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세상에!”
이하이는 자신 앞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크레이터를 구분하는 경계 지역이었는데, 지금은 최소 4~500미터는 될 법한 높이의 절벽으로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크레이터 안쪽에서 드러난 것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분지 속의 거대 도시였다.
경계 지역 바깥쪽은 완만한 경사도를 지닌 사막이었지만, 안쪽은 완전 딴판이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갑자기 싱크홀이 갑자기 생기고, 그 싱크홀 바닥에서 고대의 도시가 등장한 느낌이랄까?
“저기 길이 있다. 얼른 가자.”
이산이 가리킨 곳은 절벽이었는데,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폭 1미터 정도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계단은 100여 미터 아래에서 뚝 끊겨있었고, 그곳엔 동굴이 보였다.
“저곳이 입구인가 봐요.”
“서둘러라. 이제 곧 유적지를 수호하는 가고일들이 깨어날 거다. 늦으면 저곳엔 접근도 못 한다.”
“네!”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그들과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라드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모두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을 쩍 벌린 채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로 엄청날 줄은….”
“역대급으로 큰 유적지인 거 같은데요?”
“제 히든뷰로도 이런 내용까지는 안 나왔는데. 정말 놀랍네요.”
마지막에 이상한 말을 꺼낸 길드원을 향해 박윤배 공대장이 눈을 부라렸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사내는 급히 입을 닫았다.
“여기 계단이 있는데요?”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서은채가 근처 절벽에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유적지로 통하는 계단인가 보구나. 그런데 꽤 위험해 보이는데?”
김성태가 사보텐더 한 마리를 옆에 끌어다 놓고 계단을 살폈다.
그는 자신이 잡은 사보텐더의 사체를 어떡하든 가지고 귀환하고 싶었다.
그보다 강한 박윤배 공대장도 속수무책인 사보텐더였지만, 김성태의 ‘건가타’는 그런 사보텐더를 어렵지 않게 쓰러뜨렸다.
김성태의 건가타.
이 특성은 아주 독특한 능력이었다.
보통, 이런 류의 특성은 원거리 공격이라 마나 탄환을 쏘아내 적을 맞춰 충격을 가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이 건가타는 달랐다.
특성을 사용하면 바로 마나 탄환이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고스트라는 반투명한 존재가 튀어나와 목표를 향해 달려들고, 그 고스트는 목표의 신체에 반투명한 마나건을 직접 가져다 댄 채로 탄환을 쏘아 낸다.
그렇다 보니 이 건가타는 원거리가 아닌 직접공격으로 판정을 받게 된다.
특성을 사용한 자는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마나건을 쥔 고스트를 쏘아 보내 목표에 직접 마나탄을 쏘아내는 것.
그것이 건가타였고, 그 유용함을 알아본 박윤배가 김성태를 무라드 길드로 영입했던 것이다.
박윤배의 팀원 중에는 또 다른 특이한 특성을 지닌 자가 있었다.
그의 특성은 ‘히든뷰’.
한수호처럼 던전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던전이나 게이트에 어떤 숨겨진 히든피스가 있는지 대략적인 정보를 알아낼 수는 있었다.
그들은 수개월 전 이 던전을 찾았었고, 히든뷰 덕분에 얼마 후 이곳에 고대 유적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박윤배를 제외한 팀원 모두가 특급이거나 평급에 불과해서, 그들만으로는 사보텐더를 피해 사막 크레이터에 도착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에게 김성태의 건가타는 매우 중요했다.
직접 공격 판정이 나오는 원거리 딜러.
이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지원군은 없었다.
그래서 박윤배는 김성태가 조카인 서은채를 데려오는 것까지 순순히 허락했던 것.
“김성태 씨. 일단, 사보텐더는 나중에 귀환할 때 챙기는 거로 합시다. 그땐 저희도 도울 테니 우선은 저 유적지에 들어가서 뭐가 숨겨져 있는지 확인부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그러시다면 저야 감사하죠. 그나저나, 왠지 위험해 보이는데…. 은채야. 넌 여기서 우릴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
김성태는 본능적으로 이 유적지가 보통 장소가 아님을 느꼈다. 그래서 아끼는 조카인 서은채를 저 안에까지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서은채는 대답 대신 김성태의 옷깃을 잡아끌어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삼촌. 내가 보기엔 저 유적지보다 저 사람들이 더 위험한 것 같거든?”
서은채는 한수호가 놀라워할 정도로 전투 감각도 좋고, 상황 판단이나 위험 감지 능력이 훌륭했다.
그런 서은채가 박윤배와 그의 공략팀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허어.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저분들이 이 삼촌을 얼마나 잘 챙겨 주셨는데.”
김성태는 박윤배 등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야 삼촌 특성이 저들한테 너무 필요했으니까 그런 거겠지. 보니까 사보텐더 잡을 때는 삼촌 특성이 완전 천적이나 다름없던데? 게다가 저 사람들이 나 보는 눈빛이 너무 꺼림칙 해. 꼭 상품 감상하는 거 같다니까?”
“흠. 정말이냐?”
그제서야 김성태가 심각하게 반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서은채에 관해서 만큼은 김성태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
“그럼, 이쯤에서 그냥 나가자. 유적지 안에 무슨 보물이 있을지는 몰라도, 널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하고 같이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이참에 길드도 나와야겠다.”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아. 나도 내 한 몸 지킬 능력은 있으니까, 충분히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저쪽은 다섯이고, 우린 둘인데? 게다가 박윤배 공대장은 진급 마공사야.”
김성태는 서은채의 말 몇 마디에 바로 길드를 나올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서은채를 신뢰한다는 의미.
“이 유적지가 드러나는 걸 우리만 알고 있었을까? 여길 찾아온 사람이 한둘은 아닐걸?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면 되니까, 모르는 척 따라가 보자. 저 유적지…. 왠지 좋은 느낌이 들거든.”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사실 김성태도 이 거대한 고대 유적지를 두고 그냥 돌아가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다만, 서은채의 안전이 우선이기에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던 거였다.
“혹시라도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우리 집안이 어딘지 말하면 될걸? 설마 아빠가 태극서가의 가주라는 말을 듣고도 이상한 짓을 하려 들지는 않겠지.”
“그렇긴 하지.”
이는 김성태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만큼 태극서가와 그곳의 가주, 서한광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매형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 이럴 땐 또 이름값 써먹으려고 하네.”
김성태의 누나 김신애가 서은채의 엄마였으니 서한광은 김성태에게 매형이었다.
“필요하면 뭐든 써먹어야지. 내 감정은 감정이고.”
“하하. 알았다. 어쨌든, 안에서 네 멋대로 행동하는 건 금물이다. 어딜 가든 나와 같이 가고. 알았지?”
“응. 당연하지.”
서은채와의 이야기를 끝낸 김성태는 다시 일행들에게 되돌아갔다.
“유적지 탐사가 부담되면 밖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박윤배도 뭔가 이상하다는 감을 느꼈는지, 억지로 두 사람을 데려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희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조카 녀석이 겁을 먹었길래 좀 다독거려 준 겁니다. 걱정 마시죠.”
김성태가 웃으며 대답하자 박윤배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자, 그럼 내려가 봅시다. 과연 저 안에 뭐가 나올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일행은 위험해 보이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유적지 전체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계단의 끝에 위치한 저 아래 동굴 입구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상태.
불안해진 김성태가 주변을 급히 둘러보던 그때,
“저, 저기!”
김성태는 저 멀리 보이는 고대 유적지의 건축물 중에서 한 곳을 가리켰다.
첨탑처럼 솟아오른 건물의 꼭대기.
그곳엔 웅크리고 있는 석상이 네 방향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석상에 균열이 생기더니 돌조각을 우수수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끼아아아아아악!
석상이 웅크렸던 몸을 활짝 펴며 크게 괴성을 내질렀다.
“저기도 있어요!”
“저기에도!”
공략팀 전원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기겁했다.
거의 모든 건축물의 꼭대기에 비슷한 형태의 석상이 있었는데, 모든 석상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가고일이었다.
무려 수천 마리는 될 것 같은 엄청난 숫자의 가고일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실로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직 일행들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가고일들은 유적지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빨리 뛰어!”
박윤배가 뛰기 시작하자 일행 모두가 정신없이 계단을 뛰었다.
그로 인해 몇몇 가고일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끼아아아아아악!
귀청을 찢는 괴성.
곧이어 가까운 곳에 있던 가고일 수백 마리가 이쪽으로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이에 김성태와 서은채도 더는 머뭇거리지 못하고 계단을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움직이지 마요. 소리도 내지 말고.]
한수호는 김재우에게 마나 전음을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그들이 있는 건축물 꼭대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가고일들로 가득했기 때문.
모래가 사라지고, 고대 유적지가 드러난 직후, 두 사람은 어떡하든 아래로 내려갈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유적지 바닥에서 이곳까지의 높이는 대략 400미터.
그냥 뛰어내리기에는 너무나 높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니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가고일들이 깨어났다.
그나마 한수호가 놈들의 약점을 단숨에 파악한 덕분에 엄청난 수의 가고일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아직 무사할 수가 있었다.
‘눈 스탯이 마이너스 1이라니….’
가고일의 신체 스탯을 확인한 결과, 눈의 수치가 -1이었다.
대신 뾰족하게 솟은 귀의 스탯은 무려 88이나 되고 있어, 시각이 퇴화하고 청각이 고도로 발달한 몬스터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건물 난간에 달라붙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한수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고일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으로 벽을 때려 부쉈다가는 당장 수많은 가고일이 달려들게 뻔한 일.
소리를 내지 않고 벽을 부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일단, 쇄혼으로 손의 강도를 높여놓고.’
쇄혼 특성을 사용하자, 오른손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 상태로 얼음불 특성을 함께 발휘하니 손에서 새파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그 손을 벽에 가져다 댔다.
츠으으으으
벽이 아이스크림처럼 녹기 시작했다.
소음은 생각보다 작아서 청각이 발달한 가고일들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태.
단숨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 크기의 구멍을 만들었고, 한수호는 김재우를 불러들였다.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김재우도 한수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자신을 부르기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한수호가 한발 먼저 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김재우도 들어섰다.
다행히도 구멍 안에는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바닥이 존재했다.
벽을 따라 나선형으로 계단이 설치된 구조였기에 위쪽이든, 아래쪽이든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가 있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금 한수호가 만든 구멍이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벽으로 감쪽같이 수복되었다.
건물 자체에 자가 수복 능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어서 알아서 구멍을 메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라운 일임은 분명했다.
“후…. 이제 말해도 되겠네요.”
“하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뭔 놈의 가고일 숫자가 수천이 넘어가냐?”
김재우가 이제야 안도했는지 벽에 기대며 혀를 내둘렀다.
“시력이 퇴화되서 다행이었어요. 아무래도 가고일들은 이 유적지가 드러나면 깨어나서 침입자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죠?”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가고일은 4급이나 5급 게이트에서나 나타나는게 정상이야. 이런 던전에선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놈들이라고. 그것도 수천마리나 되다니.”
김재우는 정말 크게 놀란 상태였다.
가고일 자체가 엄청 강력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세 마리가 모이면 특급 마공사 하나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가고일이 수천 마리가 넘게 날아다니고 있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일단, 아래로 내려가 보죠. 이 건물이 여기서 가장 높고, 정 중앙에 위치해 있는 걸로 봐서는 중요한 뭔가가 숨겨져 있을 법도 한데….”
한수호는 너무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건물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머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아래는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어둠속에 잠겨있지만, 위쪽에서는 어슴푸레 빛이 흘러나온다.
그 빛은 건물 천장의 중앙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을 따라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서 닿을 수 있는 곳에, 무언가 둥실 떠 있었다.
“저기 뭔가 있는데요?”
한수호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되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심해라. 뭐가 또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김재우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조심조심 한수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거대한 건물 내부의 계단을 빙빙 돌며 위로 올라갔을 때,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꼭대기는 돔처럼 생긴 천장이 존재했고, 그 아래로 샹들리에가 늘어뜨리고 있었다.
계단은 그 샹들리에를 만질 수 있는 곳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계단 끝은 난간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까지 나아가자 샹들리에 위로 촛불 대신 빛나는 보석 다섯 개를 볼 수 있었다.
마치 게임에서 최종보스를 물리치면 나오는 보상처럼, 가지런히 놓인 다섯 개의 보석.
그 보석들에서 뿜어지는 빛이 한수호의 손길을 기다리듯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