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진무현은 지금 국가수호대의 직속 상관과 통화 중이었다.
국가수호대에는 게이트가 열리는 반응을 미리 알아챌 수 있는 특수한 특성을 지닌 마공사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노희경.
그녀가 지닌 특성은 바로 ‘조짐’이었다.
노희경의 조짐 특성은 패시브로, 굳이 특성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특성이 상시 작동한다.
이 조짐은 최대 반경 500킬로미터 내에서 게이트나 던전이 새로이 발생하게 되면, 그 징조를 미리 알려주는 엄청난 특성이었다.
그녀가 이 특성을 각성하게 된 건, 정확히 10년 전.
부모님과 함께 울릉도로 여행을 떠났던 노희경은 그곳에 오래전부터 발생해 있던 게이트로 굴러떨어졌고, 거기서 각성하게 되었다.
그 각성을 통해 얻은 특성이 바로 조짐이었던 것이고.
노희경의 조짐 특성은 보통 1시간 전부터 게이트가 열릴 거라는 신호를 보내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간혹 그녀의 조짐 특성조차 빠르게 파악해 내지 못해 게이트 발생을 코앞에 두고 알아차릴 때가 있는데, 그런 게이트가 바로 특수 게이트였다.
방금 진무현에게 핫라인으로 연락을 취한 인물이 바로 노희경이었으며, 그녀는 진무현에게 5분 내로 이 마공돔 어딘가에서 게이트가 형성될 거라고 경고를 했던 것.
진무현은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놀란 건 진무현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노희경과 인이어로 통화하는 내용을 모두 엿들은 한수호.
그는 자신이 방금 전에 느꼈던 그 기이한 느낌이 바로 게이트가 열리려고 하는 전조 현상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제길! 모든 감각이 좋아지다 보니까, 이젠 게이트 발생까지 느낄 수가 있게 된 건가?’
솔직히 그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게이트가 열린다는 것이 중요할 뿐.
여기서 게이트가 열린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진무현이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정도면, 그가 말한 특수 게이트라는 것이 최소 5등급 정도는 된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페이즈 2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게이트 내의 보스가 직접 지구 쪽으로 빠져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다.
5등급 게이트가 열리면, 시작부터 가고일이나 벳보우, 오우거 같은 중형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는 말.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이곳의 학생들 대부분이 학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한수호는 진무현을 바라봤다.
당황한 얼굴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만 있는 진무현.
한수호는 친구들에게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는 급히 마공돔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진무현에게 받아둔 백색 명함을 꺼내 그곳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리
벨은 계속 울렸지만, 진무현이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게이트 발생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을 만한 여유가 없는 모양.
한수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네 번에 걸쳐 전화를 반복했을 때,
또롱!
전화 수신음이 들리며 진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다시 통화….
“잠진도.”
한수호가 잠진도 이름을 꺼낸 순간, 진무현이 말을 멈췄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진무현이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혹, 삭시고개를 압니까?
“스텔스 망토도 아는 사람입니다.”
-오! 그때, 그 은인이 맞으시군요! 안 그래도 연락이 오길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진무현은 몇 마디 대화만으로 한수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냈다.
“그보다…. 지금 굉장히 시급한 일이 있는 것 아닙니까?”
한수호는 자신이 이 말을 하게 되면, 진무현 또한 자신이 같은 아카데미 1학년 학생이라는 걸 알아챌 것임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감추려고 스무고개를 하느니, 차라리 정체를 밝히고 지금 코앞에 닥친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당신…. 아카데미 학생이었군요.
역시나 바로 알아챘다.
“그걸 따지기보다, 지금의 사태부터 해결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이제 4분도 안 남았습니다.”
-이제 보니 제 통화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군요. 후….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어디 계신 겁니까?
한수호는 진무현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마공돔 곳곳을 살피고 있을 모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은 경기장 밖입니다. 이곳에 열릴 게이트가 몇 급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5급. 그것도 운이 좋았을 경우입니다.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운이 좋아야 5급이라면,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뛰쳐나오는 순간 이곳에 지옥도가 펼쳐진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었다.
학생들이야 모두 각성자이니 전력으로 도망친다면 어찌어찌 생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게이트 밖으로 나온 몬스터들을 이곳에 붙잡아 두지 못한다면, 곧장 마공돔 밖으로 빠져나가 아카데미 내의 일반인들을 처참히 죽여버릴 터.
그것뿐인가!
아카데미가 있는 곳은 서울 중심지다.
아카데미의 담벼락을 넘기만 하면, 수많은 일반인이 살고 있는 도심지에 바로 들어서게 될 테니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게 뻔했다.
“국수대에서 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빨라야 30분입니다. 특무부와 정의국은 그나마 5분 정도 빨리 도착할 것 같군요.
“대한맹에도 연락한 거겠죠?”
-거긴 40분 이상입니다.
“상황이 안 좋군요.”
한수호는 빠르게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한수호 자신이 진무현과 함께 게이트 입구를 막아서지 않고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 있는 교수님들과 함께 게이트 앞을 틀어막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진무현도 한수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투 장비는 챙겨왔습니까?”
-다행히 기본 무기는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사고가 터질지 몰라서 초소형 아공간 주머니에 기본 무기들을 챙기고 다니거든요.
“다행이네요. 일단, 학생들부터 대피시키세요. 나도 금방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알아보면 되죠?
“보면 바로 알아볼 겁니다. 그때와 비슷한 복장일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몬스터들이 마공돔 밖으로 빠져나가게 둬서는 안 됩니다.
진무현의 음성엔 단단한 각오의 느낌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회귀 전의 진무현도 시민들의 생명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더니, 지금의 진무현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수호는 그런 진무현이 얻었어야 할 라뮬검을 자신이 빼앗은 것이 괜히 미안해졌다.
‘그래도 내가 한 번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얼음불 특성까지 줬으니 공짜로 얻은 건 아니지.’
한수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바로 시작합시다.”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3분 31초.
진무현이 게이트 발생을 경고하면 마공돔 안의 모두가 패닉에 빠지겠지만, 학생들이 마공돔을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했다.
통화를 마친 한수호.
그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색상과 모양까지 변형시킨 후드티를 꺼내 입었고, 허리엔 착용구를 둘러맸다.
오랜만에 라뮬에 그랑, 로크까지 모두 착용구에 끼워 넣은 상태.
다만, 고니를 라라 곁에 두고 온 상태라 안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게 불가능했다.
‘우선, 다른 마스크라도 써야겠네.’
오래전에 사 두었던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쓰고, 후드까지 푹 눌러 쓰니 대충 용모를 가릴 수 있었다.
한수호는 그 상태에서 마공돔 밖의 잔디 위에서 마공돔의 지붕 쪽을 올려다봤다.
‘라라. 고니한테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라고 해.’
한수호가 머릿속으로 라라를 떠올리며 한 말에, 곧바로 답신이 전해졌다.
>>라라가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는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고.
‘넌, 오지 마. 잘못하면 너까지 사냥당한다.’
라라가 여기에 온다면 큰 전력이 될 수 있겠지만, 한수호는 그녀가 이곳에 오는 걸 막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면 특무부부터 정의국, 대한맹에 국수대의 정예 요원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그들에겐 인간과 몬스터를 구별해낼 수 있는 장비들이 있었고, 라라가 이곳에 있을 경우, 정체가 탄로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라라가 빨리 가서 주인을 도우라며 고니의 엉덩이를 툭 칩니다. 역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운명의 끈이 연결된 오라버니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알았으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집 밖으로 나오지 마라.’
>>라라가 대답합니다. 절대 나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괴물들을 처치해 버리라고.
라라는 정신 교감을 통해 마공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이미 파악했기에 한수호에게 응원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한수호는 고니가 이곳에 도착할 시간을 가늠해 봤다.
‘대충 3분 정도겠어.’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달려오려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필요했다.
‘어쨌든, 가볼까?’
한수호는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부우욱
허벅지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오르던 어느 순간, 마공돔 안쪽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에에에에에에엥-
이는 몬스터 출현을 알리는 경고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큰 소란이 일었고, 마공돔 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한수호는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을 튕겨 힘차게 날아올랐다.
콰앙!
잔디 바닥이 푹 꺼지며 한수호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무려 50여 미터나 되는 마공돔의 꼭대기까지 단숨에 날아오른 한수호.
마공돔 지붕 위에 가볍게 내려선 그는 더욱 시끄럽게 들리는 알람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안쪽 경기장을 살폈다.
한수호는 수십 배율의 망원경 부럽지 않은 시력으로 곧장 진무현을 찾았다.
진무현은 지평학 교수를 비롯한 전국 아카데미의 이름난 교수들과 함께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게이트가 열리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사방을 주의 깊게 살피는 중이었다.
그런데, 관람석 쪽에선 아직 몇몇 학생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한수호의 친구들이었다.
그들 말고도 우태범과 그의 여자친구인 김유진이 있었고, 이대성과 그 친구들 셋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들 평범한 실력자들이 아니긴 했지만, 5급 이상의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중형 몬스터들을 막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적어도 우태범이 죽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우태범 같은 노력형 천재는 훗날 발자크와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될 인물이기에 여기서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회귀 전에도 한수호, 자신만 아니었으면 우태범은 사왕오패에 버금가는 영웅이 되어 인류의 희망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 여기서 게이트가 열리는 걸까?’
한수호가 알기로, 회귀 전에는 마공돔에서 게이트가 열린 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는 건,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 갑자기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정말 미래가 바뀌기라도 한 걸까?’
전에는 발생한 적이 없는 게이트가 등장하는 거로 봐서는 미래가 단단히 비틀어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건지 이유를 분석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내가 가서 게이트가 열리는 장소를 정확히 알려줘야겠구나.’
한수호는 게이트가 어디에서 열릴지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마공돔 중앙에 설치된 8개의 경기장 중 4번째 경기장의 중앙.
지금 그곳에선 보이지 않는 강렬한 기운이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2분여.
한수호는 다시 한번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한수호가 날아오르자 교수들과 남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어? 저건 또 누구야?”
“실루엣이 내가 아는 누구랑 완전 비슷한데?”
“그러고 보니 장태산, 이 녀석은 이 사달이 났는데 어딜 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냐?”
친구들이 각자 한마디씩 외치고 있을 때, 한수호는 네 번째 경기장 위로 쿵 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오셨군요!”
이를 본 진무현이 한달음에 한수호 쪽으로 달려왔다.
“게이트가 생기는 위치는 저곳입니다.”
한수호가 10여 미터 앞을 가리키자 진무현이 흠칫 놀랐다.
“게이트 생성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까?”
“뭐, 그냥…. 느껴지네요.”
“….”
진무현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 진급 이상의 교수들 12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뒤로는 한수호의 친구들과 우태범, 이대성 등이 따르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린다는 곳이 저기냐?”
지평학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김무성이 단번에 한수호의 정체를 알아보고 질문을 던졌다.
“네. 곧 열립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우리가 앞장설 테니 너희들은 뒤로 빠져라.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는 놈들만 너희들이 맡거라.”
김무성이 교수들과 함께 포위망을 구축하며 한 말에 한수호는 뒤로 물러섰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한수호가 다른 학생들과 나란히 서자 백윤후가 슬쩍 다가왔다.
그는 눈만 빼고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 한수호를 대충 훑어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그것도 변장이라고…. 쯧.”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지만 한수호만큼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못 들은 척했다.
그 말에 반응을 보이면, 자신이 장태산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어? 쟤들은 또 뭐야? 5급 게이트가 열린다는데 왜 도망 안 치고 저기로 다시 기어 나오는데?”
양소혜가 11시 방향의 출구를 바라보며 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곳엔 열댓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너희들, 빨리 도망 안 쳐!”
그 학생들을 알아본 누군가가 소리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우태범.
도망치다 말고 다시 마공돔 안쪽으로 기어 들어온 학생들은 다름 아닌 제주 아카데미의 1학년 학생들이었다.
그 학생들을 알아본 제주 아카데미의 교수도 덩달아 소리쳤다.
“당장 여길 떠나! 너희들이 있을 곳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교수의 외침은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쩌어억-
경기장 상공의 공간이, 마치 괴물의 손에 잡아 뜯기듯이 갈라지더니 새파란 빛에 둘러싸인 균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