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순백의 로크에 완벽하게 반하는 새까만 나샬.
왜 이 나샬만 따로 떨어져 안개 미궁의 보스가 품고 있었던 걸까?
한수호는 사툴란이 내민 나샬을 거머쥐었다.
파아아아아앗!
손에 닿는 순간 나샬이 검은 광채를 흩뿌렸다.
그와 함께 한수호의 눈앞으로 나샬의 정보가 떠올랐다.
[심연의 검, 나샬]
-코스트: 121
-아스의 파괴검 세트 중 하나입니다.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정보.
하지만 한수호에겐 그 무엇보다도 값어치 있는 정보였다.
‘드디어, 나샬까지 얻었다!’
아스의 파괴검 라그나로크가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다.
한수호는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라뮬과 그랑, 거기에 로크까지 모두 꺼내어 착용구에 꽃았다.
너무도 정확히 맞아들어가는 검들.
이제는 단 한 자리도 비지 않은 채, 형형색색의 검 네 자루가 착용구를 꽉 채우고 있다.
‘라그나로크….’
한수호는 허리에 채워진 네 개의 검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아스루나의 대영웅 아스가 남긴 최강의 무기, 라그나로크.
라뮬, 그랑, 나샬, 로크라는 이름을 지닌 이 무기들은 각 무기가 지닌 독특한 속성에 따라 2단계로 변신이 가능했다.
라뮬은 불꽃의 창으로, 그랑은 얼음의 방패로, 로크는 번개의 건틀릿으로.
‘나샬은 어떤 속성을 지녔을까?’
한수호는 그런 의문을 띄우다가 착용구에 끼워진 나샬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을 쥔 손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처음엔 불의 기운을.
다음엔 얼음의 기운을.
세 번째엔 뇌의 기운을.
하지만 나샬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라그나로크의 속성이 중복되는 일은 없구나.’
다른 검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속성이 떠올랐지만, 나샬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검은 빛으로만 이루어진 검, 나샬.
한수호는 왜인지, 나샬이 ‘쇠’의 재질과 이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차디찬 기운.
하지만 얼음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섬뜩함만을 전하는 느낌은 쇠의 느낌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쇄혼’ 특성을 사용했다.
츠으으으
오른손이 새빨갛게 변하며 쇄혼의 기운으로 뒤덮이던 순간,
파캉-!
나샬검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더니 한수혼의 온몸을 거미줄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조각들은 한수호의 온몸에 달라붙으며 두꺼운 막을 형성했다.
팔과 몸통, 다리까지 뒤덮는 금속의 조각들.
마치 풀 플레이트 갑옷을 닮은 나샬은 한수호의 몸을 휘감더니 마지막엔 얼굴까지 감싸며 투구를 만들어 냈다.
2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빛마저 빨아들이는 짙은 검은색의 갑주가 한수호의 온몸을 완전히 뒤덮은 것이다.
한수호는 흑색의 갑주에 둘러싸인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크게 감탄했다.
‘혼마흑갑보다 배 이상 강한 힘이 느껴져!’
혼마흑갑보다도 훨씬 짙은 흑색에, 조금의 광택조차 느껴지지 않는 투박함은 반타블랙을 연상케 했다.
한수호는 나샬을 온몸에 두른 채로 재생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검날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손가락 세 개 두께의 검신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던 한수호.
그의 눈에 한순간 크나큰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이럴 수가!’
검신에 비춰진 갑주는 하나의 형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바로 용의 형상.
투구도 그렇고, 몸통을 감싼 갑주까지 완벽하게 검은색 드래곤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용갑?’
이건 누가봐도 용의 형상을 딴, 용갑이었다.
한수호가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검신 속에서 검은 용갑이 비춰진 순간, 메디컬 게이트의 CEO 김명중에게 들었던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산이 첫번째 회귀를 하기 직전에 등장해 모두를 죽이고 끝내 인류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고 말았다는 용갑의 사내.
지금 한수호가 착용하고 있는 갑주가 바로 그 용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용갑을 더듬었다.
마치 용의 뿔처럼 양어깨 위로 솟아난 두 개의 원뿔 형태의 장식.
가슴팍에서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있는 용의 얼굴을 닮은 형상.
그리고 완벽하게 드래곤의 얼굴을 하고 있는 투구까지.
이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나샬이…. 용갑이었다니!’
이제야 이산과 김명중이 말하는 용갑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산과 김명중이 말한 용갑은 바로 나샬이었고, 나샬을 가진 자가 바로 살의 열쇠였던 것이다.
정말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사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나샬이 용갑이 맞다면, 이산이 첫 번째 회귀를 하기 전에 나샬을 소유했던 인류의 적은 대체 누구였던 걸까?
김명중이 말하길, 이산이 회귀하기 전의 시점에는 한수호를 비롯한 그의 가족 모두가 단 한 명도 살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한철영과 부인 이태희,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모두 2041년에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는 것.
따라서 이산이 목격한 용갑의 사내는 절대 한수호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수호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용갑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단 두 명뿐.
하나는 진무현이고, 다른 하나는 이대성의 가면을 쓴 이대현이었다.
‘하지만 진무현은 용갑 사내의 손에 죽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남은 건 이대현 하나다.
지금도 한수호가 없었다면 나샬을 손에 넣은 자는 이대현이 되었을 터.
그렇지만 이대현이 살의 열쇠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어색한 느낌이었다.
‘이토록 쉽게 죽일 수 있는 놈이 과연 살의 열쇠가 맞을까?’
적어도 이대현이 살의 열쇠이고, 용갑의 주인이 맞다면 지금처럼 쉽게 죽어서는 안 된다.
한수호가 자신이 지닌 능력의 절반도 꺼내지 않았는데도 이대현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가루로 변해 사라졌으니까.
‘이대현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나샬을 얻었던 거지?’
한수호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콰드득
갑자기 용갑이 한수호의 몸을 강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마치 몸에 딱 맞게 맞춰 주문한 양복이 쪼그라들며 몸을 압박하는 듯한 느낌.
한수호는 마나력을 끌어올려 용갑의 옥죄임에 대항했다.
우득. 쿠드득.
하지만 용갑의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광폭화 5단계로 두 배의 신체 능력을 패시브로 두르고 있는 한수호조차 용갑이 옥죄는 힘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다 큰일 나겠는데?’
한수호는 섬뜩함을 느꼈다.
오기로 용갑의 옥죄임을 버티려다간 온몸의 뼈가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용갑으로 전해지고 있던 마나의 힘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용갑이 벗겨지지가 않는다.
용갑으로 전해지던 마나력이 사라지면, 다시 나샬검으로 되돌아와야 정상.
하지만 용갑은 더욱 무서운 기세로 한수호의 몸을 우그러뜨리려고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용갑의 안쪽에서 한수호의 근육을 향해 수많은 바늘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젠장!’
한수호는 적잖이 당황했다.
억지로 벗으려고 해도 벗겨지지 않았고, 나샬검으로 되돌려지지도 않는다.
이대로는 바늘이 쑤시고 들어와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용갑이 오그라드는 힘에 살과 뼈가 정육점의 고기처럼 다져질 상황.
목숨마저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한수호는 쇄혼 특성을 사용한 상태에서 ‘근밀도강화법’까지 사용해 근육을 몇 배나 단단하게 만들었다.
터덩. 텅텅텅!
근육과 용갑이 팽팽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쇠보다도 단단해진 근육은 용갑의 바늘이 파고들지 못하게 막아냄과 동시에, 옥죄이는 힘을 오히려 밖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크으….”
한수호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까지 흘러나왔다.
그렇게 대치상 황이 시작된 지 몇 분이 지났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쇄혼과 근밀도강화법이 더해진 한수호의 몸을 더 이상 압박하지 못하게 되자 쥐어짜듯 우그러들던 용갑이 서서히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가 송곳니로 목을 꿰뚫지 못하고 포기하고 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확인해 주듯, 한수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샬의 주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기본 조건: 그 어떤 힘에도 굴하지 않고, 꿰뚫리지 않는 강인한 육체
>>나샬이 당신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합니다.
뜬금없이 떠오른 메시지.
그와 동시에 한수호를 압박하던 힘이 지워지듯 깨끗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한수호는 이제야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스의 신물이자, 나샬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용갑.
이 무기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나샬의 무지막지한 옥죄임과 피부를 꿰뚫는 바늘을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만약, 육체가 약해 나샬의 옥죄임을 버티지 못한다면?
결국 나샬의 우그러짐에 육체마저 쪼그라들어 한낱 고깃덩어리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샬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던 거로구나.’
한수호는 ‘쇄혼’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더불어 ‘근밀도강화법’까지 사용할 줄 알았기에 나샬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쇄혼이 없었다면.
쇄혼만 있고, 근밀도강화법을 몰랐다면.
아무리 한수호라도 나샬의 시험을 버티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이대현이 마지막 살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왜냐하면, 이대현에겐 쇄혼에 버금가는 육체 강화 특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한수호는 이대현과 전투를 하면서, 그가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거의 알아낼 수 있었다.
그가 육체 강화 특성을 꽁꽁 숨긴 채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전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와 유사한 특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이대현에게 육체 강화류의 특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이대현은 한수호가 이 자리에 없었다고 해도 나샬의 주인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는 말.
‘이대현도 아니고, 진무현도 아니면…. 대체 나샬의 원래 주인은 누구였다는 거지?’
한수호는 자신이 알게 된 정보를 토대로 그에 부합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한수호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이름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설마, 우태범?’
한수호는 살의 열쇠가 우태범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개 미궁이 원래 등장했어야 할 장소는 제주도 근처의 섬, 비양도.
만약 이 안개 미궁이 원래 2055년에 열린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열렸던 거라면?
누군가가 미궁의 열쇠를 얻어 이대현처럼 비양도에 일찌감치 던전을 열었고, 그곳에 가장 먼저 들어가 사툴란을 처치했다면 나샬을 얻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제주도라는 제한된 장소에서, 그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우태범이었다.
게다가 우태범에겐 ‘경질화’라는 육체강화류의 특성이 있었다.
‘내 쇄혼과 비교해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 특성이기도 하고.’
만약, 우태범이 경질화 특성을 가진 채, 비양도에서 던전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진입해 보스를 처리했던 거라면?
그러면 나샬의 주인은 우태범이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우태범이 나샬의 주인이고, 마지막 살의 열쇠다?’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왠지 지금의 우태범을 봐서는 절대 그럴 리 없을 것 같았다.
우태범은 독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여자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내였고, 동문 학생들의 생명을 가볍게 보지 않는 사내라는 것도 오늘 확인했다.
그런 우태범이 나샬을 얻고 나서 살의 열쇠로 돌변해 수많은 인명을 해쳤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산이 목격했다는 마지막 살의 열쇠이자 용갑의 주인이 우태범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우태범이 살의 열쇠가 맞는다면…. 이하윤은 왜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면서까지 우태범을 구하려 했던 거지?’
이산이 첫 번째로 회귀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한수호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살의 열쇠가 갑자기 등장해 김무성을 비롯한 활의 열쇠들을 대부분 살해했고, 마지막 활의 사내가 가까스로 그를 쓰러뜨렸을 때 엉뚱하게도 이하윤이 그를 회생 특성으로 되살려 버렸다는 정도가 그가 아는 전부였다.
어쨌든 대충 살의 열쇠가 누군지에 대한 윤곽은 거의 나왔다.
남은 건, 인류를 발자크의 손에서 구원해줄 마지막 살의 열쇠가 누구냐는 의문뿐.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다는 사내.
이제 그 사내의 정체만 알아낸다면 발자크의 부활을 막아낼 인물들이 덧없이 죽어가는 상황을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나스타샤를 만나는 것이 관건이겠어.’
네 명의 활의 열쇠.
그 중 권존 김무성과 이하이는 이미 만나봤고, 그들도 지금으로서는 네 번째 활의 열쇠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이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나스타샤뿐.
‘인천공항에서 발생할 폭탄 테러에서 그녀를 반드시 구해야 할 이유가 생겼군.’
이산의 첫 번째 회귀 전에도 그렇고, 한수호가 회귀한 시점에도 나스타샤는 인천 공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에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미래가 바뀌고 있는 상황이기에, 이번에도 죽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앞으로 3개월….’
한수호는 나스타샤의 입국일에 맞춰 발생하게 될 인천공항의 게이트에서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게끔 사전에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후….”
이제야 머릿속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
한수호는 자신의 몸을 휘감은 나샬을 벗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그 순간 검은 용갑이 벗겨지며 순식간에 짧은 단검으로 변해 손에 쥐어졌다.
나샬검은 착용구에 끼워 통째로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착잡한 표정으로 반경 50미터가 넘는 커다란 크레이터를 바라봤다.
살점 하나,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깨끗하게 지워진 이대현.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한수호를 내내 괴롭게 만들었던 이대현을 이렇게나 간단히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 깊숙한 곳에 담아왔던 복수의 꿈을 드디어 이루었지만, 기쁘거나 만족스럽다는 생각보다는 왠지 허무한 느낌이 더 크다.
‘결국은…. 내가 부족했기 때문에 당했던 거였어.’
여기서 다시 만난 이대현은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한수호 자신이 조금만 똑똑하게 굴고, 빈틈을 내보이지 않았다면 이대현의 손에 죽는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이었다.
‘너의 죽음을 시작으로 내가 직접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겠다!’
한수호는 이대현의 무덤이 된 크레이터를 바라보다가 힘찬 발걸음으로 미궁 밖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