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을 박차듯 열고 김명중을 향해 다가서는 한수호.
그의 머리는 다소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김명중이 한 말 때문이었다.
‘내가 겪은 미래는 분명 선배님이 겪었던 미래와 달랐다.’라는 말.
그렇다는 건 두 개의 미래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두 사람 다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래가 두 개라는 의미인지, 이산이 회귀하면서 바뀐 미래를 김명중이 겪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산. 김명중. 이 둘이 진실을 토해내지 않는 이상,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라.’
한수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들을 확실하게 제압한 뒤, 강제로라도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한수호가 그런 마음을 다지며 김명중 쪽으로 다가갈 때였다.
“꽤나 건방진 학생이야…. 그냥 말로 해서는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굳이 매를 들게 만드는군.”
김명중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한수호를 응시했다.
한수호는 그런 김명중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누구든 그런 자신감을 갖기 마련이죠. 죽도록 처맞기 전까지는.”
한수호의 도전적인 말에 김명중이 웃음을 거두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상대의 강함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덤비려는 별 볼 일 없는 양아치였나?”
“당신이야말로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합니까?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강화인간을 믿으시나? 아니면, 본인의 그 알맹이 없는 깡통 마나를 믿는 겁니까?”
한수호의 눈에는 빤히 보이고 있었다.
*[마나] : 3,671
무려 3천이 넘는 김명중의 마나 수치가.
하지만 한수호는 아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김명중의 마나력이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저 숫자에 불과한 빈 껍데기일 뿐이라는 걸.
김명중에겐 높은 마나 수치를 뒷받침해줄 신체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가 지닌 신체 수치는 기껏해야 130 근처.
그 또한 강화인간처럼 자신의 몸에 마나 회로를 새겨넣었을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김명중이 보일 수 있는 최대 능력은 당채룡 정도였다.
거만한 표정으로 한수호를 바라보고 있는 김명중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은 분신체로 한수호와 한판 붙었던 지소연과 비교해 봐도 너무도 약했다.
한수호가 보기엔 오히려 이하이가 더 강하다고 느껴질 정도.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하이가 네놈을 감싸준 덕분에 지금껏 무사할 수 있었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같잖은 놈이.”
“같잖다라…. 아티팩트와 마나 회로 각인에만 의지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한수호의 직설적인 말에 김명중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놈이 진정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김명중이 눈을 치켜뜨며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였다.
화르륵
그의 손에서 2미터에 달하는 불의 검이 확 치솟아 올랐다.
그러자 가만히 한수호를 바라보고 있던 이하이가 돌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만둬요! 델링그는 어차피 장태산이 가지고 있지도 않아요. 게다가 장태산이 던전에서 얻은 보상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요. 제발요!”
“비켜라.”
김명중은 굳어진 얼굴로 이하이에게 명령했다. 더불어 이산까지.
“어서 비키지 못해? 열쇠도 아닌 녀석 때문에 인류의 미래를 망칠 셈이냐? 델링그는 물론이고, 투명화 반지와 혼마흑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 물건들이 없으면 우리의 계획에 지대한 차질이 생긴다고 몇 번을 말했거늘!”
이산이 화를 내며 소리쳤지만 이하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했다.
“두 분이 이런 방식으로 인류를 구하겠다면, 저도 더 이상은 함께하지 않을 거예요.”
“뭣이!”
“이하이, 네가?”
김명중과 이산 모두 이하이의 폭탄선언에 당황해할 때였다.
“난 내 앞을 여자가 막아서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한수호가 이하이를 지나치며 한마디 했다.
“장태산! 너 혼자는 명중 오빠를 못 이겨! 내가 도와도 버틸 수 있을까 말까라고!”
“과연 그럴까?”
한수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라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라. 내가 없는 동안 깡통 인형들이랑은 적당히 잘 놀아줘라.”
강화 인간을 왜 깡통 인형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라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니를 바닥에 내려놨다.
그와 동시에 라라의 몸에서 짙푸른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띠디디디딕
이산의 손목에 채워진 패널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마나력이 천이백을 넘었어?”
이산의 손목 패널에 찍힌 숫자는 1,225였다.
그 숫자는 마나력이었고, 1천이 넘었다는 건 라라가 궁급 마공사라는 의미였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산은 몰랐다.
라라의 마나력은 원래 1,600이 넘는다는 사실을.
한수호가 적당히 놀아주라고 말했기 때문에 전력이 아니라 80% 수준의 힘만 끌어낸 것이었다.
이산이 라라의 마나력을 읽어내고 꺼낸 말에 김명중과 이하이가 흠칫 놀란 순간이었다.
산책하듯 걸음을 내디디던 한수호의 모습이 연기처럼 훅 꺼져버렸다.
현장에 있는 모두가 한수호의 움직임을 놓쳤다.
가장 먼저 한수호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건 김명중이었지만,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불쑥 솟아났다.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김명중의 뒤를 잡은 한수호.
그는 가슴팍에 주먹만 한 검은 구체를 띄운 채로 김명중의 어깨에 손가락을 살짝 얹었다.
그리고,
푸슛
한수호와 김명중이 지워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김명중은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변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은회색의 거대한 공동.
분명,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공터에서 한수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갈까 봐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뿐입니다.”
한수호는 김명중과 한판 제대로 붙을 생각으로 그를 전투 영역에 데려왔다.
하필이면 자신의 컨테이너 하우스 바로 앞에서 이들을 마주했다는 사실도 문제였고, 여기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이 엉뚱하게 말려들 수 있었기에 조심해야 했다.
게다가 자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이산이나 이하이 등이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전투 영역으로 데려와서 아무 걱정 없이 전력을 다해 김명중과 붙어볼 생각이었다.
여기라면 누가 볼 걱정도 없었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다칠 염려도 없었으니까.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더욱 재미있어질 겁니다.”
한수호는 히죽 웃어 보이고는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순간,
파바바바박
어두컴컴했던 은회색의 공동에 눈부신 전등이 켜지더니 환한 불빛으로 가득 찼다.
이곳은 전투 영역의 진입차단벽 안쪽이었다.
월이 이 진입차단벽의 대공동을 완성시킨 건 불과 이틀 전.
그래서 전투 영역의 하얀 세상과 완벽하게 격리된 장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갑자기 너무 강한 빛에 노출되자 김명중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한수호는 그런 김명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봤다는 미래. 어디까지였습니까?”
한수호의 돌직구에 김명중은 움찔했지만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주워들은 말 몇 마디로 날 떠볼 생각은 마라.”
“2057년도에 등장하는 악몽급 게이트에도 들어가 본 겁니까?”
뭔가를 아는 듯한 한수호의 질문.
김명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물었다.
“꽤 많은 걸 알고 있군. 이하이가 어디까지 말해준 거지?”
“살의 열쇠에 해당하는 세 명을 죽이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무 죄 없는 어린 여학생을 희생시켜서라도요?”
“너…. 설마, 살의 열쇠가 누군지도 아는 거냐?”
“…….”
한수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김명중에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도 그를 제압해야 했다.
화르륵
김명중도 그 결심을 느꼈는지 잠시 거두어들였던 화염의 검을 다시 발현시켰다.
‘회귀자 김명중. 당신이 과연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확인해 주겠다.’
한수호는 김명중을 상대로 자신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권존 김무성에게 전수받은 ‘근밀도 강화법’을 사용했다.
똑바로 선 자세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나를 온몸의 근육으로 고르게 퍼트린 순간,
우드득
근육이 꽉 뭉쳐 들며 공기조차 스며들지 못할 만큼 촘촘하고 단단한 고밀도의 근조직을 구축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담금질 된 쇳조각 같은 몸이 된 한수호.
그는 여전히 자신을 가볍게 보는 김명중을 향해 한 걸음 가볍게 내디뎠다.
츠악-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쭉 나아간 한수호.
김명중이 크게 놀라며 화염검을 들어 올린 순간,
꽝
간신히 화염검이 주먹을 막아냈지만, 김명중은 십여 미터나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크윽.”
김명중의 얼굴이 수치심과 고통으로 뒤섞여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한수호는 근밀도 강화법으로 모든 신체 능력을 30% 이상 높게 끌어올린 상태.
기본 능력치 자체도 한수호가 훨씬 높았기 때문에, 김명중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콰앙. 꽝!
주먹 한 방 한 방이 마치 대포알 같다.
김명중은 3천이 넘는 마나를 이용해 무엇이든 태우고, 베어버릴 수 있는 화염검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그 검은 한수호의 주먹을 간신히 막아내는 데에만 정신이 없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김명중은 화가 치밀었는지 분노에 찬 외침을 내지르더니 강력한 횡 베기로 한수호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벌게 된 그는 왼손을 머리 위로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손을 확 잡아당기자,
쿠오오오오
새하얀 상앗빛의 대도가 마법처럼 등장했다.
김명중은 새하얀 대도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고, 오른손에서 불타오르던 화염검마저 백색대도 위로 덧씌워 버렸다.
푸하아아악
대도에서 더욱 강렬한 화염이 뿜어져 나오더니, 김명중의 신체 수치 또한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평균 130 수준이었던 수치가 140을 넘고, 170을 넘어 거의 190까지 수직 상승했다.
한수호는 이것이 김명중이 쥐고 있는 백색대도가 만들어낸 엄청난 능력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봤다.
‘대체 무슨 무기길래…?’
신체 수치를 50%에 가깝게 높여주는 무기라니.
한수호는 이하이가 지닌 혼마청검과 김명중이 쥐고 있는 백색대도가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것도 혼마기의 하나인가?’
김명중의 백색대도 또한 다섯 개의 혼마기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7대 마화기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강력한 무기 5대 혼마기.
김명중이 거머쥔 백색대도 또한 혼마기 중 하나라면, 벌써 4개가 등장한 셈이다.
이하이가 차지한 혼마청검.
김무성이 슬쩍 보여줬었던 혼마귀부.
한수호가 던전에서 얻은 혼마흑갑.
그리고 김명중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백색대도까지.
‘그래서 이토록 자신만만했었던 거구나.’
한수호는 김명중의 자신감이 이 백색대도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했다.
거의 4천에 가까운 마나력에, 궁급을 한참 넘어선 신체 능력을 지닌 김명중.
그런 그가 신체 능력을 50%나 올려주는 혼마기까지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자부심이 높을까. 하지만,
‘당신은 상대를 잘못 만났어.’
한수호는 아무런 특성도 쓰지 않고, 오직 김무성에게 전수받은 근밀도 강화법을 운용하고 있을 뿐이지만, 모든 능력치가 김명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아둔함을 인정하고,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 널 압박하진 않겠다.”
김명중이 비릿한 미소를 띠며 충고하듯 꺼낸 말에 한수호의 입꼬리가 덩달아 말려 올라갔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어쩌죠? 당신이 무슨 수로 날 압박할 수 있다는 건지 당최 이해를 할 수가 없거든요.”
“내 몸에서 뿜어지는 힘의 압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냐? 정말 한심한 놈이로군.”
“무슨 압박이요?”
한수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꾹 눌러놓았던 기운을 한꺼번에 방출시켰다.
푸화악!
한수호의 몸에서 1미터나 되는 강력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평균 수치 400에 근접한 어마어마한 힘.
그 절반인 200 수준의 힘을 일으키며 한껏 고양되어 있던 김명중은 한수호의 놀라운 변화에 경악하고 말았다.
“압박이라는 건 말이죠, 바로 이런 겁니다.”
한수호가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또 당할 줄 아느냐!”
김명중은 거대한 한수호의 힘을 느꼈지만, 결코 자신이 밀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몸을 빙글 돌리며 백색의 화염검을 크게 휘두른 김명중.
하지만 한수호는 귀신처럼 김명중의 등 뒤에 따라붙었고,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한수호로서는 아무 특성도, 아무 기술도 담지 않은 매우 정직한 한 수.
그럼에도 김명중은 그 주먹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검의 방향을 되돌릴 수도 없었던 김명중은 이를 악물며 아티팩트의 힘을 사용했다.
“부동강막!”
위이잉
김명중이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빛을 내더니 그의 몸을 타원형의 막으로 둘러싸 버렸다.
한수호의 주먹은 간발의 차로 그 막이 씌워진 뒤에 김명중의 몸통을 후려쳤다.
꽈아앙!
“크윽!”
김명중의 입에선 답답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고, 동시에 그의 몸이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콰드드드드득
바닥을 쓸며 무려 30미터나 튕겨 나간 김명중.
그가 지나간 자리로 희뿌연 먼지가 풀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