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푸화아아아아악
화염이 한수호의 몸통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수호의 두 발은 땅바닥에 굳건하게 박혀 있었고, 엄청난 화염에도 끄떡없이 그 자리를 끝내 지켜냈다.
콰과과과과과과각
한수호의 뒤쪽은 화염에 휩쓸려 완전 초토화 상태였다.
오직 한수호와 서은채가 있는 장소만이 멀쩡할 뿐, 그 주변은 화염에 녹아 이글이글 들끓고 있었다.
슈아아아악
브레스를 뿜어낸 세 뿔 가고일이 쿨타임 때문인지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놈의 구멍 난 몸통에서 흘러나온 핏물은 주변의 불길에 닿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 총을 당장 넘겨! 타이탄의 힘이 없으면, 델링그의 반동을 버텨낼 수가 없다고!”
이산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수호는 델링그를 이산에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서은채가 한 번 사용했다면, 두 번도, 세 번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서은채! 팔은 어때?”
검은색 갑주로 온몸을 뒤덮은 한수호가 묻자 서은채는 고개를 저었다.
“고통은 별거 아닌데, 팔이 이래서는 이걸 쓸 수 없어요.”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저 괴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겠어?”
다시 기회를 주겠다는 말로 들은 서은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팔만…. 이 팔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요!”
어깨 아래로 사라져버린 팔을 바라보는 서은채의 눈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를 본 한수호는 고민하던 마음을 접고, 결심을 굳혔다.
“이걸 받아라.”
한수호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코스트 21의 아티팩트, 암즈를 꺼내들었다.
“이건….?”
“암즈라고 한다. 이거면 한 번 더 총을 쏠 수 있을 거다.”
서은채는 너무도 정교한 형태의 인공 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서은채가 암즈를 팔에 가져다 댄 순간,
차르르르르륵
암즈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서은채의 어깨에 달라붙어 한 몸이 되었다.
마치 원래부터 서은채의 팔이었던 것처럼, 위화감이 하나도 없이 완전한 팔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암즈.
서은채는 새로 생긴 완벽한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팔…. 조금도 낯설지가 않아요!”
다행이었다.
암즈도 서은채를 주인으로 인정해 주었다.
“좋아. 그럼 한 번 더 해보자!”
“네!”
서은채는 다시 앞으로 나섰고, 델링그를 어깨에 단단히 견착시켰다.
그리고 허공에서 선회하고 있는 세 뿔 가고일을 조준했다.
그때, 세 뿔 가고일은 다른 가고일들에게 명령을 내려 서은채 쪽으로 육탄돌격을 하게 만들었다.
놈은 그 즉시 푸른색 뿔에 모든 마나력을 집중시켰다.
콰지지지지직
뿔에서 뿜어지는 뇌전이 점점 강력해지던 그 순간,
달칵
조준을 마친 서은채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이번엔 좀 전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꽈앙!
총구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지더니 황금빛의 커다란 구체가 번쩍하며 뿜어졌다.
직경 2미터나 되는 황금빛 구체.
그건 자살 특공대라도 되듯 무지성으로 달려드는 가고일들을 그대로 뚫고 날아갔다.
퍼버버버버벅
구체에 닿는 가고일들이 죄다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콰우우우우우
수많은 가고일들로 새까맣게 보이는 하늘을 향해 황금빛 구체가 구멍을 뚫듯 날아가는 광경은 놀랄 만큼 멋진 장관이었다.
최소 300미터 이상의 높이에 있던 세 뿔 가고일도 위험을 직감했는지 그 구체를 향해 한껏 끌어모은 전격을 쏘아냈다.
콰지지지지지직
뿔에서 뿜어진 전격이 오직 구체 하나를 향해서만 뿜어졌고, 그사이에 끼어 있는 가고일들은 양쪽에서 짓누르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일제히 터져버렸다.
황금빛 구체와 새파란 전격의 충돌.
충돌 지점을 중심으로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꽈아아아아아앙
너무도 강한 빛에 눈을 가려야 했던 한수호는, 빛이 사라지자마자 세 뿔 가고일을 확인했다.
놈은 아직도 전격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전격의 힘은 황금빛 구체를 밀어내지 못했다.
빠르게 날아오른 구체는 단숨에 세 뿔 가고일을 덮쳤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귀청을 찢는 비명.
그리고 또다시 눈을 강하게 자극하는 강렬한 빛의 폭발.
버언쩍-
구체는 세 뿔 가고일의 몸통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사라져 버렸다.
머리와 가슴 부위만 남은 세 뿔 가고일의 사체가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한수호와 서은채가 있는 곳 근처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 버렸다.
가슴 아래가 사라진 세 뿔 가고일은 더 이상 살아있을 수 없었다.
“은채야, 팔은?”
한수호는 바로 서은채의 팔부터 살폈다.
다행히 이번에는 델링그의 반동으로 팔이 조각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 팔…. 엄청 좋은데요?”
서은채가 방긋이 웃으며 오른손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그때,
피이이이잉
서은채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각성?’
예상대로 보스 격인 세 뿔 가고일을 해치우자 서은채는 한 번 더 각성에 성공했다.
한수호는 각성의 순간을 만끽하도록 서은채를 내버려 두고 세 뿔 가고일의 사체 쪽으로 다가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많던 가고일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세 뿔 가고일이 너무 강력해서가 아니다.
명망 높은 마공사, 이산이 대놓고 트롤짓을 해 버리니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마공전뇌 이산이라고? 흥! 개씹트롤 이산이다!’
한수호는 이하이와 함께 이쪽으로 달려오는 이산을 향해 속으로 욕하고는 세 뿔 가고일의 머리를 싹뚝 잘라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세 뿔 가고일의 뿔은 분명 값어치가 클 것이기에 챙기기로 한 것이다.
세 뿔 가고일의 머리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뒤 사체를 뒤적였다.
다행히 가슴 부위가 남아 있어서 심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걸 아공간 주머니에 담은 뒤, 자리를 뜨려 했는데 사체의 몸속에 뭔가 익숙해 보이는 이물질이 보였다.
‘뭐지?’
세 뿔 가고일의 위, 혹은 식도로 보이는 위치에 덩그러니 놓인 그건 반손가락 장갑이었다.
놈이 오래전에 잡아먹은 사람이 사용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아직 멀쩡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보통 물건이 아닌 듯했다.
한수호는 조심스레 그 장갑을 주워들었다.
[아공간 관통 장갑(왼손)]
-보유 포인트: 100,000LP
-아스루나의 대공학자 ‘지크로우’가 제작한 아티팩트이다.
-장갑을 착용하면 상당한 크기의 아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지크로우가 제작한 다수의 아티팩트가 담겨있다.
>>포인트를 흡수하여 아티팩트를 파기하겠습니까? YES/NO
굉장한 물건이었다.
대공학자 지크로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산처럼 아티팩트를 제작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인물이리라.
한수호는 바로 장갑을 왼손에 끼웠다.
착용과 동시에 한수호의 단전 부근에 동그란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생김새가 꼭 블랙홀을 닮았다.
한수호는 그 구체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처럼 시야 한쪽에 가로세로 8칸씩, 총 64칸의 네모 칸이 등장했다.
더불어 가장 하단엔 코스트 표시도 나타났다.
-코스트: 158/400
‘코스트가 400까지라고?’
엄청난 용량이었다.
한수호가 지금껏 잘 사용하고 있는 대용량 아공간 주머니도 총 16칸에 코스트는 최대 100이었다.
그런데 이 장갑은 그보다 4배나 커다란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이것만 있으면 다른 아공간 주머니들이 필요가 없어질 정도.
그뿐만이 아니다.
64개의 칸은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4개의 칸이 뭔가로 채워져 있었는데, 물건 4개가 코스트 158을 차지하고 있는 거로 봐서는 그것 또한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여기에 금괴가 또 있네?’
4개 칸 중 하나는 금괴 모양이었다.
한수호는 아공간에 담긴 물건들을 확인해 보려다가 이산과 이하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온 터라 나중으로 미뤘다.
“저 아이, 보통이 아니로군.”
이산이 차가운 얼굴로 서은채를 바라봤다.
“저 아이가 죽든, 살든 관심 없으셨던 것 같은데. 이제 관심이 생깁니까?”
“어린 녀석이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구나. 말에 가시가 돋쳤어.”
“그럼 예의 없는 전 이만 가보죠.”
한수호는 더 볼 것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때 이산이 한수호를 불렀다.
“장태산. 다시 한번 말하지. 타워 꼭대기에서 얻은 물건들과 지금 방금 얻은 것까지 모두 내놓거라. 그전에는 보내줄 수 없다.”
“아빠! 그만 하자니까요!”
이하이가 또다시 화를 냈지만 이산은 상관도 안 했다.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싶다면, 그냥 가도 좋다. 대신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 하시죠. 그 물건들 없다고 세상이 멸망한다면, 까짓거 멸망하라고 합시다. 제가 힘들여 얻는 것들을 그냥 내놓을 만큼 마음씨 좋은 놈이 아니라서요.”
이산이 협조적으로 나왔다면, 한수호도 모든 걸 독식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산의 태도는 한수호를 극단적으로 몰아갈 만큼 제멋대로였고, 억지스럽기만 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후회요?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재밌네요. 엉뚱한 사람 붙잡고 후회 타령 하지 말고, 열쇠인지 뭔지나 찾아서 세계가 멸망하지 않게 노력해 보시길. 전 이만.”
한수호는 더 이상 이산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도 회귀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이런 사람 비위를 맞춰가며 정보를 알아낼 필요는 없었다.
이프리트의 수장이 누구인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이산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장태산….”
등 뒤로 이하이의 작은 음성이 들렸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한수호는 각성을 완전히 마치고 밝게 웃고 있는 서은채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아, 아빠….”
갑자기 이하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이산을 부르더니,
털썩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하이야! 이하이!”
이산이 급히 이하이를 부축해 상태를 살폈다.
한수호도 멈춰서서는 이하이를 바라봤다.
좀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지금은 안색이 하얗게 되어 크게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피부 여기저기로 혈관들이 툭툭 불거져 나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개조 특성으로 이하이의 신체 수치를 스캔했다.
‘가슴 수치가 5까지 떨어졌어?’
178이나 되던 가슴 수치가 5까지 떨어져 있었다.
마력 수치는 그대로인데, 가슴 수치만 뚝 떨어져 있어 한수호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한수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하이가 했던 말들을 종합하고, 지금의 상황을 겹쳐보니 상황이 이해되었다.
‘이하윤의 특성으로도 이하이의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없었던 거구나.’
이하이는 자신을 살리려다가 이하윤의 얼굴이 망가졌다고 했고, 다시 만나게 되면 이하윤은 또다시 상처를 악화시킬 짓을 자처할 거라 했었다.
그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적어도 이하이에겐 악감정이 없었기에 돕고는 싶었지만, 이산으로 인해 그런 마음마저 접어야 했다.
한수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약탈 대상이 존재합니다. 상대의 상처를 약탈하여 관련 내성을 획득하겠습니까? YES/NO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한수호의 발길이 다시 멈췄다.
이번에도 약탈[1] 특성이 알아서 반응했다. 그 대상은 당연히 이하이였고.
‘내 약탈로 이하이의 병까지 가져올 수 있는 건가?’
동생인 이하윤에 이어, 이젠 이하이까지.
한수호는 약탈이라는 특성이 빼앗기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한수호는 당장은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기로 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이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이하이의 치료를 구실로 가장 확실하게 도움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기적이라도 할 수 없어.’
한수호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서은채가 이하이의 상태를 걱정했지만, 한수호는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며 그녀를 데리고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