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그래서 날 찾아왔다?”
한수호는 팔짱을 끼고 뚱한 표정으로 이하이를 응시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하이는 한수호에게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위험을 알려주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산이 보낸 염탐꾼일 수도 있기에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믿지 않아도 좋아. 난 분명 경고했으니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 거야.”
“언니. 지금 그 말 사실이야? 아빠가 태산 오빠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니? 그것도 고작 던전 보상 때문에?”
이하윤은 이하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이산이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늘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기에 누구를 해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윤아. 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 아빠가 되찾고자 하는 건 단순한 보상이 아니야. 그게 없으면 지구가… 아니, 많은 사람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하이는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살짝 바꿔 말했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자신과 아버지가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치고 있다는 건 말해줄 수 없었으니까.
“그 말이 더 이상해. 그런 중요한 물건을 태산 오빠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꼭 아빠가 그걸 가져야 하는 거야?”
“그건….”
이하이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모든 사정을 솔직히 밝힐 수도 없는 상황.
이하윤이 표정을 굳히며 좀 더 따져 물으려고 할 때, 한수호가 끼어들었다.
“이하이. 한 가지 묻지.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이러는 걸 원치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려는 거지?”
“그야, 난 이프리트와 다르니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나도 그들과 다를 게 없잖아.”
“그럼 차라리 당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프리트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함께 힘을 모아 그들을 저지한다면 좀 더 쉽게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 같은데?”
한수호는 이하이를 통해서 이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생각을 바꿔, 알고 있는 모든 걸 한수호와 공유해 준다면 어둠 속에 꼭꼭 숨어있는 이프리트를 양지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한수호 혼자만의 것이었다.
“열쇠가 아닌 사람들이 진실에 너무 가까워지면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높아. 아버진 이미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며 걱정하고 계셔. 이 이상 미래가 달라진다면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이 아무 소용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하…. 당신은 좀 다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이산이나 당신이나 스스로 세운 정의라는 울타리에 갇혀서 나오질 못하고 있어.”
“장태산. 넌 우리가 울타리를 부수길 바라는 거야? 그것마저 부순다면 포식자가 더욱 무섭게 날뛸 뿐인데?”
“그야 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거 아닌가?”
한수호와 이하이의 의견 대립은 팽팽했다.
반면, 이하윤은 지금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프리트? 열쇠? 포식자?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이하윤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수호가 너무 낯설었다.
자신과 같은 아카데미 1학년생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문뜩 서은채를 바라봤다.
자신보다도 두 살이나 어린 여학생.
그런데 그 여학생은 두 사람의 대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건지 크게 놀라지도 않고 편안한 얼굴로 음료수만 홀짝거리고 있다.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갑자기 밀어닥치는 소외감.
이하윤의 표정은 크게 낙담한 사람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이 측은했던 걸까?
음료수를 쪽쪽 빨아 먹고 있던 서은채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요! 저 언니 피곤한 거 같은데 먼저 쉬면 안 될까요? 이왕이면 저도 같이. 헤헤.”
“여기서? 괜한 소리 마라. 어차피 할 이야기도 다 끝난 거 같으니, 이만들 일어나지?”
한수호는 평소와 다르게 사람들을 냉정하게 내치려 했다.
“아무래도 불청객은 나 하나인 것 같으니까, 나만 빠져주면 되는 거 아니야?”
이하이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이하윤이 언니를 바라봤다.
“사실 난, 오빠랑 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런 복잡한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고.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게.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사람 목숨 살리겠다는 훌륭한 대의명분이 있다고 해도 태산 오빠나 내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하면 그냥 있지 않을 거야. 그러니 분명하게 전해. 내가 아빠와 언니를 적대하는 일 없도록 부디 올바른 판단을 해 달라고.”
이하윤의 당돌한 말에 이하이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6년 전, 이하이가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하윤은 마음 약한 아이에 불과했었다.
마음도 여리고, 아버지의 뜻도 함부로 거스르지 않는 착하디착한 아이.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무엇이 이하윤을 달라지게 만들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장태산이라는 이름의 열아홉 살 남학생.
그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하윤의 감정이 격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그런 거였니, 하윤아?’
이하이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이하윤을 잠시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방금 네가 한 말은 꼭 전할게.”
“그리고 한 가지 더. 태산 오빠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아빠가 날 버리고 떠난 것도 이해해 줄 수 있다고 말해줘. 내 가슴에 못을 박는 건 부디 한 번으로 끝내 달라고….”
이하윤은 입술까지 질끈 깨물었다.
툭 치면 바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분위기에 서은채가 한수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빠. 여자친구가 저렇게 슬퍼하는데 위로도 안 해줘요?”
“뭐? 그건 또 뭔 소리야? 여자친구라니?”
“그럼 아니에요? 저 언니, 오빠 집 열쇠도 가지고 있던데?”
서은채는 이하윤이 탁자 위에 올려 둔 열쇠가 한수호의 집 열쇠라는 걸 금방 알아봤다. 그래서 이하윤이 당연히 한수호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의 말에 이하윤이 살짝 당황하더니 감정을 추스르며 집 열쇠를 한수호에게 내밀었다.
“오빠, 이거. 안 그래도 이거도 전해 줄 겸 해서 찾아온 건데…. 괜히 못 볼꼴만 보여준 것 같아서 미안해.”
“별게 다 미안하네. 그런 말은 됐다.”
한수호가 열쇠를 챙기자 이하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가 아빠한테 꼭 말을 전해 줄 거라고 믿을게. 그리고, 은채라고 했지?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시간 나면 또 놀러와. 그땐, 언니가 한턱낼 테니까.”
“어, 아…. 네. 고맙습니다. 방금 전에 제가 말실수한 거 같은데,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좀 없는 편이어서.”
“실수한 거 없어. 암튼, 다음에 또 보자. 오빠. 나 먼저 갈게.”
이하윤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하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하이의 표정은 굉장히 착잡했다.
한때 두 자매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할 만큼 가까웠고, 언제나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챙겼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젠, 그때와 달랐다.
6년의 시간은 둘 사이를 너무나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이하이는 이하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를 푸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하이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아….”
“그렇게 한숨만 내쉴 거면,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해결을 보던가.”
한수호는 고개를 덤덤한 표정으로 조언하듯 한마디 던졌다.
“이건 우리 가족의 문제야.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그러면서 가족 문제를 남의 집에서 잘만 들먹이네?”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거야.”
이하이는 서은채를 힐끔 바라보고는 눈인사를 한 뒤 밖으로 사라져 갔다.
“휴. 이제야 좀 편안하네. 이제 한 녀석 남았군.”
한수호가 씨익 웃으며 시선을 돌리자 서은채가 흠칫 놀랐다.
“저기…. 오늘 하루만 더 신세 지면 안 될까요?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안 돼. 늦었으니까 더 빨리 가야지.”
“이 밤에 어디 가서 자라고요! 내일 친구들 만날 돈밖에 없단 말이에요.”
“자, 여기.”
한수호는 서은채에게 5만 원권 네 장을 건네주었다.
“와, 돈이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지낼 생각이라서 널 재우는 건 불가.”
“아, 집도 넓은데 뭐 어때서 그래요? 소파에서 자면 되잖아요!”
“누가?”
“당연히! 오빠죠. 헤헤.”
한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은채를 집 밖으로 내몰았다.
“얼른 가라. 다 큰 여자애가 아무 집에서 막 자고 그러는 거 아니다.”
“에이. 여기가 뭐 아무 집인가?”
“네 삼촌 집도 서울이라며? 내가 준 돈으로 택시 타면 30분 안에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외숙모 둘째 임신해서 이 시간에 가면 실례라고요, 실례!”
“나한텐 실례 아니고?”
“잠 좀 재워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오늘 우리 아빠도 만났으니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대충 씻고 잠만 잘 테니까 내보내지 마요.”
서은채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버티니 매몰차게 내쫓기가 좀 미안했다.
안 그래도 서은채 덕분에 오늘 서한광을 만나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스승부부의 안전을 챙길 수 있었으니 신세를 지긴 했다.
‘아우. 내가 앓느니 죽지.’
한수호는 제발 내쫓지 말아 달라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서은채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아, 그럼요! 다음부턴 미리 연락하고 올게요. 아니면 숙박료를 드리던가. 헤헤헤.”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 아, 됐고. 내일 문단속 잘하고 가라.”
한수호는 서은채를 다시 잡아당기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 오빤 여기서 안 자요?”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자냐! 난 기숙사로 갈 테니까 얼른 자라. 그리고…. 네 아버지 일은 고마웠다.”
한수호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컨테이너 하우스에 혼자 남게 된 서은채.
그녀는 혼자 피식 웃다가 주먹을 꽉 쥐며 작게 환호성을 터트렸다.
“예스!”
서은채는 이하윤이 한수호의 여자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기뻐하고 있었다.
* * *
기숙사로 돌아온 한수호.
세 명의 불청객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한수호는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느새 시간은 9시가 넘었다.
‘이러다 특별 미션 놓치겠다.’
한수호는 서둘러 전투영역을 전개해 구체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투영역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월은 안전모를 쓰고 살이와 범이를 데리고 열심히 공사 중이었다.
집과 수련실 공사는 거의 마무리가 단계였다.
“월! 나 왔다.”
한수호가 월을 부르자, 월이 바람처럼 몸을 날려 한수호 앞으로 다가왔다.
거의 200미터가 넘는 거리였는데 1초도 안 걸린 것 같다.
‘마나력이 947? 이 녀석, 그사이 꽤 올랐는데?’
마나를 정제해 낼 수 있는 몬스터 심장을 준 적도 없는데, 알아서 최대 마나력을 높이고 있으니 참 신기하다.
[주인. 진입 차단실의 설계도다.]
월이 한수호에게 설계도면을 건넸다.
대충 훑어보니 크기도, 차단벽의 두께나 강도가 모두 마음에 든다.
“반경 100미터 크기면, 우리 집에서도 100미터 정도 떨어지게 되니까 괜찮은데?”
[펀치력 테스트기에 사용된 금속보다 강도가 두 배 이상 높을 거다.]
“지구에 그런 금속이 있어?”
[월만의 극비 기술이다.]
확실히 월은 대단했다.
이젠 스스로 새로운 합금 조합을 찾아내 만들어 내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왕이면 자체 방어 시스템도 확실하게 만들어 줘.”
[그래서 필요한 재료 목록이 크게 늘었다. 최대한 빨리 구매해 주기 바란다.]
“오케이. 그런데, 월. 저번에 준 코어는 어때?”
살이와 범이에게 줄 B급 코어의 상태를 묻자 월의 눈에 어이없다는 눈 표시가 그려졌다.
[=_=; 주인. 치매인가? 어제도 확인하더니 오늘 또 확인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거 일단 다시 줘봐.”
[어제도 8개 가져갔다.]
“이번엔 어제랑 달라. 고니 주려는 거 아니야.”
[알았다.]
월은 주기 싫은 티를 잔뜩 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B급 코어 두 개를 넘겨줬다.
“믿으라니까 그러네.”
[믿겠다!!!]
느낌표를 세 개나 표시한 월은 다시 작업 현장으로 멀어져 갔다.
‘일단 수련실로 가볼까?’
지금 한수호가 서 있는 곳은 휑하니 아무것도 없이 그저 하얗기만 한 장소였다.
여기에 주저앉아 뭔가를 하기엔 좀 기분이 그랬다.
수련실로 자리를 옮긴 한수호는 아공간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가장 먼저 고니를 꺼내고, 대법원 게이트에서 확보한 207개의 몬스터 심장을 꺼내놨다.
대형 몬스터의 심장 4개에, 중형 심장 143개, 소형 심장이 60개였다.
그리고 주사기처럼 생긴 마나 추출기를 꺼냈다.
‘큰 놈부터.’
한수호는 가장 큰 심장에 추출기를 꽂은 뒤 피스톤을 쭉 잡아당겼다.
주사기 안으로 푸른빛의 액체가 쭉 빨려들었고, 금세 실린더를 꽉 채웠다.
‘한 번에 200이라. 나쁘지 않네.’
푸른빛 액체가 채워진 눈금의 숫자는 200.
이 숫자가 바로 정제된 마나량이었다.
한수호는 추출기를 B급 코어에 꽂아 반대로 피스톤을 밀어 넣었다.
액체는 단숨에 코어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코어의 마나량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351까지 채워졌다.
‘월, 저 녀석…. 이틀 만에 151이나 채웠네. 암튼 난놈이라니까.’
한수호는 월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히죽 웃음을 그려 보이곤, 심장에서 계속 마나를 추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