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20여 분이 흘렀을 때, 셔터 건물 안에서 교대조가 나타났다.
그들은 산 위의 비밀 거점에서 내려온 자들이었다.
동료 사내와 간단히 인수인계를 마친 한수호는 셔터 건물 측면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건물 안은 정말 텅 비어 있었다.
셔터가 열리면 차가 들어올 수 있게 앞부분이 뻥 뚫려 있고, 그 뒤쪽에 10미터 넓이의 이차선 도로가 동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터널.
터널 입구 옆에는 꽤 가파른 경사도를 지닌 에스컬레이터가 자리했다.
“12시간이나 경계를 섰더니 피곤해 죽겠구만. 이봐, 신태윤. 난 올라가면 바로 잠부터 잘 건데, 넌 어쩔래? 늘 하던 대로 한잔 걸치냐?”
신태윤의 동료는 자연스럽게 에스컬레이터에 다가가 목에 건 신분증 카드를 체크기에 가져다 댔다.
삐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녹색불이 들어오더니 차단막이 열리고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연한 걸 묻냐? 여기 처박혀 있는 동안은 그게 내 유일한 낙이구만. 그런데, 너 말이야. 어제 들어온 손님들,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
한수호도 똑같이 체크기에 카드를 대었고, 차단막이 열리자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섰다.
“어제 그 사람들? 그걸 난들 어떻게 알겠어. 알다시피 위에서 하는 일을 우리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잖아.”
“뭐, 그렇긴 하지.”
두 사람이 탄 에스컬레이터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위를 향해 움직였다.
위이이이이잉
꼭대기에 가까워지자 한수호는 살짝 긴장해야 했다.
저 위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
그 기척들에는 진급 마공사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완전 호랑이 굴이네.’
한수호에게 약탈[2]가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여길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그곳엔 네 명의 양복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그들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한수호와 동료의 몸을 스캐너 장비로 한차례 훑었다.
“아직 손님이 떠나지 않았으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숙소에 가서 쉬어.”
사내 하나가 슬쩍 꺼낸 말을 통해 박혜리와 당채룡이 이곳에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진입했다.
안쪽은 상당히 넓었다.
마치 지하철 지하상가의 중심지에 들어선 느낌?
저 앞에는 크고 화려한 분수대가 보이고,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총 여덟 개나 되는 출입구가 분수대를 중심으로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한수호는 그 중 한 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난 숙소로 간다.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적당히 마셔라.”
동료가 먼저 손을 흔들며 옆쪽 출구로 휙 사라졌다.
‘저긴 궁도들 숙소고, 저긴 무기고, 저긴 훈련실이군.’
신태윤의 기억 덕분에 출입구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한수호의 눈에 다른 곳보다 훨씬 넓은 출입구 계단이 보였다.
‘저 계단이 위층으로 향하는 길이군.’
한수호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위쪽은 이 커다란 건물의 1층이었다.
로비가 있고, 곳곳에 검은 양복을 걸친 사내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사내들은 기본적으로 권총을 소지했으며, 간혹 기관단총이나 자동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기도 했다.
한수호는 매우 자연스럽게 로비를 지나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몇몇 사내들이 한수호를 힐끔 바라보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금방 관심을 껐다.
한수호가 나간 곳은 1층 베란다였다.
이 거점을 지키는 자들이 따로 흡연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둔 장소였는데, 지금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내가 담배를 피는 날이 다 오네.’
한수호는 회귀 전에도 비흡연자였다.
스물다섯 살 때, 몇 번 피워본 게 다였던 한수호로서는 그다지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심받지 않고 거점을 제대로 살피려면 이곳이 가장 적절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한수호.
신태윤의 몸이였기에 거부반응은 없었지만 심리적인 영향으로 인해 마른 기침이 튀어나왔다.
기침을 하고, 가래침을 뱉어낸 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마치 피곤함을 털어내듯 베란다 밖의 푸른 숲을 응시하며 담배를 피는 모습이었다.
‘지하 2층, 지상 4층. 고위급 인물들은 죄다 3층 이상에 머물고 있고. VIP실은 바로.’
“후우….”
한수호는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으며 뒤로 돌았고,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엔 4층의 한쪽 창문이 살짝 걸쳐져 있었다.
‘저곳.’
4층 VIP룸.
한수호가 있는 곳에서부터 그곳까지의 거리는 약 15미터.
감각을 확장시켜 한곳으로 집중하자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미세하게나마 들리기 시작했다.
몸은 신태윤의 것이였지만, 감각은 한수호 본인의 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결정하셔야 해요.
-내가 여기서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우리 당가가 그대로 따라줄지 의문이 드는 군.
앞선 목소리는 박혜리의 것이고, 뒤따른 음성은 당채룡의 것이었다.
중국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였지만 한수호는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회귀 전에 영어와 중국어를 배워두길 정말 잘했다니까.’
한수호는 여유롭게 담배를 피며, 4층 VIP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계속 집중했다.
-당 사부. 이건 천갈궁의 대공자가 제독당가에 드리는 최후의 협상 카드예요. 이걸 거절한다면, 제독당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될 거라고요.
-우리가 천갈궁과 손을 잡는다고 새한교의 압박을 피할 수 있을까?
-물론이죠. 새한교가 아시아를 총괄하는 만큼 세력만 따지면 황도13궁의 그 어디도 상대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천갈궁에는 강력한 마공사들이 잔뜩 있고, 훌륭한 아티팩트와 독특한 특성을 지닌 각성자도 상당해요. 이들이 당가를 지원한다면 새한교의 압박을 벗어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을 거고요.
-하긴…. 어제 만나 본 대공자만 해도 내 능력을 뛰어넘고 있었으니 천갈궁주는 그보다 훨씬 강하다는 얘기겠지.
-제가 알기로, 대공자의 능력은 그 이상이에요. 그가 자신의 특성을 제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당가의 문주는 물론이고 중국의 유수한 마공가문들 중 누구도 상대하지 못할걸요?
-혜리.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중국엔 한국보다 열 배나 많은 마공가문이 존재하지. 궁급을 넘어서 파급에 이르는 강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긴 하는가?
두 사람의 대화 중 이상한 단어가 나왔다.
‘파급? 궁급 다음에 파급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한수호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마공사의 등급은 총 여섯 단계.
기본급, 수련급, 평급, 특급, 진급, 궁급이 전부다.
그런데 갑자기 파급이라는 단계가 등장했다.
‘이건 나중에 따로 물어봐야겠네.’
한수호는 스승 부부에게 파급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알아요. 파급의 마공사만 따지면 미국을 제외하고는 중국이 가장 많겠죠.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엔 파급을 넘어선 존재가 있어요.
-흐음. 그건 또 그렇지. 멸급에 오른 마공사는 오직 미국과 한국에만 존재하니까.
점점 가관이다.
파급만 해도 놀랄 일인데, 이젠 파급 이상의 멸급이라는 단계도 있단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인물이기에 당채룡마저 한숨을 쉬게 만드는 걸까?
‘설마, 천갈궁 궁주?’
지금으로써는 천갈궁 궁주가 이들이 말한 멸급의 마공사로 가장 유력했다.
-그러니까요. 새한교에는 멸급에 오른 자가 없어요. 파급의 끝자락에 오르긴 했어도, 아직 멸급은 아니죠.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당 사부께서 가장 잘 아실 테고요.
-잘 알지.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그럼 이야긴 끝난 거 아닌가요? 멸급의 강자가 이끄는 조직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당가. 이 소문이 중국에 퍼지기만 해도 새한교는 당가를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그럼 우리 당가가 위치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게이트나 던전은 오롯이 우리 차지가 되는 것이고.
-호호호. 맞아요. 그게 당연한 수순인 거죠. 더불어…. 저도 더 이상은 다른 눈치 안 보고 당 사부님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는 거고요.
-그게 가장 마음에 드는군. 흐흐흐.
그 뒤부터는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이어져서 한수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패궁 박윤주의 동생이 이런 인물이었다니….’
어쩌면 박윤주도 황도13궁이나 새한교와 관계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제자인 이하윤조차 박윤주에게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고.
한수호는 거의 필터까지 빨아들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한 대 더 피워야 하나?’
좀 더 대화를 엿들으려면 억지로라도 한 대를 더 피워야 했다.
담배 한 개비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그때였다.
퍼어엉!
갑자기 건물 측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게 신호였는지,
와장창!
3층의 창문 하나가 박살 나더니 사람이 밖으로 날아올랐다.
한수호의 머리 위를 날아서 숲으로 떨어지는 사내.
그는 우비처럼 생긴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일부는 투명해 보였고, 일부는 고장이라도 났는지 지직거리며 실체를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투명화 쉴드?’
한수호는 망토를 알아봤다.
지난번 사기환을 만났을 때, 그의 연구팀이 개발하는 특무부의 비밀 장비 중 하나라며 설명했 했던 것과 너무나도 유사했다.
“침입자다! 침입자를 잡아!”
깨어진 창문으로 한 사내가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건물 곳곳에서 양복 사내들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한수호는 3층 창문으로 머리를 내민 사내를 응시했다.
‘오중현!’
그는 오중현이었다.
손에 권총을 닮은, 하지만 권총보다 총구가 넓고 훨씬 투박하게 생긴 무기를 들고 목표를 겨냥하고 있었다.
투명화 망토를 걸친 사내가 숲속에 착지하려는 그때,
쩌엉
오중현이 들고 있는 무기에서 빛이 번쩍했고, 일직선으로 붉은빛이 레이져처럼 뿜어져 나갔다.
빛은 망토 사내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퍼억
허공에 피를 한 움큼 흩뿌린 그는 제대로 된 착지를 하지 못했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놈은 혼자가 아니다! 잠진도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 모조리 찾아내 죽여!”
오중현의 외침에 더욱 많은 양복 사내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베란다에 있던 한수호는 기이한 감각에 흠칫했다.
뭔가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한수호는 재빨리 감각을 총동원해 마나 파동을 펼쳐냈다.
우웅
본래의 마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반경 5미터까지는 충분히 훑어볼 수 있었다.
‘저건?’
한수호와 4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투명하지만, 주변의 풍경과 살짝 어그러져 보이는 뭔가가 재빠르게 달려나가는 게 보였다.
‘또 투명화 망토야?’
오중현의 말처럼 아까 그 사내와 같은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자가 또 있었다.
투명한 그것은 베란다 난간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방향을 돌려 한수호를 향해 뭔가를 겨눴다.
‘날 쏜다고?’
퓻
생각과 동시에 투명한 곳에서 빛이 터졌다.
한수호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총알을 가볍게 피해냈다.
거리가 멀어지자 투명한 존재는 깨끗이 지워졌다.
신태윤의 마나력이 너무 약해서 반경 5미터 내에서만 감지 능력이 제대로 발동되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사기환이 말하길 투명화 망토는 아직 시험 단계에 있으며, 적어도 반년은 더 지나야 개발이 끝날 거라고 했다.
물론, 사기환이 본격적으로 개발 프로젝트에 끼어들게 되면 한 달 내로도 실용화가 가능했지만, 그는 봇 개발에 전념하고 있어 큰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했었다.
“잡아! 모두 흩어져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두 놈이 더 있다! 북쪽과 서쪽으로도 수색망을 넓혀!”
“도로부터 차단해!”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고,
투다다다다다
퍼버버벙!
꽈광!
총성과 폭음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속이 탔다.
‘좀 더 정보를 모을 수 있었는데….’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는 저 아래 셔터 건물 뒤쪽 숲에 쓰러져 있을 자신의 몸뚱이가 발견될 판이었다.
‘적의 적은 동료라고 했던가?’
한수호는 피식 웃고는 난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품에 있던 수류탄 세 개를 모두 깠다.
‘다음엔 그냥 두지 않는다.’
한수호는 수류탄 하나를 베란다 안쪽으로 던져 넣고, 두 개는 4층 VIP룸과 오중현이 서 있는 3층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난간을 박차고 붕 날아올랐다.
비록 자신의 몸은 아니지만, 신태윤이 지닌 마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은 덕에 점프한 높이가 7미터에 가까웠다.
공중에서 뒤로 몸을 돌린 한수호.
그의 시선이 창가에 선 오중현의 시선과 마주쳤다.
수류탄은 이미 그의 얼굴 앞까지 날아든 상태.
그때 오중현이 한수호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허공에 뜬 수류탄을 맨손으로 확 낚아챘다.
그 상태로 손을 콱 오므리자,
퍼석
수류탄이 폭발을 일으키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그 순간, 앞서 내던진 두 개의 수류탄이 폭발했다.
꽈아아앙
콰아앙!
1층 로비 쪽과 4층 VIP룸 쪽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주변이 흙먼지로 가득해졌다.
한수호는 그대로 하강하며 몸을 돌렸고, 순식간에 숲속 깊숙한 곳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착지와 동시에 비탈길을 빠른 속도로 뛰어 내려간 한수호.
그는 앞서 달려간 양복 사내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타앙. 타당!
“크윽! 뭐야? 어떤 새끼냐고!”
“저거 신태윤이잖아? 저 새끼가 왜 우릴 공격해?”
“배신한 거냐!”
신태윤의 동료들이 소리를 지르며 혼란에 빠졌다.
한수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방아쇠를 당기며 무서운 속도로 산 아래를 향해 달려갔다.
곧 셔터 건물이 보였다.
‘40미터, 30미터, 20미터….’
한수호는 자신의 육체가 엎어져 있는 나무까지 20미터 거리로 좁혀진 순간, 좌우를 향해 신태윤의 특성인 일격산개를 발동시켰다.
기력을 뿜어내듯 양팔을 쭉 뻗어내자 꽤 강력한 마나 파동이 뿜어져 나갔다.
꽈르릉
꽈과광!
총 네 번의 충격파.
숲의 나무들이 충격파에 휩쓸려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제 귀환하자.’
한수호는 신태윤의 몸을 버리고 본래의 육체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