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한수호는 계획을 세웠다.
대법원 게이트가 격상되는 시점에, 서한광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가 큰 부상을 입어 대한맹의 힘이 약화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한수호로서는 일면식도 없는 서한광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설사, 그를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로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답이 서은채라는 이름에서 보였다.
‘그 당찬 꼬맹이를 어떡하든 먼저 만나야 한다는 건데….’
이름과 얼굴만 알지,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인천의 태극서가를 찾아가서 서은채 좀 만나야 한다고 요구하기엔 너무 이상했다.
‘우선 킵.’
이 정보는 일단 미루어 놓고, 기회를 보기로 했다.
서한광의 정보까지 확인한 한수호는 마지막으로 오중현에 대한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백윤후에게 꽃잎을 흩날리는 독특한 검법을 전수했다는 검술 스승 오중현.
과연 그의 정체가 10년 전의 그 가면인일지 너무도 궁금했다.
[오중현]
-나이: 44세
-현 위치: 특정 불가
-보유 특성: 매화만개
-가족 관계: 특정 불가
-추가 정보: 현재 정의국 검술 교관. 천갈궁 소속.
정보를 본 순간, 한수호의 눈이 급속도로 커졌다.
‘천갈궁?’
드디어 가면인들의 실마리를 잡았다.
10년 전, 꽃잎 세 장이 새겨진 가면인과 오중현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오중현의 특성이 매화만개라는 점, 그리고 현재 정의국에서 여전히 검술 교관을 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그가 놀랍게도 천갈궁 소속이라는 점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오중현…. 10년 전의 그자가 분명해.’
그가 가면인이라고 가정한다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가면인들이 바로 이프리트에 속한 자들이며, 그들이 정의국에 스며들어 있었기에 지금껏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모든 일의 뒤에는 천갈궁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그런 자가 백윤후에게 자신의 특성과 연관된 검술을 가르칠 정도로 가까웠다?
그렇다면 백진성도 그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가능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설마 백진성이 이프리트의 수장인가?’
백진성은 단체 사진 속 인물 중 살아남은 7인 중 한 명임과 동시에, 모든 마공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는 국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프리트의 수장이 한 명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그럼 정의국과 천갈궁이 손을 잡았다는 구도도 얼마든지 그려질 수 있었다.
‘혹은…. 천갈궁의 누군가가 백진성인 척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백진성이 얼굴 성형을 한 이유도 거기서 유추하는 게 가능했다.
백진성의 얼굴에 일부러 상처를 입히고, 어쩔 수 없이 성형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다음 다른 인물을 성형한 것처럼 꾸며 아예 사람 자체를 바꿔 치기 한 거라면?
그럼 모든 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로써 백윤후가 백진성의 성형에 대해 가져올 정보가 무척이나 중요해졌다.
한수호는 생각난 김에 백윤후의 감정 상태를 체크해봤다.
일전에 나노 음료를 먹여두었기에 원하면 얼마든지 백윤후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대상의 감정에 ‘귀찮음’이 가득합니다.
대충 안 봐도 뻔한 내용이었다.
‘내가 시킨 일 때문에 상당히 귀찮아하는구나.’
그래도 귀찮아한다는 건, 한수호가 시킨 일을 하려고 한다는 의미이니 나쁠 게 없었다.
공법폰을 꺼낸 한수호는 백윤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부탁한 일, 귀찮다고 뒤로 미루지 말고 서둘러 줘라. 내 인내심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지?]
협박성의 문자를 보내자마자 백윤후의 답장이 날라왔다.
[너 돗자리 깔아라. 어찌 그리 내 맘을 잘 아냐? 아무튼, 알았으니 재촉은 거기까지.]
말투에서 깜짝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추가 문자는 보내지 않았다. 알았다고 한 이상 조만간 뭔가 소식이 있으리라.
한수호는 백윤후가 답을 가져오길 기다리기로 하고는 랩톱을 닫았다.
* *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4월 7일.
한수호는 스승 부부로부터 5일 뒤, 서울에 올라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에 어쩐 일로 오는 것인지 물어봤지만, 스승 부부는 왜인지 답을 피하는 것 같았다.
괜히 깊숙이 캐묻게 되면 자신을 만나지도 않고 일부터 처리할 수 있기에 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5일 뒤면 목요일이네. 그전까지 어떡하든 LP 백만을 채워야 해.’
한수호는 스승 부부가 서울에 올라오는 날이 대법원 게이트가 3급으로 격상되는 바로 그날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도 스승 부부의 목적은 대법원 게이트에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전까지 광폭화나 개조 특성 중 하나를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시킬 필요성이 커졌다.
사왕오패의 하나인 서한광이 큰 부상을 당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 발생할 테니 충분한 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한수호는 지금 주말도 반납하고 김재우와 함께 던전을 열심히 도는 중이었다.
[7급 던전 ‘아틀란 사막의 고대유적’]
-보유 포인트: 22,000LP
-위험도: ★★☆☆☆☆☆☆☆☆
-아스루나 대륙에서 가장 광활한 사막지대에 세워진 거대 도시의 유적입니다.
-모래 폭풍이 사라지는 날, 고대 유적의 입구가 드러나면 초고대 문명의 문화를 접할 수 있습니다.
-발자크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모래 폭풍이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 [00:02:13:27]
>>포인트를 흡수하면 던전의 위험도가 상승하여 클리어 보상 수준이 상승합니다. 포인트를 흡수하겠습니까? YES/NO
균열의 정보를 읽어낸 한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서울 최북단에 위치한 도봉구의 구석진 동네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요양 병원 앞에 생긴 던전이였고, 특무부에 의해 관리된 지도 몇 년이 지난 상태였다.
그런데 이 던전에 유적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모래 폭풍이 사라지면 유적지가 드러난다는데, 하필 2시간 13분 뒤에 모래폭풍이 사라진다고 표시되고 있다.
‘이거 우연이야, 운명이야?’
마치 한수호 보고 꼭 이곳에 들어가 보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한수호는 자신의 보유 포인트를 확인해봤다.
-보유 포인트: 176.0NP / 991,000LP
백만 LP가 채워지기까지 딱 9천이 남았다.
이 던전의 포인트만 흡수하면 특성을 업그레이드 시킬 백만LP가 채워지는 것이다.
‘시점이 참 교묘하네.’
별다른 내용이 없었으면 바로 포인트를 흡수하고 끝냈을 텐데, 던전의 내용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망설이게 만든다.
‘고대 유적의 입구가 드러나게 되면 초고대 문명의 문화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는데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가 없지 않은가.
“왜 그래? 네 감이 여기 위험하다고 경고라도 해?”
김재우가 한수호의 표정을 보고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런 건 아닌데요. 음…. 혹시, 이 던전에 들어간 적 있는 마공사들 중에서 혹시 특이한 거 봤다거나, 이상한 거 주워온 사람 없어요?”
“특이하고 이상한 거? 없는데? 나도 얼마 전에 여기 다녀온 적이 있어. 알다시피 대한민국에 있는 던전 중에서 성수 포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몇 안 되잖냐. 여기선 성수 포션이 보상으로 나오거든. 그래서 나도 여기 들러서 몇 개 챙겨뒀지.”
이 도봉구 던전은 신성력과 관련된 특성을 지닌 마공사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그 이유는 김재우가 말했듯 성수 포션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던전에서 언데드가 나온다거나, 신성력을 지닌 몬스터가 나오는 건 아니다.
이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는 딱 세 종류.
스콜피누와 사보텐더, 그리고 그레이트웜이었다.
스콜피누는 전갈의 꼬리를 지닌 사막여우였고, 사보텐더는 움직이는 선인장이다.
그레이트웜은 모래 속을 제집처럼 들쑤시며 다니는 몬스터로 1미터의 소형부터 길이만 100미터나 되는 대형까지 다양했다.
재밌는 건 이 세 종류의 몬스터 중, 가장 강한 놈이 바로 사보텐더라는 것이다.
외형마저 선인장과 똑같이 생긴 이놈은 충격 완화라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놈으로, 원거리 공격의 충격을 99%나 감소시킬 수가 있었다.
그나마 근거리 타격에는 약해서 50%밖에 감소시키지 못하지만, 적이 근접하면 스치기만 해도 스턴에 걸리는 가시 공격을 비처럼 쏟아붓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어렵다.
처음 이 던전이 등장했을 때, 이 사보텐더를 잡겠다고 덤볐다가 오히려 역으로 당한 마공사들이 거의 백에 가깝다.
지금은 어느 정도 공략 방법이 세워져 전처럼 큰 희생은 나오지 않지만, 여전히 상대가 어려운 몬스터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재우 형. 우리 여기 한번 들어가 볼래요?”
“던전 폐쇄하자고?”
“아니요. 폐쇄까지는 아니고…. 이상하게 느낌이 오거든요. 여기 들어가면 뭔가 얻는 게 있을 것 같다는.”
“또 그놈의 감이냐?”
“그런 거죠. 흐흐.”
한수호가 웃으며 대답하자 김재우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 나도 요즘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서 좀 답답했거든.”
“재희 누나가 스트레스 많이 줘요?”
“어? 내, 내가 언제 재희가 스트레스 줬다고 했냐? 그냥 일이 힘들고 답답하니까 그런 거지. 크흐흠.”
헛기침을 하며 아니라고 하는 걸 보니, 윤재희로 인한 스트레스가 맞나보다.
한수호는 속으로 큭큭 웃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착용구를 꺼내 허리에 둘렀다.
“형도 준비해요. 사보텐더 대비해서 방호구도 입고요.”
“너는?”
“전, 이 옷이 방호구예요.”
한수호는 갈색의 두터운 후드티를 쭉 잡아당겨 보였다.
사실 이 후드티는 한수호가 약간의 포인트를 써서 재질을 개조한 특별한 옷이었다.
[단단한 후드티]
-코스트: 6
-외부의 충격을 20% 흡수합니다.
-쉽게 찢어지거나 구멍 나지 않습니다.
-약간의 방한, 방열 기능이 있습니다.
-자가 수복 기능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꽤나 훌륭한 효과였다.
약간의 포인트라고는 해도 거의 10만 LP를 사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진작 백만 LP를 모아 특성 업그레이드가 끝났으리라.
“네 표정만 봐서는 무슨 절대 금속으로 만들어진 갑옷이라도 되는 것 같다?”
“그냥 그렇다고요.”
“싱겁긴.”
김재우도 장비를 착용했다.
하지만 지난번 라라의 호수에 갈 때처럼 엄청난 무장을 하진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 무거우면 그레이트웜이 만들어내는 모래 함정에 빠져 쉽게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던전 게이트 앞에 나란히 섰다.
마음 같아서는 포인트를 흡수해 위험도를 3성으로 높여두고 싶었지만, 고대 유적지가 드러난다는데 괜히 위험도 높였다가 라라의 호수 때처럼 이상한 일이 발생할까 봐 조심하기로 했다.
“그럼 간다. 잘 따라오고.”
김재우가 먼저 게이트 속으로 들어섰다.
‘고대 유적지라…. 왠지 이 안에서 아스루나의 인류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묘한 기대감에 부푼 한수호는 바로 게이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후끈.
한순간에 바뀐 풍경 속에서 한수호는 태양 빛의 뜨거움에 얼른 후드를 눌러썼다.
‘옷에 방열 기능도 추가해 두길 정말 잘했네.’
한수호는 속으로 만족해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모래사막이다.
두 사람이 나온 장소는 주변보다 살짝 높은 구릉 위였는데, 사방 어디를 봐도 끝없는 사막뿐이었다.
“길 잘못 들었다간 귀환도 못 하겠는데요?”
한수호가 혀를 내두르자 김재우가 껄껄 웃었다.
“특무부가 그런 것도 대비를 안 해놨을까? 저기 게이트 뒤에 ‘블랙폴’ 안 보이냐?”
김재우가 가리킨 곳을 보니 거기에 약 2미터 크기에 성인 팔뚝만 한 굵기의 검은 기둥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저게 블랙폴이에요?”
한수호도 블랙폴이 뭔지는 안다.
일종의 이정표 같은 건데, 엄청난 강도를 지닌 쇠막대로 안에 최대 200킬로미터까지 뻗어 나가는 고주파 발생기를 탑재하고 있었다.
블랙폴에서는 사람의 귀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고주파가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간단한 수신기만 있어도 위치를 금방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게 모래사막 깊숙하게 박혀 있어서 길을 잃을 일은 없지.”
“그럼 다행이네요.”
블랙폴의 실제 길이는 무려 15미터.
땅 위로 나온 길이가 2미터일 뿐이지, 13미터나 되는 기둥이 땅속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어디부터 가볼까? 여긴 가볼 만한 곳이 딱 두 군데뿐이야. 게이트 북서쪽에 위치한 ‘생명의 오아시스’하고 남동쪽에 위치한 ‘사막 크레이터’지.”
한수호는 두 지역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감이 왔다.
“사막 크레이터로 가죠.”
“거긴 사보텐더 출몰지역이니까 조심해야 한다.”
“재우 형이 있는데 뭐가 무서우려고요.”
“말이라도 못하면…. 쯧.”
그러면서도 듣기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한수호와 김재우는 방향을 정하고 그곳을 향해 아무것도 없는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