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토너먼트는 이렇게 끝이 났다.
256명의 본선 진출 인원만 선발된 상태로 끝내 결승까지 치러지지 못했다.
본선 진출자 9명이 목숨을 잃은 터라 그들의 죽음을 방치한 채 토너먼트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
학생들에겐 4일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아카데미에서는 그 시간 안에 희생된 학생들의 장례를 치르고, 마공돔에 발생한 던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수호는 게이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컨테이너 하우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4일 동안 집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전투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안개 미궁에서 챙겨온 몬스터들의 심장을 꺼내 마나 추출기를 사용했다.
마나 추출기로 뽑아낸 마나력은 모두 범이와 살이의 마나코어에 주입했다.
월 녀석이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범이와 살이의 마나코어가 이제는 B급을 넘어 A급에 이르고 있어서 마나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마나를 채워주고 나니, 범이의 마나력은 900이 넘었고, 살이의 마나력은 880을 넘어섰다.
월은 이미 마나력 1,000을 넘은 상태라 굳이 따로 마나를 충전해줄 필요가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전투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공사는 어느덧 마무리 단계였다.
집은 완성된 지 오래였고, 수련장도 공사가 끝났다.
마무리 중이었던 진입차단벽은 마지막 부품이 갖춰지면서 거대한 돔 형태의 대공동이 되었다.
한수호가 누군가를 이 전투 영역으로 데리고 온다면 진입차단벽을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한수호는 4일 동안 수시로 전투 영역에 들어와 라그나로크를 연구했다.
이대현이 죽기 전에 언급했던, 라그나로크의 전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분석했다.
하지만, 라그나로크의 전설은 끝내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한수호는 전투 영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무려 10시간으로 늘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크게 만족해했다.
체질 개선 특성의 2단계까지 마친 뒤여서 그런지, 체류 시간이 세 배 이상이나 늘어났던 것.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전투 영역 안에서 시간에 큰 구애 없이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 혜택을 받은 건 바로 월이었다.
늘 전투 영역 안에 머물며 한수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월은, 체류 시간이 증가한 덕분에 한수호와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월이 한수호와의 시간을 기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한 가지 바람 때문.
콰앙!
빛이 번쩍하며 터진 폭음에 한수호의 몸이 20여 미터나 튕겨 나갔다.
바닥에 두 줄기 골을 파내며 주르륵 밀려난 한수호는 엑스자로 막고 있던 팔을 풀어내며 혀를 내둘렀다.
“어우야…. 이거 진심이 담긴 펀치인 거 같은데?”
월의 주먹에 맞은 팔뚝 부위에서 하얀 연기가 푸시식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내 파동권을 맨몸으로 막아내는 주인이니 진심을 담아도 괜찮다.”
월이 눈에 히죽 웃는 아이콘을 띄우며 한 말에 한수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파동권에 뇌격, 거기다 이젠 내 충파를 베껴서 관통 기술까지 만들어 내다니. 뭘 더 훔쳐 갈까 무서워서 특성도 못 쓰겠네.”
“월이야 말로 묻고 싶다. 특성 하나도 각성하지 못해서 일반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주인은 어떻게 그리 많은 특성을 지닌 건가?”
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한수호가 가슴 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 즉시, 한수호의 몸 주변으로 검은빛을 띤 혼마흑갑의 조각들이 홀연히 떠올랐다.
“영업 비밀.”
한수호가 말을 마친 그 순간,
휘류류류류륭
조각 조각 흩어져 있던 혼마흑갑의 조각들이 한수호 쪽으로 날아들었고, 1초도 되지 않아 그의 몸을 검은 갑주로 완벽하게 둘러쌌다.
이제는 ‘흑기사’라고 부르지 않고,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혼마흑갑을 아공간에서 불러낼 수가 있었다.
혼마흑갑을 온몸에 착용한 한수호를 본 월이 눈에 불꽃 모양의 아이콘을 생성시켰다.
“오늘은 꼭 그 갑주에 흠집을 내고 말겠다!”
월은 혼마흑갑이 정말 싫었다.
안 그래도 한수호의 방어력이 너무 엄청나서 맨몸으로도 상처하나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이 흑갑을 걸치면 작은 흠집조차 낼 수 없게 된다.
월이 지닌 모든 기술과 최대 출력을 사용한다 해도, 흑갑의 방어력은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간의 설욕을 갚기 위해 흑갑의 약점을 분석한 결과, 아주 미세한 틈을 발견해 낼 수 있었으니까.
한수호도 월이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하자 그에 맞춰 방어에 전념하기로 했다.
“와라, 윌!”
좀 전처럼 얼굴과 몸통을 팔뚝으로 가린 채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숙이자 한수호는 하나의 단단한 쇳덩이가 되었다.
그 어디에도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는 매끈한 형태의 갑주, 혼마흑갑.
“이번 공격도 막아낸다면 주인의 승리다!”
월이 평범한 장검 하나를 뽑아 들며, 작은 몸집으로 한 발 크게 내딛는 순간이었다.
츄아아아아악
미끄러지듯 잔상을 흘리며 수십 미터를 쭉 뻗어 나간 월.
월의 몸이 한순간 열두 개로 쪼개지는 듯하더니 한수호의 사방을 포위했다.
그리고, 한수호를 향해 각기 다른 자세로 검을 휘둘렀다.
파라라라랑
콰과과과각
타당. 따다다다당!
섬전과 같은 접근.
실체와 다름없는 12개의 분신.
그리고 그 분신들이 펼쳐내는 제각각의 검술.
한수호는 그 모든 공격을 웅크린 자세로 모두 받아냈다.
검과 흑갑이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지만 어느 하나 흑갑의 방어력을 꿰뚫지 못했다.
이번에도 월의 패배로 끝나나 싶은 그때,
카가각!
12개의 검 중에서 세 개가 흑갑의 관절 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
순간, 한수호는 깜짝 놀랐다.
그 어디에도 틈이 없을 거라 자신했는데, 월이 기어코 틈을 찾아내 검을 밀어 넣었다.
이대로 둔다면 검이 틈을 완벽하게 파고들어 피부에까지 닿을 상황.
마나를 압축시켜 살짝만 뿜어내도 월의 검은 얼마든지 튕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상태에서 나샬검을 소환해 용갑으로 변형시키면 어떻게 될까?’
정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용갑은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부담을 주고, 마나까지 빠르게 잡아먹지만, 만약 혼마흑갑을 착용한 상태에서 용갑을 불러내면 결과가 달라질 것 같았다.
한수호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뭐에 홀린 듯 인벤토리에서 나샬검을 꺼내 쥐었다.
쿠오오오오
새까만 반타블랙의 단검이 사방으로 검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월의 눈에 찡그린 이모티콘이 나타났다.
“무기를 꺼내는 건 반칙이다, 주인!”
“무기로 안 쓸 거니까 걱정 마셔. 뭐 좀 시험해 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월을 이해시킨 한수호는 곧바로 쇄혼 특성을 발동시켰다.
콰드드드드드득
쇄혼의 힘이 전해지자마자 나샬검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지며 혼마흑갑을 뒤덮었다.
그로 인해 월은 공격을 거두어들이며 뒤로 튕겨지듯 물러나야 했다.
한수호는 자신의 몸에서 약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로 허공에 떠 있는 용갑의 조각들을 둘러봤다.
‘뭔가 다른데?’
평소라면 수천 조각으로 쪼개진 용갑이 몸에 달라붙으며 용의 형상을 한 갑주로 변형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혼마흑갑 쪽으로 촉수 같은 것을 뻗어내 마치 갑주를 뜯어내려는 듯 끌어당기고 있었다.
‘억지로 흑갑을 떼어내려는 건가?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한수호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용갑의 조각들이 흑갑을 잡아당기는 힘은 막강했다.
한수호는 그 힘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 때,
콰직
어깨 쪽 흑갑이 뜯겨 나가더니,
우직. 쿠드득.
가슴 부위, 팔뚝 부위, 다리 부위 등 모든 흑갑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흑갑의 조각들이 용갑의 조각에 먹혀버렸다.
마치 두 개의 찰흙이 들러붙듯 하나로 뭉쳐졌고, 수천의 갑주 조각은 형태를 변형하여 기다란 채찍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촤라라라라라랑
뾰족하고 날카로운 조각들이 줄줄이 이어 붙여 만들어진 그건 채찍이 아니라 검이었다.
한수호의 손에 쥐어진 손잡이 부분을 제외하고도 길이가 무려 3미터나 되는 짙은 흑색의 기다란 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검의 모습에 한수호가 당황해 있을 때,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검이 간격을 넓히며 더욱 길게 늘어졌다.
아예 바닥에 늘어진 검 조각들이 뱀처럼 꾸물거리며 10미터 밖으로 물러서 있던 월을 향해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어?”
한수호는 제멋대로 공격을 가하려는 기다란 검에 마나를 확 밀어 넣었다. 순간,
촤르르르르르륵
월의 이마를 향해 뛰어오르던 검의 조각들이 한순간에 확 결합되며 다시 3미터짜리 검으로 변했다.
한수호는 틈 하나 없이 밀착된 모습으로 꼿꼿하게 선 검을 바라보다가 마나를 끊어봤다. 그러자,
촤라라라라랑
다시 검 조각들이 간격을 넓히더니 바닥으로 늘어졌다. 그리고 좀 전처럼 또다시 월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이게 대체 뭐야?”
한수호는 다시 마나를 밀어 넣어 검의 형태로 되돌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개조 특성을 이용해 검의 정보를 스캔한 한수호.
그의 눈앞으로 놀라운 정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가드]
-라그나로크의 가드 파트, ‘나’가 깨어납니다.
-유사한 등급의 가드형 오파츠를 흡수시켜야 발동합니다.
-스스로 주인을 보호하며, 강력한 방어력과 빠른 속도를 겸비합니다.
-‘나’를 깨운 자에게 큰 보상이 주어집니다.
정보는 한수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라뮬, 그랑, 나샬, 로크로 이루어진 라그나로크.
그 라그나로크의 전설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샬이 가드 파트를 맡고 있으며, ‘나’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라뮬, 그랑, 로크도 특정 파트를 맡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뱀처럼 길고 날카로운 조각들로 이루어진 ‘나’는 주인의 마나력이 끊어지면 스스로 움직여 주인을 보호하는 기능까지 지녔다.
한수호가 반쯤 입을 벌린 채로 ‘나’의 정보를 살피고 있을 때, 또 다른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라그나로크의 가드 ‘나’가 자신을 잠에서 깨워준 보답으로 큰 보상을 주고자 합니다.
>>다음 중, 원하는 항목을 하나만 선택하세요.
- 방어형 특성(궁급)
- 500NP
- 3,000,000LP
- 마나력 1,500
- 내성 30% 증가
- 초월자 수치 5 증가
- 방어력 50% 증가 아티팩트
메시지를 본 한수호는 기가 막혔다.
그저 혼마흑갑을 착용한 상태로 나샬의 용갑을 불러냈을 뿐인데, 용갑이 흑갑을 먹고 ‘나’로 진화해 버렸다.
거기다 이 엄청난 보상은 또 뭐란 말인가?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잖아?’
보상으로 등장한 항목 하나하나가 실로 엄청난 것들뿐이다.
굳이 우선 순위에서 빼버린다면 방어형 특성과 아티팩트 정도.
다른 보상들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보상이었다.
‘NP랑 LP도 놓치기 싫지만 마나력이나 내성은 더 구미가 당기는데?’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초월자 수치라는 건, 아마도 정신이나 면역, 감지, 초감각 항목을 말하는 걸로 보였다.
‘초월자 수치 5라….’
이건 쉽게 얻을 수조차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귀중했다.
‘NP나 LP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채울 수 있어. 마나력은 용의 박동을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늘릴 수 있고. 내성도 약탈을 사용하면 늘릴 수 있지.’
한수호는 빠르게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것을 따져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을 보상으로 얻을지 결정했다.
‘초월자 수치 5로 가자!’
마음의 결정을 내린 한수호는 곧바로 보상 항목을 선택했다.
>>초월자 수치 5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탯을 분배하세요.
또렷한 글자들이 눈앞에 새겨지며 한수호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내어놓았다.
‘정신 수치는 라라가 있으니 됐고, 면역은 내성과 겹치는 면이 있으니까 이것도 패스. 그럼 감지하고 초감각만 남는데…. 좋아! 감지 2에 초감각 3이다!’
한수호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스탯을 분배시켰다.
[정신+17][감지+13][면역+11][초감각+13]
감지와 초감각이 늘어난 것을 확인한 순간, 한수호는 온몸으로 퍼지는 시원한 감각에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오른 기분인데?’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머리는 맑고 깨끗했으며, 호흡을 통해 스며드는 공기는 찬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시원했다.
한수호는 자신의 초월자적인 능력이 크게 증가했다는 걸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증가한 수치는 감지 2, 초감각 3이었지만 그 작은 숫자가 가져온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세상이 달라 보여.’
감지 능력으로는 수십 미터가 넘는 거리의 작은 공기의 흐름까지 알아낼 수 있었고,
초감각은 10분의 1로 느려진 세상 속을 홀로 나비처럼 거닐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과연 5라는 수치의 효과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엄청난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