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한수호는 서은채가 뭘 원하는지 바로 파악했다.

‘여우 같은 녀석….’

서은채는 강제 각성을 핑계로 한수호를 고용해서 밖으로 나간 다음 이하이에게 도움을 줄 생각인 것이다.

숨은 의도를 알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자선사업가처럼 정의감만으로 그들 부녀를 돕는 건 싫지만, 대가가 주어진다면 도와줄 용의가 있었으니까.

“고용에 대한 대가는?”

“돈이든, 아티팩트든, 다른 것이든 원하는 건 뭐든지요. 여길 나가게 되면 반드시 원하는 걸 드릴게요.”

“은채야! 그런 무책임한 약속은 하는 게 아니다!”

김성태가 급히 말려봤지만 서은채도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이 아니었다.

“외삼촌. 그거 알아요? 아빤 제가 여기서 새로운 특성을 각성해서 돌아가면 분명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해 줄 거라는 거요. 인정만 받으면 태산 오빠가 원하는 거 하나 정도는 무엇이 되었든 충분히 해줄 수 있어요. 내 말, 틀렸나요?”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그건 아니지. 태산 학생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했다가 그걸 감당 못 하면 서로 관계가 틀어질지도 모른다.”

김성태는 확실히 현실적이었다.

나중에 가서 딴소리 하는 거보다, 지금 이렇게 까놓고 이야기 하는 게 한수호에겐 더 나았다.

“물론 상한선은 정해놔야죠. 돈으로는 15억. 아티팩트로는 A급까지. 이 정도면 어때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흘러나오는 말에 김성태는 더 따지지 못했다.

하지만 한수호가 서은채에게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물질적인 게 아닌데….”

한수호는 서한광이 대법원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서은채는 뭔가 다른 걸 생각한 모양인지 얼굴을 찌푸리다가 금속으로 된 로봇팔을 툭툭 건드렸다.

“한 팔이 이런 상태인데도 괜찮다면요. 대신 몇 년 기다려야 해요. 제가 아직은 미성년자라….”

“…. 뭐?”

아무리 한수호라도 이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거 아닌가? 잘못짚었나 보다. 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서은채였다.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인데도 박윤배와 이창선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하고도 너무 멀쩡하다.

월미도 사건에서도 크게 충격받지 않았던 걸 봐서는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네 각성을 돕지.”

“정말이죠? 당연히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어야 한다는 건 잘 알죠?”

“크게 어렵지 않을 거다.”

“그럼 저도 오케이. 이제 제가 오빠 고용주가 되는 겁니다?”

“대신, 두 분은 여기서 내려가 계세요.”

한수호는 김재우와 김성태에게 대피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함께 있어 봐야 방해만 될 뿐이었다.

위험이 있더라도 서은채 한 명이라면 충분히 구해낼 자신이 있었고.

“하지만, 은채를 혼자 두고는….”

“이봐요. 괜찮을 테니까, 태산이 녀석 믿고 빠져줍시다. 우리 때문에 오히려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그런 상황은 피해주자고요.”

김재우는 눈치 빠르게 한수호의 뜻을 바로 읽어냈다.

“하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태산! 은채한테 무슨 일 생기지 않게 잘 부탁한다.”

“네. 걱정 마세요.”

김재우도 한수호에게 뒤를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김성태와 함께 3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둘만 남았네요.”

“나한테서 열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마라.”

한수호의 단호한 말에 서은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 뒤에 서.”

서은채가 등 뒤에 서자 한수호는 4층의 한쪽 구석으로 향했고, 거기서 손에 쇄혼을 둘렀다.

단숨에 새빨갛게 변한 손 위로 얼음불을 일으키자 지옥의 불길처럼 강렬한 화염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와, 엄청나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특성 없었던 거 같은데….”

서은채가 혼자 중얼거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한수호는 불타는 손으로 벽에 구멍을 만들기 시작했다.

타워의 저층이라 그런지 벽의 두께가 만만치 않았다.

무려 2미터나 되는 깊이로 구멍을 뚫자 그제야 밖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 구멍을 통해 타워 밖으로 나섰다.

번쩍.

꽈과과과과광

끼아아아아악

밖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사방에서 빛이 번쩍거리며 폭발이 일었고, 한 번에 수십 마리의 가고일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중심에는 새파란 장검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고 있는 이하이가 있었다.

이하이의 무력은 정말 대단했다.

건물과 건물을 자유자재로 건너뛰면서 주변에 가득한 가고일들을 파리 잡듯 때려잡는 모습은 압도적인 강함이란 무엇인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다 온몸에 강력한 베리어를 두른 이산이 마나전이를 사용하고 있어서 이하이의 마나력은 끊임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한수호는 곧바로 세 뿔 가고일의 위치를 확인했다.

놈은 조금 떨어진 하늘 위를 맴돌고 있었는데, 개조를 이용해 놈의 정보를 살펴보니 세 뿔의 쿨타임 때문에 시간을 버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한수호와 서은채의 출현을 눈치챈 세 뿔 가고일이 괴성을 내질렀고, 수백의 가고일들이 방향을 바꿔 날아들기 시작했다.

“떼거지로 덤비는 놈들은 최소한의 마나로 상대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한수호는 서은채에게 그렇게 말한 뒤, 날아드는 가고일들을 향해 파랑격을 펼쳐냈다.

촤라라라라락

세라믹 단검에서 뿜어진 파도와 같은 기운이 단숨에 일곱 마리 가고일의 몸통을 갈라버렸다.

“어차피 전, 하늘을 나는 놈들을 상대로는 도망밖에 못 친다고요!”

서은채는 말만 그럴 뿐, 가속을 이용해 가고일에게 달려들며 검으로 하나씩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이하이와 상당히 비슷했다.

건물과 건물을 비조처럼 뛰어다니고, 때로는 가고일을 디딤돌처럼 디뎌 더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사이 더 발전했구나.’

몇 개월 전에 인천에서 봤던 서은채가 아니었다.

지금은 자신의 마나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펼쳐낼 줄도 안다.

지금보다 마나력이 더 상승하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특성을 강제로 각성하게 된다면 더욱 강력한 마공사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은채의 활약에 일단 안심한 한수호는 저 높은 곳에서 수천의 가고일에게 명령만 내리고 있는 세 뿔 가고일을 어떻게 아래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를 잠시 고민했다.

이하이도 어떡하든 세 뿔 가고일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가 버리니 별수가 없어 보였다.

지금의 이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진건 한수호도, 이하이도 근접전투형 마공사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기에 마나력을 실어서 쏘아 보내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그 경우 소모되는 마나력이 장난이 아닌 데다가, 하늘을 나는 몬스터는 쉽게 피해버릴 수 있기 때문에 큰 위협을 줄 수 없었다.

한수호는 결국 라뮬을 떠올렸다.

라뮬을 창으로 변하게 해서 세 뿔 가고일을 향해 섬전처럼 쏘아버린다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저 얄미운 작자한테는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이지.’

이산이 신경 쓰였다.

그가 했던 말을 보면, 그 또한 자신처럼 회귀한 것이 거의 확실했다.

이산이 아스루나의 영웅인, 루나의 델링그를 알고 있다면 라그나로크 또한 알고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지금은 세 개의 검 모두가 착용구에 끼워진 상태라 못 알아보는 걸지도 모른다.

‘용마검은 더더욱 안되고.’

7대 마화기의 하나인 용마검을 꺼내 용형4식을 펼치는 건 더욱 피해야 할 일이다.

그걸 이산이 보게 되면 한수호가 발자크의 하수인이라며 죽이려 들 수도 있었다.

분배하지 않은 NP 포인트도 176이나 되지만, 그 포인트를 분배해봐야 딱히 다른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었기에 그 또한 보류했다.

‘저놈을 해치울 좋은 방법이…. 아!’

한수호는 강력한 원거리 공격용 무기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아, 씨. 이런 병신을 봤나.’

한수호는 어깨에 메고 있던 델링그를 풀어 손에 쥐었다.

델링그는 저격총이다.

당연히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고, 이걸 제대로 쓰면 라그나로크 버금가는 강력한 파괴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당장 써보자.’

한수호는 회귀 전, 수많은 총기류를 다뤄봤었기에 저격총을 다루는 것쯤은 어려울 게 없었다.

어깨에 견착시키고 스코프로 세 뿔 가고일을 정확히 겨눴다.

델링그에는 풍향, 풍속, 목표까지의 거리 등을 자동으로 계산해 주는 장치가 되어 있어서 조준만 제대로 하면 쉽게 발사가 가능했다.

한수호는 빠르게 조준을 마쳤고, 델링그에 마나력을 흘려 넣으며 방아쇠를 힘차게 당겼다. 그런데,

끼릭

방아쇠가 헛돈다.

델링그의 총구에선 아무것도 발사되지 않았다.

‘뭐지?’

한수호는 뭐가 잘못된 건지 확인하려 델링그 이곳저곳을 살폈다.

하지만 별다를 게 없었다.

‘결국 그것 때문인가?’

한수호는 델링그의 정보를 다시 살폈고, 거기서 한 문구에 시선을 던졌다.

-태초의 거인, 타이탄의 힘으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태초의 거인, 타이탄의 힘.

한수호에겐 그 힘이 없으니 당연히 델링그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이하이한테는 그 힘이 있다는 건가?’

이산은 원래 델링그가 이하이의 무기였다고 했으니 그녀는 이걸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 델링그를 이하이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아직이에요?”

서은채가 억지로 짬을 내어 한수호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우우우우우웅

델링그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서은채에게 가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처럼 마구 들썩거린다.

‘설마…?’

한수호는 델링그와 서은채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총 왜 그래요? 꼭 저한테 달려들 것 같은데요? 부담스럽게시리.”

“이거 네가 써볼래?”

“제가요?”

한수호는 델링그가 주인을 알아보는 거라 생각했다.

델링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태초의 거인, 타이탄의 힘이 서은채에게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힘이 있다면 델링그를 사용해 세 뿔 가고일을 떨어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마나를 주입한 이후에야 주인을 알아보는 모양이구나.’

한수호는 왜 지금에 와서야 델링그가 서은채에게 반응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걸 어깨에 잘 견착시킨 다음에 마나력을 주입하고 스코프로 목표를 정확히 조준한 다음에 방아쇠를 가볍게 당기기만 하면 된다. 쉽지?”

“어…. 네?”

서은채로서는 한수호의 말을 바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총기류는 다뤄본 적도 없어서 어깨에 견착하는 방법조차 몰랐다.

“내가 도와주마.”

한수호는 서은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델링그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얼음불 특성을 일으켜 주변에 방어막을 형성시켰다.

가고일들이 그 벽에 가로막혀 접근을 못 하고 있을 때, 한수호는 서은채 뒤에 서서 그녀가 델링그로 세 뿔 가고일을 조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깨에 견착시키고, 스코프로 조준을 하게 한 뒤, 마나력을 주입하라고 지시했다.

지이이이잉

델링그가 한수호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 눈앞에 선택지가 나오는데요? 무음포, 마황포, 빔포? 이게 뭐죠?”

그걸 서은채만 볼 수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일단은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세 개 다 선택이 가능해?”

“아니요. 지금은 무음포만 선택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럼 그거 선택하고 조준경 십자 표시를 잘 봐. 십자 중앙에 목표가 잡히면 아마 녹색으로 변할 테니까 그때 방아쇠를 당겨.”

“네. 알았어요.”

한수호가 자신의 등 뒤에서 거의 껴안다시피 했지만, 서은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조준경 십자 표시가 녹색이 되면 방아쇠를 당기라는 거지?’

서은채의 눈은 조준경을 향했고, 중앙의 붉은 십자 표시를 세 뿔 가고일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처음이라 쉽지 않았지만 침착하게 한수호의 호흡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하자 드디어 십자 중앙에 세 뿔 가고일이 잡혔다.

삥

십자 표시가 녹색으로 변한 순간, 서은채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때,

“멈춰, 이 멍청이들아! 델링그를 함부로 쏘면 큰일 난단 말이다!”

이산이 두 사람을 목격하고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달칵

서은채는 이미 방아쇠를 당긴 뒤였다. 그 순간이었다.

우웅

델링그의 총구에서 반투명한 뭔가가 번쩍했다. 그리고,

퍼억

하늘 위를 크게 선회하고 있던 세 뿔 가고일의 몸통에 구멍이 뻥 뚫렸다.

크와아아아아악

세 뿔 가고일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한 방으로는 약했는지 놈은 피를 뿜어내면서 한수호와 서은채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은채…”

한수호가 서은채에게 재조준을 지시하려는 그때,

콰직

서은채의 오른팔이 엄청난 충격파에 휩싸이며 박살이 나고 말았다.

강력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 팔이었지만 델링그를 발사하면서 생긴 강력한 반동에 그만 산산조각이 났다.

“파, 팔이….”

서은채도 놀랐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래서는 재조준은 물론이요, 방아쇠조차 당길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세 뿔 가고일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끼아아아아아악

놈이 괴성을 내지른 순간, 세 개의 뿔 중 붉은색 뿔에서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쩍 벌린 세 뿔 가고일의 입에서 드래곤의 브레스를 능가하는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본 한수호는 서은채를 몸 뒤로 돌려세운 뒤, 작게 외쳤다.

“흑기사.”

투캉!

혼마흑갑의 소환이었다.

빈 허공에서 등장한 혼마흑갑이 순식간에 한수호의 온몸에 들러붙었고, 완벽한 풀 플레이트 차림의 기사가 된 한수호는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시키며 얼음불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쩌저저저저정

한수호의 전면이 새하얀 얼음으로 완벽하게 차단됐다.

세 뿔 가고일이 뿜어낸 화염은 얼음과 부딪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얼음은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고, 끝내 모든 얼음을 녹이고 한수호의 두 팔에 직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