서한광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서한광]
-나이: 47세
-현 위치: 인천 XXX. XX-XXX. 태극서가
-보유 특성: 검왕의 혼
-가족 관계: 아내(이혜미)와 두 자식(서중, 서은채). 남동생(서동훈).
-추가 정보: 대한맹의 맹주. 태극서가의 가주. 일존사왕오패 중 태극검왕. 자신의 룰에 반하는 자는 자식일지라도 조금의 용서가 없음. 대쪽 같은 인물로 악을 멸하겠노라 맹세한 바 있음. 대한맹의 내부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됨.
서한광에 대한 정보를 쭉 읽어내려가던 한수호는 가족 관계에서 멈칫했다.
‘서은채? 월미도의 그 서은채가 서한광의 딸이었어?’
서은채가 마공가문의 후예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태극검왕 서한광의 딸일 줄은 예상 못 했다.
한수호가 아는 서은채와 서한광의 딸 서은채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왠지 동일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잘하면, 서한광이 대법원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수 있겠는데?’
한수호의 눈에 서은채라는 이름이 대한맹의 미래를 바꿔줄 금빛 동아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