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라라는 생전 처음 보게 될 던전 밖 세상의 모습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운명의 주인이 된 한수호가 자신의 손을 직접 잡고 게이트를 통과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에, 둘은 손을 꼭 쥐고 게이트를 건너야 했다.
라라는 궁금했다.
한수호가 살아온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까?
아스루나처럼 대부분이 숲과 산, 그리고 넓은 들판으로 된 세상일까?
그래서 라라는 잔뜩 긴장해서는 게이트를 통과하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주친 건 왠지 기분 나쁜 기운을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한수호도 그들의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라라의 손을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라라는 슬쩍 한수호의 옆으로 걸어가 표정을 살폈다.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낯선 세 사람을 살피는 한수호.
잔잔한 호수의 수면 같던 한수호의 눈동자에 미미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화가 난 것 같은데?’
라라는 한수호의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앞을 막아 서고 있는 세 사람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처음엔 불온한 기운이 느껴져서 마왕 발자크의 밑에서 수족 역할을 하던 마족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달랐다.
몬스터가 겉모습을 바꾼 것도 아니었고, 불결의 끝판왕이나 마찬가지인 언데드나 리치도 아니었다.
완전한 인간.
하지만 불온한 기운을 품은 기분 나쁜 인간들이었다.
‘설마, 강화 인간?’
몸에서 풍기고 있는 불온한 기운이 일정한 규칙도 없이 일렁이고 있는 걸로 봐서는, 세 사람 모두 강화 인간이 분명했다.
라라가 아직 어렸을 때, 그녀의 던전을 찾아온 인간이 하나 있었다.
그 인간은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겉보기엔 인간과 하등 다를 게 없었지만,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마나력을 지닌 데다가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는 상처에도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었다.
비록, 당시 라라를 후계자로 키워주던 이전 여왕의 손에 처참히 죽긴 했지만, 그로 인해 여왕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었다.
그건 강화 인간이 죽기 직전에 펼친 자폭기 때문이었다.
마치 최후의 발악을 하듯 펼쳐진 자폭기는 당시의 세이렌 여왕에게 깊은 상처를 입힐 정도로 강력했었다.
그래서 라라가 여왕의 위를 일정보다 빠르게 물려받아야 했고, 그로 인해 라라는 세이렌으로서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되었던 것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라라를 세이렌의 여왕이 되게 만들었던 강화 인간을 여기서 또다시 만나게 되다니.
라라는 자신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선대 여왕을 죽게 만든 강화 인간을 보게 되자 저절로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강화 인간은, 같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실험한 결과 탄생하게 된 키메라 같은 존재였다.
마나 회로를 분석하고 그걸 스스로 익혀가면서 마나력을 정상적으로 높여온 것이 아니라, 온몸에 마법진 같은 마나 회로를 강제로 새겨 넣어 한계 이상의 마나력을 얻은 변종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각성하지 않았음에도 여러 종류의 특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고,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는 놀라운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죽음을 앞두게 되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궁극의 자폭 기술까지 펼쳐내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감히 네놈들이 내 운명의 상대를 화나게 만들어?’
라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앞으로 나서며 한수호를 보호하듯 막아섰다.
이 돌발행동에 한수호가 ‘너, 뭐 하냐?’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사람들, 강화 인간인 것 같…아요.”
뜬금없이 흘러나온 말에 한수호가 갸웃했다.
“강화…인간?”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세상에 처음 나온 라라가 세 사람의 정체를 알아봤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컨테이너 입구의 세 사람은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한수호는 세 사람이 강화 인간이라는 말에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라라가 제대로 짚었나 본데?’
한수호는 라라에게 마나 전음을 흘려보냈다.
[강화 인간이 뭐야?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한수호가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전하자 흠칫 놀란 라라는 빠르게 침착성을 되찾고는 한수호와의 정신감응을 이용해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일을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한수호는 강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오피스룩의 여인이 다시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건가요?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함께 가시죠. 옆에 계신 어린 아가씨도 함께요.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요.”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갈 생각은 없습니다만.”
“어머, 이런!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전 유희진이예요. 메디컬 게이트 제약회사의 특수비서과 실장이고요.”
유희진의 말에 한수호가 살짝 감탄을 흘렸다.
“아…. 메디컬 게이트.”
조만간 접촉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메디컬 게이트의 사장은 회귀자로 의심되는 인물, 김명중이다.
즉, 저 앞에 있는 세 사람은 김명중의 지시를 받고 한수호를 데리고 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라는 말.
“재우 형. 우리 미행당했나 본데요?”
“그럴 리가…. 미행하는 낌새가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
정밀분석이라는 특성을 지닌 김재우였으니 틀린 말은 아닐 터.
“그럼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요?”
“흐음…. 아무래도 특무부에 연줄이 있는 모양이군.”
김재우는 이들이 자신을 미행한 것이 아니라, 특무부에서 정보를 캐내어 위치를 알아낸 거라고 확신했다.
김재우는 특무부 요원이었고, 어딜 가던 특무부 정보과로 위치 정보가 자동으로 전달되게끔 되어 있었으니까.
“특무부 정보망까지 뚫다니…. 메디컬 회사 끗발이 좋네요.”
“쩝…. 정보과 녀석들. 요즘 일을 제대로 안 한다 싶더니만.”
김재우는 일개 제약 회사에게 특무부의 보안이 뚫렸다는 사실에 낯이 뜨거워졌다.
“두 분 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저희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답니다. 그걸 꼭 특무부로 한정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군요.”
유희진이 한마디 하자, 김재우가 나섰다.
“애초에 태산이가 목적이었다고 말하지 그랬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린가요?”
“아깐, 던전에 볼일이 있으니 비켜달라고 생떼를 쓰더니, 태산이가 나오자마자 태도가 180도 바뀌는군요. 그런 분에게 내가 아끼는 동생이자 우리 특무부의 미래 재원인 태산이를 그냥 넘겨 드리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은 그냥 조용히 돌아들 가시죠.”
김재우는 한수호를 대신하여 분명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는 한수호가 저들과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이렇게 나설 수 있었다.
“친한 건 친한 거고. 당사자의 뜻을 직접 들어야….”
“안 갑니다. 재우 형이 한 말은 곧 제가 한 말과 같거든요. 더군다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건 더욱 마음에 안 들고요.”
결국 한수호가 직접 나서서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유희진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장님께선 잠시 얼굴만 보자는 뜻에서 학생을 부른 것이니 서로 일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게 어때?”
유희진의 말투도 달라졌다.
“따라가지 않으면 힘이라도 쓰겠다는 겁니까?”
“그거야 학생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나이 어린 여동생도 있는데, 험한 꼴 보이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유희진은 아예 막 나가기로 했는지, 비웃는 듯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메디컬 게이트의 김명중은 마공전뇌 이산과 한편이다.
이산에게 7개의 열쇠니, 어쩌니 하면서 인류의 멸망을 막는다는 핑계로 엉뚱한 일을 벌이는 공모자들.
그래서일까?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이산이나, 김명중이나 상당히 비슷하다.
자신들이 세운 계획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
상황으로 보아, 한수호가 델링그와 탑의 보상을 모두 획득한 것을 알고 이산처럼 그것들을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특무부의 김재우가 있는 데도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나오는데, 그마저 없었다면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가 눈에 선하다.
“당신이 말한 험한 꼴이 뭔지, 어디 한번 보여줘 보시죠.”
한수호도 더는 예의를 차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불온한 기운이 무엇인지는 라라의 설명을 통해 이미 파악을 완료했다.
저들이 얻은 강력한 힘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금기나 다름없는 사특한 방법으로 얻어낸 것이기에 마나력이 계속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에 직접 마나 회로를 새겨넣을 생각을 하다니…. 사람 목숨을 무슨 일회용 용기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건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김명중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일지 훤히 보인다.
“학생. 특무부 요원이 있다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나 본데…. 우리 사장님이 일개 지휘요원 정도는 얼마든지 입막음할 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뭐가 어쩌고 저째? 입막음?”
김재우가 화를 내며 나서려 하자 한수호가 그를 막아섰다.
“방금 한 말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한수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찬 기운이 흘러나왔고, 그로 인해 라라는 한수호의 손을 놓고 주춤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위험하겠어!’
라라는 안다.
운명의 상대인 한수호가 정말 마음먹고 전력을 펼친다면 저 앞에 있는 강화 인간쯤은 몇 초 만에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임을.
아무리 자폭기를 지닌 강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이상의 강력한 힘으로 찍어 누른다면 자폭기를 펼칠 새도 없이 소멸하고 말리라.
‘세상에 나온 첫날부터 피를 보고 싶지는 않다고!’
라라는 한수호 대신 나서서 저 앞의 재수 없는 여자를 때려눕히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먼저 손을 보면 굳이 한수호가 나서서 피를 보는 일이 없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
하지만, 라라도 아직은 한수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라라의 마음을 이미 짐작한 한수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는 움직일 수 없도록 꾹 눌러버렸다.
움직이지 말라는 강한 경고.
한수호는 그 상태에서 느릿느릿 유희진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수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얀 기체처럼 보이던 기운은 금세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고, 옷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펄럭이고 있었다.
너무도 위압적인 모습에 유희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좌우에 서 있던 큰 덩치의 사내 둘은 두 걸음 이상 뒷걸음질 쳤다.
“힘으로 우릴 뚫고 가는 건 쉽지 않을 거야, 학생.”
유희진이 온몸에 힘을 꽉 주더니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좌우의 사내들도 마나력을 끌어올려 한수호의 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컨테이너 입구를 꽉 틀어막은 채, 천천히 다가서는 한수호를 향해 강한 방어막을 쳤다.
이를 본 한수호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얼마든지 뚫고 가보라는 듯 당당히 입구를 막아선 세 사람을 잠시 응시하는 한수호.
그의 주먹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꽉 쥐어졌다.
이에 유희진의 오른편에 있던 사내가 시선을 내려 손에 쥔 작은 스캐너를 힐끔거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듯 말했다.
“720. 780. 850. 900! 실장님. 벌써 900을 넘었습니다!”
사내가 쥐고 있는 기계는 초소형의 마나력 측정기였고, 측정기 액정에 새겨진 숫자는 한수호의 마나력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900? 고장 난 거 아니야?”
유희진도 놀란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나력 900이면 진급 끝자락에 오른 강자라는 의미.
사장인 김명중으로부터 이 학생의 능력이 범상치 않은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삐빅. 삑!
스캐너에서 경고음이 흘러나왔고,
“9, 950! 아직도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한수호의 마나력은 거의 1천에 근접하고 있었다.
유희진의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그녀도 1천이 넘는 마나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건 마나 회로를 몸에 새겨넣음으로써 얻어낸 거라 실질적인 위력은 950 수준 밖에 나오지 않는다.
즉, 한수호의 마나력은 이미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넘어섰다는 것.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던 한수호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약 5미터 넓이의 컨테이너 벽 쪽으로 다가선 그는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 꽉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벽 앞에서 활짝 펼쳤다.
한수호는 활짝 편 손바닥을 벽에 가져다 댔다. 순간,
슈확!
주변을 완전히 틀어막고 있던 컨테이너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유희진과 두 사내가 서 있는 곳으로밖에 나갈 수 없는 구조였는데, 컨테이너가 순식간에 사라짐으로써 사방이 탁 트인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
“가죠, 형.”
한수호의 말에 김재우가 흠칫 놀라 했다.
그조차 한수호가 어떻게 컨테이너를 사라지게 만들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폭 5미터에, 길이만 15미터가 넘는 커다란 컨테이너가 공간이동 하듯 사라져 버린 지금의 상황에 전율마저 느껴졌다.
“어…. 그래. 가자. 가야지….”
김재우는 벌써 뻥 뚫린 곳으로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한수호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라라도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채 황급히 뒤를 좇았다.
“머, 멈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넌 열화기 특성을 각성한 게 아니었나? 컨테이너를 어떻게 사라지게 했냐고!”
유희진이 크게 소리치며 한수호 쪽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훅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흠칫한 유희진이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눈앞에 방금 사라졌던 컨테이너가 나타났다.
허공 10미터 높이에서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컨테이너.
유희진과 그녀의 두 수행원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꽈아앙
컨테이너가 그들의 바로 앞 1미터 지점에 육중한 굉음을 흘리며 떨어져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