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이걸로 이곳의 안개를 마공돔으로 흘려보낸 거군요.”
진무현이 게이트 바로 옆에 설치된 손바닥만 한 기계를 살피며 한 말이었다.
기계는 작은 모터처럼 생겼는데, 깔때기처럼 생긴 뒷부분으로 땅바닥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빨아들인 후, 게이트에 살짝 대어진 전면부로 뭔가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 기계의 흡인력이 어찌나 강한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조금도 흘리지 않고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상황으로 보아, 누군가가 이곳에 기계를 설치해 안개의 미궁에서 생성되는 연기를 게이트 너머로 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예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수호의 질문에 진무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군요.”
“그게 어딥니까?”
한수호는 진무현의 입에서 이프리트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고 있었다.
진무현이 이프리트를 안다면 국가수호대에서도 그 조직의 위험성을 눈치채고 있다는 의미였으니 얼마든지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새한교. 그곳이 가장 유력할 것 같군요.”
진무현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왔다.
황도13궁도 아니고 새한교라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새한교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저 그런 허접한 사이비 종교가 아닙니다. 그곳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게이트 너머의 세상에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인류가 모두 지구를 떠나 그곳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그래서 강제로 게이트를 여는 기계까지 발명해 냈다고 하더군요. 그 기계로 언제든 자유롭게 뉴에르다에 갈 수 있다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고요.”
듣고 보니 진무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회귀 전에도 많은 시민을 속여 집단으로 자살을 하게 만든다든가, 가족을 죽이고 새한교에 투신하게 하는 등의 끔찍한 사고가 수도 없이 일어났었으니까.
새한교는 피를 갈구하는 집단이었고, 광기에 물들어 살아있는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등의 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집단이었다.
그들이라면 마공 아카데미 학생들이 잔뜩 모인 마공돔에 게이트를 여는 것 또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새한교도 어쩌면 이프리트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것이 한수호의 생각이었다.
“학생들이나 교수 중에 새한교의 인물이 있는 걸까요?”
한수호는 진무현의 생각에 반박하지 않고, 인정하는 듯한 말투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음…. 아마도 교수 중 누군가가 새한교의 교도이지 않을까 싶군요. 아니, 어쩌면 교수와 학생이 손을 잡고 단체로 행동한 걸지도 모르고요.”
“교수와 학생이 손을 잡았다라…. 그럼 충주 아카데미에 새한교의 교도들이 상당수 침투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군요.”
한수호가 보기에 충주 아카데미는 뭔가 상당히 수상쩍었다.
원수나 다름없는 이대성이 다니는 아카데미여서 그런지, 그곳의 교수는 물론, 이대성을 따라다니는 친구들까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회귀 전에는 본 적도 없는 평범한 학생들이 특성을 두 가지 이상씩 소유한 것도 그렇고, 갑자기 이 위험한 게이트 속으로 뛰어들면서 김유진을 데려간 것도 이상해.’
아까는 우태범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고 충주 아카데미 학생들의 함정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속마음은 달랐다.
이대성과 녀석의 친구들이 노리는 건 우태범 하나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충주 아카데미 전체가 이미 새한교에 먹힌 걸 수도 있습니다.”
국수대 소속인 진무현은 현시점에서 새한교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노리고 마공돔에 게이트를 생성시켰을까요?”
“제물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물이라면…?”
“새한교의 교도들은 뉴에르다의 대마왕 발자크를 신이라고 믿으며 마음속 깊이 추앙하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발자크가 원한다는 핑계로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바치기도 하죠. 이 게이트를 만들어 낸 것도 아카데미 학생들의 피를 이용해 의식을 치르려는 걸 겁니다.”
진무현의 말에 한수호가 크게 놀랐다.
회귀자인 이산이나 김명중, 그리고 이산의 딸 이하이를 제외하고서는 발자크라는 이름을 언급한 건, 진무현이 처음이었다.
“피를 이용한 의식으로 발자크에게 뭘 얻어내려는 거죠?”
“부활이겠죠. 새한교는 발자크를 전쟁과 죽음의 신으로 여기고 있고, 놈을 지구에서 부활시키려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으니까요.”
점점 윤곽이 잡혀 간다.
새한교가 오래전부터 발자크의 부활을 꿈꿔 왔다면, 그들이 이프리트의 중심에 서 있는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박새한이 이프리트의 수장인 걸까? 그럼 백진성은? 폭마 박준규도 살의 열쇠 중 하나라고 했으니 이프리트에 속한 인물일 텐데?’
생각보다 이프리트라는 조직의 규모가 더욱 큰 것 같았다.
“일단, 직접 가서 사실 확인부터 해 봅시다. 김유진을 그냥 뒀다가 피의 의식에 제물로 삼아버리면 큰일이니까.”
“그게 낫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진무현은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둘러보며 난감해했다.
“방향은 제가 압니다. 그러니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한수호는 아까 신명호가 사라진 곳이 어느 쪽인지 확실히 봐 두었다.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한수호의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수호가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무현도 그 뒤를 바짝 따르기 시작했다.
* * *
“놈들은 어떻게 됐지?”
높다란 성곽 위에서 이대성이 한 발을 성벽 위에 올린 채 물었다.
그의 질문에 10미터 성곽 아래에 있던 신명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실패…했어. 미안하다. 장태산, 그 자식이 그렇게나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쯧. 가볍게 처리하라고 신체 강화제까지 줬는데도 실패를 해?”
이대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신명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 한 번만 기회를 더 줘! 이 미궁이 인간의 피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게끔 이곳에 들어오는 놈들을 죄다 죽여버릴게!”
“미궁에 바쳐져야 할 목숨은 열다섯이야. 만약 숫자가 부족하다면 너희들 목숨으로라도 채울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알았어. 꼭 성공시킬게.”
신명호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자 이대성의 뒤에 서 있던 최우빈과 박요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대성이라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의 목숨을 취하고도 남을 인물이었으니까.
그때, 이대성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성곽 위의 한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커다란 십자형의 나무가 높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중심엔 여기저기 찢겨나간 교복을 입은 김유진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한 사람이 나른한 표정으로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 있다.
30대 후반의 다소 마른 체형의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충주 아카데미의 1학년 선임 교수 배도형이었다.
“교수님도 준비는 되셨죠?”
이대성이 묻자 배도형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언제든지 시작해도 된다.”
“그럼 교수님만 믿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걱정 마라.”
이대성은 최우빈에게 슬쩍 눈짓을 해 보였다.
그 눈짓에 최우빈은 기쁜 표정을 지었고, 박요한은 똥 씹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대성과 함께 미궁에 도전하게 될 인물로 최우빈이 선택받은 것이기에 박요한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박요한. 너는 신명호하고 같이 장태산을 맡아라. 꽤 강한 놈인 것 같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시간만 끌어. 만약 다른 아카데미 녀석들이 이곳에 발을 디디면, 그놈들부터 노려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어. 알았어.”
이대성은 신명호의 벼락 같은 기습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냈다는 한수호를 굳이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안개 미궁의 던전을 이곳에 생성시킨 이유는 손쉽게 마공사들의 생명을 갈취하여 원하는 것을 빠르게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갈취한 생명들이 안개 미궁에 스며들게 되면, 이 던전은 마나폭발을 일으키게 되고, 발자크의 봉인 균열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대성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이 던전을 오픈하려 했었다. 하지만 오늘 한수호를 만나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회귀 전에도 항상 이대성의 앞길을 막아서기만 했던 한수호.
마공사로서는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이 바로 한수호였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계속해서 나비효과를 일으켜 결국 손쓰지 못할 정도의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에, 이 중요한 던전을 빠르게 처리할 필요가 생겼다.
이대성에겐 이 던전의 최종 보스인 사툴란을 쓰러뜨리고 얻을 수 있는 ‘아스의 신물’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보물들을 엉뚱한 놈이 가져가게 둘 수는 없지.’
이 안개의 미궁은 열쇠가 없이는 절대 열 수 없지만, 2052년 1월이 되면 제주도 옆에 위치한 비양도에서 저절로 열리고 만다.
이대성이 회귀하기 전의 세상에선 2055년에 열렸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그보다 3년이나 이른 시간에 열렸던 것.
그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건, 2057년도에 한남동 게이트에서 약탈[3] 특성을 얻게 되었을 때 대신관 아캄이 남긴 책자에서 정보를 얻은 덕분이었다.
이대성은 안다.
2052년도에 비양도에서 열린 안개 미궁 던전을 시작으로, 엄청난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게이트와 던전들이 5일 간격으로 계속 열린다는 사실을.
안개 미궁에서는 아스루나 대륙의 대영웅인 아스의 신물을 얻을 수 있으며, 5일 뒤에 열리는 한남동 게이트에서는 약탈[3] 특성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다시 5일 뒤에는 부산 해운대 던전이 열리는데 거기선 특성 진화석이라는 놀라운 보물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무려 다섯 개가 넘는 신물과 특성들이 연달아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시기는 이대성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회귀 전, 우연히 한남동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약탈[3] 특성을 얻을 수 있었던 이대성.
그는 그 특성을 얻는 과정에서 아캄의 책자를 찾아 안개 미궁과의 연계성을 알게 되었고, 그와 관련된 다른 게이트와 던전들의 존재까지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충분히 준비되는 시점에 안개 미궁을 열기 위해 열쇠를 찾아만 놓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한수호도 회귀자일 가능성이 대두된 이상, 그냥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한수호에게 그 엄청난 보물들을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가 아는 걸 그놈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이대성은 한수호도 안개 미궁과 다른 게이트들의 연관성을 알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이루기 위해 마공돔 중앙에 안개 미궁을 열어버렸다.
아예 여기서 한수호를 해치울 기회를 만들고, 더불어 사툴란까지 쓰러뜨려 아스의 신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결정적으로 각성을 했지만 아직은 약한 아카데미 학생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여 손쉽게 생명을 취한 뒤, 그걸 이용해 마나폭발을 유도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이제 화살은 당겨졌다.
한수호는 이미 던전에 진입했고, 자신은 보스 사툴란을 쓰러뜨리기 위해 미궁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신명호나 박요한이 설사 한수호를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배도형이 김유진을 인질로 잡고 있는 이상 함부로 미궁에 침입하지는 못하리라.
‘아스의 신물만 얻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마!’
이대성은 지독한 악연으로 이어지는 한수호를 떠올리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 * *
10미터 높이의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 하나.
한수호는 신명호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하던 중 이 성을 마주하게 되었다.
“저곳에 진짜 미궁이 존재하는 겁니까?”
진무현은 이곳으로 오면서 한수호에게 안개 미궁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원래 이곳은 게이트를 넘은 순간부터 짙은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넓은 들판으로 이루어진 이 던전의 필드엔 6급 수준의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필드 한쪽 끝에 위치한 옛 고성에 들어서야 진정한 미궁의 공포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미궁은 수많은 함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위험한 만큼 보상도 좋다면서요?”
“지금은 보상보다 김유진을 구하고, 새한교의 교도들을 없애는 게 우선입니다.”
한수호의 말에 진무현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무거워서 웃자고 해본 말입니다.”
“저 역시 너무 가벼워 지진 말자고 진지한 척해 본 겁니다만.”
한수호가 눈웃음을 그리자 진무현이 당황했다.
“그, 그렇군요.”
대답하는 진무현의 이마에서는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앞에 서 있는 한수호는 분명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학생인데, 대화를 해보면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진다.
원래부터 쉽게 다가가기 힘든 성격인 건지, 아니면 친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벽을 치는 건지 모를 만큼 말투와 행동이 딱딱하다.
농담도 진담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진무현은 한수호를 대하기가 참 어렵구나 싶었다.
“왔군요.”
한수호의 말에 성벽 위를 올려다보니 어느새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90에 육박하는 큰 덩치를 가진 신명호와 키도 작고 마른 편이지만 강렬한 살기를 내뿜는 박요한, 그리고 한 손에 5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선 교수, 배도형까지.
놀랍게도 십자가 윗부분엔 김유진이 밧줄에 묶여 축 처진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대성은?’
한수호의 목표는 이대성이었기에 그가 보이지 않자 급히 마나 파동을 흩뿌려 주변을 훑었다.
‘없어?’
반경 200미터 내에는 다른 마공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성벽 너머의 공간에 상당한 숫자의 생명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한수호는 그 생명체들이 안개 미궁의 필드를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때, 배도형이 들고 있던 십자가 하단부를 성벽에 꽉 박아넣으며 한마디 했다.
“고작 둘이야?”
가소롭다는 얼굴로 비웃음을 머금은 배도형.
한수호는 그런 배도형을 빤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둘이라니. 듣는 고니 서운하게.”
한수호가 안면 마스크를 떼어내더니 그걸 공중으로 휙 내던졌다.
순간, 하늘 높이 날아오른 안면 마스크가 놀라운 변신을 시작했다.
촤르르륵. 철컥! 철커덕!
수많은 조각이 뒤집히고, 휘돌다가 재조합되더니 덩치를 순식간에 불렸다.
작은 강아지 정도였던 크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대형 여객선에 준할 정도로 커져 버렸다.
쿠우웅
고니는 집채보다 큰 덩치의 드래고니안의 모습이 되어 성벽 위에 내려섰다.
대신전의 기둥만큼이나 커다란 두 발로 성벽을 꽉 움켜쥐자, 두터운 성벽이 과자처럼 으스러지며 무너졌다.
크아아아아아앙!
드래고니안이 된 고니가 입을 벌리며 괴성을 터트리자 한수호를 제외한 모두는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