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비명이 들린 곳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린 한수호.
안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한수호는 안개 너머의 그림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빤히 볼 수 있었다.
한수호가 본 것은 굵고 기다란 촉수 같은 무엇이었다.
촉수가 튀어나온 곳은 다름 아닌 게이트.
게이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촉수 하나가 등을 보이고 있는 김유진의 허리를 휘감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수호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쪽을 향해 몸을 튕겼다.
쐐애액
한수호가 안개를 꿰뚫고 단숨에 게이트 앞에 당도했다.
하지만 김유진은 이미 촉수에 이끌려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유진아!”
한발 늦게 도착한 우태범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김유진을 불렀다.
바로 그때.
쿠워어어어엉
크와아아악!
우태범의 바로 옆 안개 속에서 두 마리 중대형 몬스터가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놈들은 이대성과 친구들이 맡고 있던 몬스터, 코세러스였다.
놈들과 전투 중이던 이대성과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코세러스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우태범으로 목표를 바꾼 것.
화가 잔뜩 나 있던 우태범은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허리를 튕겨 올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욱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5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한수호의 귀로 선명하게 들렸다. 그 순간.
퍼어어어엉
우태범의 주먹에서 섬광 같은 빛이 뿜어지더니, 정면으로 달려들던 코세러스를 그대로 터트려 버렸다.
후두두둑
폭죽처럼 터져나간 코세러스의 조각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때 몇 미터 뒤에 있던 코세러스의 목으로 붉은 실선 하나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툭. 투르르르….
바닥을 나뒹구는 코세러스의 머리.
한수호는 라뮬검에 묻은 혈흔을 털어내며 우태범을 바라봤다.
‘방금 그건…. 기공파?’
우태범의 두 번째 특성, 기공파.
회귀 전의 우태범은 경질화 특성을 자연각성했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기공파까지 각성했었다.
이 기공파는 몸속의 마나를 신체의 한곳으로 집중시켜 레이져처럼 쏘아내는 굉장히 살인적인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 기술에 소모되는 마나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무리를 할 경우 한 번에 마나가 고갈되고 마는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회귀 전, 토너먼트에서 한수호를 결승 상대로 마주했던 우태범은 이 기공파를 한계치로 사용했었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한수호는 기공파를 사용한 직후, 우태범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해탈한 듯 편안해 보이면서도 뭔가 많은 아쉬움이 남은 듯한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우태범.
그는 입에서 대량의 피를 토하면서도, 그를 구하려는 교수들의 도움을 모두 거절한 채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었다.
‘설마, 그때의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는 건가?’
한수호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우태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날 쳐다볼 시간에 유진이를 구하러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우태범은 회귀 전과는 다르게 기공파를 쓰고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신체 정보를 훑어봐도 특별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
한수호는 한시름 놓으며 게이트를 향해 다가서는 우태범을 불러 세웠다.
“멈춰, 우태범. 게이트 안에 들어가는 건, 나와 저 학생뿐이다.”
한수호가 때마침 게이트 앞에 도착한 진무현을 가리키자 우태범이 눈에 불을 켰다.
“게이트 안에 빨려 들어간 건 내 여자친구야! 네가 뭔데 내 앞을 가로막지?”
“저 안에 들어가면 넌 죽을 테니까.”
“하, 웃기는 소리. 너희들은 괜찮고 나는 죽는다? 이게 무슨 억지야?”
우태범은 한수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게이트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한수호가 이를 그냥 두지 않았다.
“네 여자친구를 살아서 만나고 싶으면 이곳에 남아라.”
한수호는 우태범의 어깨를 콱 찍어 눌렀다.
“손 치워!”
화가 난 우태범이 한수호의 손을 거칠게 쳐내려는 순간, 우태범은 목 뒤에서 따끔함을 느끼며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김유진은 내가 반드시 살려서 데려온다. 그러니 날 믿고 기다려.”
한수호는 스승 부부에게 배운 혈도술로 우태범의 움직임을 멈춰 세우고는 진무현과 함께 게이트로 다가갔다.
“곧 교수님들이 올 거다. 그럼 그들에게 이대성과 친구 놈들이 게이트 안에 숨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려라. 그리고 절대…. 절대 누구도 이 게이트 안에 들어서지 말라고 전해. 지평학 교수님한테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실 거다.”
한수호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했지만, 우태범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혈도술에 제압되어 눈만 끔뻑거릴 뿐,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수호와 진무현을 뚫어져라 바라만 볼 뿐.
“태호 씨. 충주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정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겁니까?”
이대성은 한수호를 태호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그렇게 호칭했다.
“김유진을 게이트 속으로 끌고 들어간 건 몬스터가 아니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진무현은 한수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짙은 안개로 인해 김유진이 게이트로 끌려 들어갔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녀를 휘감았던 것이 촉수라는 것도 모른다.
지금 한수호는 우태범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진무현에게 말하듯 충고하고 있었다.
“여기 이 자국. 이건 촉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찍어 누른 흔적이니까요.”
한수호는 게이트 바로 앞의 바닥에 생겨난 긁힌 자국을 내려다봤다.
언뜻 보면 그냥 다섯 줄기의 기다란 자국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사람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찍었다가 긁어버린 흔적이었다.
“이대성의 친구 중, 팔을 고무처럼 길게 늘리는 특성을 지닌 자가 있나 봅니다. 그자가 게이트에 뛰어들면서 김윤진까지 쓸어가 버린 것 같고요.”
“아….”
진무현은 이제야 상황을 대충 이해했다.
“놈들이 고의로 김유진을 데려간 건 게이트 안에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고기 방패로 사용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런데 우태범이 놈들의 뒤를 쫓게 된다면,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겠죠.”
“더 이상 뒤쫓지 못하게 하려고 김유진을 바로 해칠 수도 있겠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한수호와 진무현의 대화에 우태범의 눈빛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도 이제야 느낀 것이다.
정말로 이대성과 그 친구들이 김유진을 고기 방패로 쓸 목적으로 데려갔다면, 자신이 뒤쫓는 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도 갑시다.”
“그러죠.”
한수호는 우태범이 현 상황을 이해했음을 알아봤다.
‘확실히 남다른 이해력이야.’
훗날 우태범이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에서 큰 역할을 하길 바라며, 한수호는 진무현과 함께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그 둘이 사라진 그 순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교수들과 학생들이 우르르 게이트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게이트 3미터 앞에 석상처럼 서 있는 사람이 우태범임을 알아보고는 살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들 중 지평학이 우태범에게 다가섰다.
“진무현하고 마스크 쓴 녀석은 어디 가고, 어째서 너 혼자 이러고 있는 것이냐?”
지평학의 손길이 우태범을 스치자, 석상처럼 굳어있던 우태범의 몸이 자유를 찾았다.
“후…. 유진이가, 김유진이 충주 아카데미 녀석들 손에 끌려갔습니다.”
“뭐? 끌려가? 어디로?”
“저기, 저 게이트로요.”
우태범이 게이트를 가리키자 지평학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말 충주 아카데미 학생들이 한 짓이냐?”
“솔직히, 저는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스크 사내가 그러더군요. 충주 아카데미 학생이 게이트로 뛰어들면서 유진이까지 쓸어가 버렸다고요.”
“마스크 녀석이 그랬다고?”
“네. 게다가 그 누구도 게이트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을 지 교수님께 꼭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태범은 한수호의 부탁을 착실하게 들어주었다.
그 말에 지평학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장태산, 그 녀석도 이 게이트가 인위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눈치챈 모양이군.’
지평학은 특무부에서 요원들이 도착하면, 에이스들만 추려서 함께 게이트에 진입할 생각이었다.
게이트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강제로 열린 이상, 그 너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공 요원들이 오기 전까지 게이트 입구를 확실히 틀어막으려고 했는데, 수습하기도 전에 이미 사고가 터진 것이다.
‘충주 아카데미 학생들이 어째서 게이트에 들어간 거지? 게다가 김유진 학생은 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이미 들어간 사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게이트에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모두 여기서 대기한다. 다른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두 사람씩 교대로 경계를 서고, 나머지는 5미터 간격 내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지평학의 말에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에 널브러진 몬스터의 사체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교수 한 명에 학생 한 명이 한 조가 되어 게이트 앞에서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 * *
슈우우욱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며 찰나적으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진무현은 자신보다 한발 앞서 게이트를 통과한 한수호의 등이 보이자 그쪽으로 다가섰다. 그때였다.
부아아아아악
방금 게이트를 넘어온 한수호의 정면을 향해 거대한 벽이 쇄도했다.
마치 정면이 황토색의 벽으로 꽉 찬 것 같은 모습에 진무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저히 벽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방을 꽉 메우고 날아드는 거대한 벽.
진무현은 한수호라도 살리려고 자신이 앞으로 튀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한수호의 가벼운 동작 하나를 본 순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스읏
한수호가 검지와 중지로 만들어낸 손가락 검으로 벽을 가르듯 세로로 그어버린 순간,
쩌억-
거대한 황토색 벽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건 벽이 아니라 가로로 눕혀진 커다란 기둥이었다.
지름이 30미터가 넘어 벽처럼 느껴졌을 뿐.
그때, 한수호가 고개를 확 쳐들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덩달아 하늘을 바라본 진무현.
그의 눈에 수백 개의 뾰족한 검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검을 쥔 사람은 놀랍게도 충주 아카데미의 학생, 신명호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곽
시퍼런 마나의 기운을 두른 수백의 검들이 한수호와 진무현의 몸에 구멍을 내기 위해 살기를 품으며 내리꽂혔다.
이를 본 진무현이 본능적으로 혼천일격을 펼쳐내려는 순간, 이번에도 한수호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터엉
한수호가 크게 한 발 내디디며 바닥을 내려찍자, 주변의 땅이 회오리치듯 휘말려 올라갔다.
한수호는 회오리처럼 솟구치는 흙더미의 중앙에 서서 오른손을 쭉 뻗어 올리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순간,
꽈아아아앙!
수백 개의 검들과 송곳처럼 변한 흙더미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굉음을 터트렸다.
콰드드드드드
송곳이 된 흙더미는 단번에 검막을 깨뜨렸고, 검막의 뒤에서 검을 움켜쥐고 있던 신명호의 몸까지 후려쳐 버렸다.
“크헉!”
신명호가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위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는지 뒤로 공중제비를 한 번 돌더니 허공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사라졌다.
그제야 두 사람을 향한 위협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더 이상 위협이 느껴지지 않자 진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수호를 바라봤다.
한수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먼 허공의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한수호의 모습에서 진무현은 감히 따를 수 없는 막강한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했길래 저 나이에 이렇게 강할 수가 있는 거지?’
정말 말도 안 될 만큼 강하다.
지난번, 잠진도 사건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사실, 진무현 자신도 그사이 국가수호대의 지원을 받아 마나력을 엄청나게 확장시켜 주는 천년삼지구엽초를 먹어 급성장을 이루었다.
지구엔 존재하지도 않는 천년삼지구엽초.
국수대에서 수많은 게이트를 돌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영약이었고, 그 영약을 흡수한 진무현은 단번에 마나력 700이 늘어났다.
그 덕에 체질개선 특성 1단계의 두 번째 기회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잠진도 때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능력적인 향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무현도 지금의 한수호를 보자면, 강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두 개로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흙 기둥을 반으로 가른다던가, 땅바닥을 진동시켜 흙더미를 회오리처럼 만들어 허공으로 쏘아 올리는 모습을 보자니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강자가 나와 같은 아카데미 1학년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말 못 할 정도의 경외감이 느껴진다.
진무현이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
한수호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의 한쪽 끝을 바라보며 고심에 잠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까 그 녀석…. 마공돔에서 봤을 때보다 능력치가 두 배 이상 올랐잖아?’
한수호는 방금 잠깐 손을 섞어본 신명호의 능력치를 읽어내고 크게 놀란 상태였다.
한수호가 마나압축법에 염동파쇄기의 힘을 섞어 만들어낸 공격에 튕겨나간 신명호.
그의 신체 수치는 무려 140에 달하고 있었다.
마나력은 1,300을 넘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수호의 개조 특성이 4단계에 오른 이후로는, 사왕오패에 버금가는 강자들도 능력치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니 마공돔에서 봤던 신명호의 능력 수치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무.
‘나처럼 능력치를 뻥튀기 시키는 특성을 지니기라도 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신명호라는 학생 또한 최소 두 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릴 일부러 게이트로 유인해 놓고는 왜 다짜고짜 죽이려 든 거지?’
한수호는 그 이유조차 쉽게 예측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한수호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바로 안개의 미궁이라고 이름 붙은 이 던전에 단 한 줌의 안개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