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약탈로 모든 기억을 훔쳐볼까?’
한수호는 혹시나 싶어 약탈[2] 대상이 가능한지도 확인해 봤다.
그 결과 스승 부부 모두 약탈 대상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현재로서는 가장 믿고 따르는 스승 부부인데, 이 두 사람을 믿지 못해 약탈로 정보를 캐낸다는 건 왠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만은 참자.’
한수호는 약탈의 유혹을 끝내 이겨 냈다.
그리고 스승 부부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그대로 두되,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걸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스승 부부가 게이트에 들어가고, 거기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5급 게이트가 3급 게이트로 진화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다.
스승 부부가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게이트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스승 부부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진화가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게 한수호의 생각이었다.
“내일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야겠지. 조금만 더 집중하면 파랑벽력기를 완성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 기술만 완성되면 스승하고 함께 네 진짜 가족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생각이다. 그때까진 너도 조용히 학업에 열중해 줬으면 좋겠구나.”
주태란은 한수호가 가족을 찾겠다고 섣불리 움직일까 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네. 걱정 마세요. 전 제가 가진 능력이 얼만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우리 수호는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나나 스승한테 조금도 걱정을 끼치지 않았으니까. 믿으마, 아들.”
주태란은 한수호의 뺨에 두 손을 대고는 활짝 웃음을 그려 주었다.
“어이구야. 꿈에 나올까 두려운 얼굴을 그리 가까이 대고 있으니 수호가 자기 잡아먹는 줄 알고 바짝 쫄았잖아? 오크 부족장 같은 얼굴 좀 얼른 떼지 않고 뭐 해?”
“뭐라고? 이 양반이 비싼 밥 배불리 먹여놨더니 어디서 돼지 창자 꼬이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데? 오늘 아들 앞에서 한번 제대로 교육 좀 받고 싶어서 그래?”
“어흠. 난 이만 마음에 안정을 취하러 좀 들어가 봐야겠군.”
장한구는 도끼눈을 뜬 주태란을 피해 슬쩍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수호는 좀 더 스승 부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젠 돌아가 봐야 했다.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스승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더불어 돌아가서 해야 할 일도 있었다.
“먼저 돌아가 볼게요. 편히 쉬시고, 내일 볼일 끝나면 다시 연락 주세요. 주말엔 제가 두 분 좋은 데로 모실 테니까요.”
“오, 그래. 넌 얼른 기숙사에 돌아가 보거라. 내일은 시간상 힘들지도 모르니 편하게 모레 오전에 연락하마.”
주태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고, 방 안에 들어갔던 장한구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아들!”
“네. 그럼 저 가요!”
한수호는 베란다에서 난간을 짚고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4층이었지만 한수호에겐 전혀 위험하지 않은 높이였다.
가볍게 바닥에 내려선 한수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태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도심 속으로 사라져 갔다.
* * *
한수호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컨테이너 하우스로 향한 그는 가볍게 몸을 씻은 뒤, 지금까지 쌓인 포인트를 확인해 봤다.
-보유 포인트: 78.5NP / 24,250LP
‘광폭화 5단계 덕분에 NP 상승 속도가 엄청나구나.’
물론 가장 큰 비중은 매일 먹고 있는 소원의 열매가 차지하지만, 하루 미션으로 0.5밖에 얻지 못했던 포인트를 광폭화 덕분에 2.5씩 얻는 상황이라 그 차이도 매우 컸다.
‘이번 일 끝나면 또 LP 얻으러 던전 노가다 빡세게 해야겠네.’
광폭화를 5단계로 올리면서 획득한 이득이 엄청났기 때문에 다른 특성, 특히 개조나 얼음불, 돌파의 업그레이드가 무척이나 기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LP를 최소한 50만까지는 채워야 했다.
‘용의 박동으로 마나력 올리는 것도 쏠쏠하단 말이지.’
한수호는 이번엔 자신의 신체 수치를 점검했다.
머리 수치는 133이고 가슴을 제외한 다른 신체의 수치는 죄다 120으로 맞춰진 상태.
그중에서도 가슴 수치는 용의 박동을 수련함으로써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가슴] : 219(+48)
*[마나] : 1,981(+376)
마나력의 상승으로 이제 용형4식 중 시작식은 2회, 숙련식은 1회까지 사용할 여건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베테랑의 궁급 마공사를 적으로 마주치더라도 살아서 도망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잘하면 궁급 마공사를 나 혼자 찜 쪄 먹을 수도 있고 말이지.’
이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한수호는 이제 열아홉 살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나이에 이런 경지에 오른 마공사는 단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현재 사왕오패로 추앙받는 9명의 영웅도 그렇고, 그들의 추격을 지금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피해 다니는 사대광마도 한수호와 같은 나이엔 장한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만족해선 안 돼. 내 목표는 그들을 이기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한수호의 목표는 악몽급 게이트를 막아내어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해 내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다시 만날 가족들과 행복한 미래를 계속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4년 정도 남았나?’
세계 곳곳에 7개의 재앙급 게이트가 열리는 건 4년 뒤.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수호가 알기로 게이트 폭주 전에도 그에 준하는 사건들은 꾸준하게 일어나고, 그로 인한 인명 피해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두세 달에 한 번씩 꾸준히 발생하는 자살 폭탄 테러도 그렇고, 이번 대법원 게이트처럼 갑자기 게이트가 진화하는 일도 계속 생긴다.
거기에 황도13궁이 특무부, 정의국, 대한맹과 지속적으로 부딪치게 되면서 마공사들이 희생하는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새한교까지 움직이게 될 테니 4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야.’
한수호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여서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나는 숨기고, 적을 양지로 끌어내야 해.’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지평학 교수와 힘을 합치기로 한 건 회심의 한 수라고 볼 수 있었다.
‘너무 서둘러봐야 오히려 악수를 둘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럴수록 침착하게 움직여야 했다.
한수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0:07]
‘잠들기 전에 월이나 좀 만나고 올까?’
고니가 월하고 잘 지내는지도 확인할 겸, 한수호는 전투 영역을 펼쳤다.
* * *
“크아아아앙!”
새하얀 털을 가진 사자의 모습을 한 고니가 월을 물어뜯으려고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월의 움직임은 기가 막히게 빨랐다.
고니의 입을 피해 아래로 파고든 뒤, 두꺼운 사자의 목을 붙잡아 빙글 돌며 등 위로 올라탔다. 하지만, 고니가 껑충 뛰어오르며 몸을 털어대자 월은 튕겨 나가고 말았다.
고니는 등 뒤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월을 무섭게 노려보며 끊임없이 괴성을 내질렀다.
전투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이 장면을 보게 된 한수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 월! 너 지금 뭐 하냐? 왜 고니를 괴롭히는데?”
월에게 소리치자 한수호 앞으로 다가온 월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으로 말했다.
[월은 고니 등에 타고 하늘을 한번 날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뭐?”
월의 말에 한수호는 고니를 불러들였다.
허공을 선회하던 고니는 한수호의 손짓에 바닥으로 내려왔다.
한수호 바로 옆에 착지한 고니가 월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고니의 목덜미를 살살 긁어주던 한수호.
고니는 지금 중형화[1]의 형태로 모습을 변한 상태였는데, 크기는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사자보다 조금 더 컸다.
오늘 아침에 고니의 자가수복이 어느 정도 끝난 덕에 중형화로 변신이 가능해져서 확인했는데, 전혀 생각도 못 한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이라 꽤나 놀랐었다.
하지만 곧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자가 된 고니의 등에 올라타 전투 영역 내를 마음껏 날아다니며 잠시 비행을 즐겼었다.
아무래도 월은 그 모습이 부러웠던 모양.
“고니야. 월은 태워주기 싫은 거냐?”
“크르릉.”
고니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월을 노려본다.
“월. 고니가 싫어하니까 비행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
[알았다. 치사해서 안 타겠다. 차라리 살이나 범이를 비행이 가능하도록 개조하겠다.]
월은 고니에게 삐졌는지 눈에 ‘凸’ 표시를 두 개 띄워 보이고는 공사장 쪽으로 가버렸다.
한수호는 월의 눈에 나타난 표시가 꼭 손가락 욕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월이 고니한테 외국식 손가락 욕을 날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는 고니를 바라봤다.
“월도 동료니까 나중에 한 번 정도는 태워줘. 알았지?”
“크르. 크르르.”
고니도 마지 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고니야. 첫 번째 중형화는 지금 이 모습이고, 두 번째 중형화 버전은 뭐야?”
“크륵?”
고개를 돌려 한수호를 바라보는 모습이 꼭, ‘한번 볼래?’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보여줘 봐.”
“크르르르.”
고니가 사람 머리통만 한 앞발로 한수호를 옆으로 밀더니 날개를 접고, 몸을 낮게 낮췄다. 순간,
촤르르륵. 철컥. 차카가각.
사자가 사라지더니 검은 광채를 뿜어내는 새까만 자동차로 모습이 변했다.
그런데 차의 형태가 꽤나 묵직하고 바퀴도 크고 두꺼워 밀리터리적인 느낌까지 확 나는 게, 마치 박쥐를 닮은 히어로가 주인공인 영화에 나오는 전투 차량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소형차 크기로 좀 작긴 했지만, 큰 덩치의 사내 둘이 타기엔 충분해 보였다.
지이잉
조정석 쪽 문이 날개처럼 위로 열렸다.
한수호는 홀린 듯 차에 올라탔다.
내부는 엄청 복잡해 보였다.
계기판도 많고, 이런저런 버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수십 개나 된다.
한수호가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할 때, 수많은 버튼 중 하나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그 버튼을 무심코 눌렀다.
휘이이잉. 철커덕.
묵직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차량 후미의 좌우로 기다란 포신이 튀어나왔다.
더불어 조정석 앞 유리창에 차량의 설계도면이 반투명한 모습으로 등장했고, 설계도 상단엔 ‘Armored Vehicle Mode’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장갑차 모드라고?’
설계도상에서도 차량 후미의 좌우로 포신 두 개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부분만 붉게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깜빡이는 설계도면에는 ‘Railgun’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레일건도 있어?”
한수호가 놀라며 중얼거리자 이번엔 또 다른 버튼이 반짝거렸다.
그 버튼을 누르자 차량 위쪽으로 어른 몸통만 한 굵기의 대형 포탑이 등장했다.
전면 유리창 설계도상에서는 ‘Photon Cannon’으로 표시되었다.
“하…. 이번엔 광양자포야?”
고니의 두 번째 중형화 형태는 엄청난 화력을 갖춘 자동차였다.
한수호는 고니의 변신 모습을 떠올리며 [1]과 [2]의 차이가 무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일반 모드고, 두 번째가 전투 모드로구나.’
일반 모드라고 해서 전투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사막여우 상태의 고니도 그렇고, 날개달린 사자의 고니도 마찬가지.
둘 모두 어느 정도 전투력을 가지고는 있다.
다만, 각 단계의 두 번째 모습인 전투 모드가 되면 훨씬 더 강력한 화력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니야. 중형화 전투 모드가 차량이면, 대형화 전투 모드는 뭐야?”
한수호는 고니에게 물었고, 질문이 나오자마자 전면 유리창에 타이머가 떠올랐다.
Cooldown [01:53:38]
‘쿨다운? 아, 이게 쿨타임인가 보구나?’
고니는 쿨타임이 1시간 53분이나 남아 있어서 대형화 전투 모드로 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대신 고니는 다른 방법으로 한수호의 질문에 답을 주었다.
앞 유리창에 쿨다운 시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로 뭔가의 설계도면이 등장했다.
그건 커다란 배였다.
설계도 상단에는 ‘Carrier Mode’라고 쓰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평범한 배가 아니다.
선체에 총 8개의 터빈이 달려있어 바다가 아니라 공중에 띄우는 비행선에 가까웠다.
설계도면 상에서 전장의 길이는 무려 40미터에 달했고, 배의 곳곳에는 수많은 포신이 달려있었다. 심지어는 아래로도 포격할 수 있도록 배 하단에도 대형 포신이 숨겨져 있었다.
‘무슨 우주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이었나?’
한수호는 대현자 아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엄청난 존재를 만들어 냈는지가 궁금해졌다.
고니 하나만 있어도 웬만한 게이트 하나쯤은 손쉽게 패쇄하고도 남을 듯했다. 그러다 한가지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애초부터 고니를 이용해 게이트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게 목적이었나?’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원래는 게이트 파괴를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대마법사 엘로이의 배신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면서 후대를 위한 시련의 하나로 대체한 걸지도 모른다.
‘그럼 난 게이트 파괴 전용 무기를 손에 넣은 거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고니에게 세 뿔 가고일의 뿔까지 먹여놨으니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셈.
한수호는 고니의 마나 코어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로 했다.
“고니. 마나 코어 좀 볼 수 있을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전대 측면이 열리더니 코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걸 손으로 집어 들자 마나 코어의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다.
[드레고니안의 생명 코어(S)]
-코스트: 86
-보유 마나량: 912/2000
-드레고니안의 심장 역할을 하는 코어입니다.
-코어를 흡수할 때마다 진화합니다.
정보를 살핀 한수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도봉구의 던전 내 유적지에서 처음 코어를 손에 쥐었을 때 봤던 정보와 너무도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