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초월자 수치 5를 얻기 전과 너무도 크게 달라진 자신의 능력을 천천히 음미하던 한수호.
길게 심호흡을 한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나샬의 진화체인 ‘나’의 가드를 나샬검으로 되돌렸다.
곧바로 검을 인벤토리에 넣어버린 뒤, 이번엔 라뮬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월에게 한마디 했다.
“월. 아무래도 오늘 대결은 여기에서 끝내야겠는데?”
“알았다. 내가 봐도 지금 주인은 뭔가 대단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으니 귀찮게 굴지 않겠다.”
월은 한수호가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조용히 진입차단벽에서 물러났다.
홀로 남게된 한수호는 화염의 기운을 피워내는 라뮬검을 꽉 거머쥐었다.
‘나샬이 진화했다면 라뮬도 진화할 수 있다는 말이야!’
한수호는 라뮬을 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검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나’의 가드는 나샬의 진화체.
나샬은 용갑의 모습에서 혼마흑갑을 흡수하여 진화체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라뮬은 무엇을 먹고 진화할 수 있는 걸까?
‘라뮬은 집념의 검이며, 불의 창으로 변신할 수 있지. 그렇다면 불이나 창과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고.’
한수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라뮬과 속성이 일치하는 것이 있는지 살펴봤다.
하지만 딱히 관련이 있어 보이는 물건, 혹은 아티팩트가 눈에 띄지 않았다.
유엽비도는 단검이며, 별다른 특성을 가지지 못한 무기였고.
금괴는 아티팩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나 추출기 역시 별다른 연관성이 없었으니 혼마흑갑처럼 특별한 오파츠라고 볼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마나력 배터리 코아와 연관이 있으려나?’
억지를 살짝 섞는다면 마나력 배터리 코어가 불의 속성에 어울릴 법했다.
혹시나 싶어 라뮬검에 불의 속성을 주입하여 창의 형태로 만들어 봤지만, 그 근처에 마나력 배터리 코어를 가져다 대 봤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한수호.
그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염마갑의 코어?’
7대 마화기 중 하나인 염마갑.
그 염마갑의 핵심 요소인 염마갑의 코어라면 확실히 불의 속성에 어울린다.
코어의 설명에도 ‘불 내성이 약한 자가 사용할 경우, 신체가 용해될 수 있으니 사용을 금합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쓰여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염마갑의 코어를 라뮬의 먹이로 던져주기엔, 너무 손해가 컸다.
염마갑만 찾는다면 코어를 끼워 용마검에 버금가는 엄청난 무기로 탈바꿈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염마갑을 찾을 수 있을지 요원한 문제이긴 하지.’
염마갑은 10년 전, 어머니 이태희가 몸에 지닌 채로 실종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
차라리 남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라뮬의 먹이로 삼아버린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득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해보자. 내게 용마검이 있는 이상, 또 다른 마화기를 욕심낼 필요는 없어.’
마음에 결정을 내린 한수호.
그는 인벤토리에서 착용구를 소환시켜서 몸에 착용시켰다.
그리고 염마갑의 코어를 담아 둔 착용구의 외피 주머니를 열었다.
새끼손톱 크기의 작은 코어 하나.
한수호는 코어를 왼손에 쥔 상태에서 라뮬검을 오른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라뮬검을 불꽃의 창으로 변화시켰다.
화르르르륵
라뮬검이 기다란 불꽃 창으로 변신하자 진입차단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동이 붉은 화염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보통은 창의 끝에서 일직선으로만 뿜어지던 불꽃이, 지금은 방향을 틀어 염마갑의 코어 쪽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붉을 화염이 코어를 향해 꿈틀거린다.
한수호는 코어를 불꽃의 창 쪽으로 가져다 댔다.
코어가 가까워지자 불꽃의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고, 마침내 코어에 닿았다. 순간,
스루르르르릅
뱀의 혀를 똑 닮은 불꽃이 코어를 휘감아 눈 깜짝할 사이에 삼켜버렸다.
코어는 불꽃에 먹혀 한수호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불꽃의 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콰직-!
창은 나샬이 그랬듯 수천 조각으로 찢겨져 허공으로 떠올랐다.
염마갑의 코어를 가운데에 두고, 마치 핵을 둘러싼 지구의 대지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 때,
후우우우웅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라뮬의 조각들이 코어로 달려들어 하나로 합쳐졌고, 동시에 눈부신 빛이 사방을 환하게 비췄다.
파아아아아아앗-
한수호는 그 빛에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한수호의 눈앞에서는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라뮬도 진화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굉장히 특이했다.
커다란 포크 모양의 검이라고 할까?
단 두 개의 날만 가진 포크처럼 생긴 검.
온통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가운데가 뻥 뚫린 두 개의 날을 가진 희한한 모습의 검이었다.
[‘라’의 블레이드]
-라그나로크의 블레이드 파트, ‘라’가 깨어납니다.
-유사한 등급의 불 속성의 오파츠를 흡수시켜야 발동합니다.
-주인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로운 공격으로 섬전처럼 파고듭니다.
-‘라’를 깨운 자에게 큰 보상이 주어집니다.
라의 블레이드를 쥐고 개조 특성으로 정보를 스캔한 결과였다.
‘나’의 가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설명.
라뮬의 이름이 ‘라’이고, 나샬의 이름이 ‘나’였으니 그랑과 로크의 진화 후 이름 또한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라뮬의 진화에도 보상이 나오는가 본데?’
한수호는 ‘나’의 가드를 얻었을 때 등장했던 메시지를 떠올리며 잔뜩 기대에 찬 얼굴이 되었다.
그때, 당연한 수순인 듯 메시지가 스르륵 떠올랐다.
>>라그나로크의 블레이드 ‘라’가 자신을 잠에서 깨워준 보답으로 큰 보상을 주고자 합니다.
>>다음 중, 원하는 항목을 하나만 선택하세요.
- 방어형 특성(궁급)
- 500NP
- 3,000,000LP
- 마나력 1,500
- 내성 30% 증가
- 방어력 50% 증가 아티팩트
보상 내용이 거의 동일했다.
다만, ‘나’의 가드를 얻으면서 선택했던 보상만은 빠져 있었다.
‘보상을 선택할 때마다 줄어드는 방식이구나.’
보상이 나오고, 그걸 얻는 방식을 바로 이해한 한수호.
그는 이번엔 어떤 보상을 택할지 빠르게 고민했다.
‘이번엔 LP로 가자.’
현재 한수호가 지닌 LP는 약 240만.
여기서 3백만이 추가되면 5백만이 넘게 된다.
그럼 한수호에겐 여러 가지 선택지가 생기게 된다.
광폭화 특성을 6단계로 높인다거나, 개조 특성을 최종 단계로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건, 체질 개선을 3단계로 올릴 수 있다는 거고.’
비록 체질 개선 3단계를 실행하기 위해선 아직 90일 이상이나 더 기다려야 했지만, 미리 최종 단계로 업그레이드해 놓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LP가 많으면 내 선택의 폭도 그만큼 늘어나는 거니까.’
한수호의 선택은 LP였다.
>>3,000,000LP를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포인트: 390NP / 5,485,000LP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수치.
한수호는 곧바로 특성 업그레이드를 진행할까 하다가 ‘라’의 블레이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검 모양이 꼭 조립식 프라모델 같잖아?’
‘라’의 블레이드는 중간에 길쭉한 뭔가를 끼우면 달칵하고 끼워질 것만 같은 형태였다.
검의 가드 부분이나 손잡이 부분이 너무 부실하다는 점만 빼면, 양손 대검의 일부분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들도 비슷하네?’
‘나’의 가드와 ‘라’의 블레이드.
여기서 그립이나 폼멜, 엣지 같은 명칭이 더 나온다면 하나의 검을 이루는 구성품이 다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이, 설마….’
한수호는 자기가 생각하고도 우스운지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곧바로 ‘라’의 블레이드를 라뮬검으로 되돌린 한수호는 착용구에 꽂아 넣은 뒤, 마지막으로 로크를 꺼내 들었다.
이제 라그나로크의 네 가지 검이 각각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다 예상이 되었기에, 나샬을 진화시킬 만한 오파츠가 없다는 걸 잘 바로 알아챘다.
‘나샬은 없지만, 로크는 있지.’
한수호가 생각하는 로크의 속성은 당연히 번개.
로크를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번개의 속성을 지닌 오파츠가 필요했고, 그에 적당한 무기가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재생의 검’이었다.
고맙게도 이대현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재생의 검이 번개의 속성과 유사한 면이 있었고, 그 검이면 로크를 진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수호는 재생의 검을 왼손에 쥐고, 로크를 오른손에 쥐었다.
‘해보자!’
한수호가 오른손에 벽력권을 끌어올린 순간,
빠지지지직-
로크가 스스로 뇌전을 뿜어냄과 동시에 은빛의 건틀릿으로 모습을 변형시켰다.
한수호는 오른손을 휘감은 건틀릿으로 재생의 검을 거머쥐었다.
‘검이 지닌 특수능력이 좀 아깝긴 해도, 로크를 진화시킬 수 있다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어!’
한수호는 검을 쥔 손에 더욱 강력한 벽력권을 끌어올렸다.
꽈지지지지직
재생의 검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건틀릿은 마치 쇠를 찢어버리는 분쇄기처럼 재생의 검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건틀릿이 쥐고 있는 검날부터 시작해, 검 전체를 순식간에 분쇄해 버렸다.
가루처럼 부서진 검은 빨려들 듯 건틀릿 속으로 사라졌고, 검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지이이이잉
건틀릿이 진동을 일으키며 흰색과 상아색으로 수차례 색을 변화시켰다.
뭔가 변화가 생길 듯하면서도 쉽게 모습을 바꾸지 않는 건틀릿.
약 3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끝내 로크는 모습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제길.’
실패였다.
매번 진화가 성공하는 것이 아닌지, 로크는 재생의 검이라는 엄청난 오파츠를 잡아먹고도 변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검을 흡수한 건틀릿에 갑자기 정보가 나타났다.
[‘로크’의 코어]
-라그나로크의 코어 파트, ‘로크’가 준동합니다.
-유사한 등급의 불 속성의 오파츠를 하나 더 흡수해야 발동이 가능합니다.
정보를 본 한수호는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하. 그래도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오파츠를 두 개나 흡수해야 한다 이거로구만?’
로크의 경우엔 재생의 검 하나로는 코어를 발동시킬 수 없다는 말이었다.
재생의 검도 보통 물건이 아닌데, 어디서 또 비슷한 등급의 무기를 구할 수 있을까?
딱하고 생각나는 건, 5대 혼마기였다.
혼마청검.
혼마백도.
혼마귀부.
혼마적창.
혼마흑갑.
이 중, 청검은 물 속성이니 그랑검의 진화에 가장 어울리는 오파츠였다.
반면 백도는 불이요, 귀부는 쇠의 속성이라 딱히 먹이로 쓸 수 없었다.
‘혼마적창이 뇌 속성이라고 했던가?’
한수호는 이하이에게 들었던 혼마기에 대한 설명을 떠올렸다.
하지만 혼마적창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후….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로구나.’
더 이상은 라그나로크의 전설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한수호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집중해서인지 한 것도 없이 진이 빠지는 느낌.
그런 이유로 5백만이 넘는 포인트가 쌓여 있었음에도 특성을 업그레이드하는 일 또한 당장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개조와 광폭화의 단계를 올리는 데만도 각각 5백만의 포인트가 필요했고, 체질 개선의 마지막 단계에도 3백만이 필요했다.
대충 1천 5백만 포인트 정도가 있으면 한꺼번에 여러 특성의 단계를 올릴 수 있었다.
너무 어렵게 포인트를 쌓아서 그런지 굳이 하나씩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모아놨다가 한 번에 확 업그레이드 해버리자.’
더 이상은 정신력을 소모하면서까지 깊은 생각에 잠겨있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상대로 시원하게 주먹질을 하고 싶은 기분.
전투 영역에 잔류할 수 있는 시간을 봤더니 아직 4시간이나 남아 있다.
‘이 정도 시간이면 한판 놀아보기엔 충분하지.’
한수호는 손으로 코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크게 소리쳤다.
“월! 다 데리고 여기로 튀어와라!”
그의 외침은 진입차단벽을 넘어 수련장 근처에서 쉬고 있던 월의 귀에까지 닿았다.
월은 야외용 간이침대에 누워 범이와 살이가 사자의 모습이 된 고니와 함께 엎치락뒤치락 하는 걸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동작 그만! 지금 즉시, 날 따라 움직인다.”
월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월은 한수호의 음성만 듣고도 그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를 단번에 눈치챘다.
힘이 바짝 들어간 상태로 흥분한 듯 조금 들뜬 음성에는 전투의 의지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월 선배. 드디어 주인이 우리와도 놀아주는 겁니까?]
범이가 눈에 물음표를 네 개나 띄우며 눈으로 묻자, 월이 범이의 목 위에 훌쩍 올라타고는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주인이 놀아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놀아주는 거다.”
[아. 그러하군요. 그럼 당장 놀아드리러 가야지요!]
범이가 신이나서 눈으로 한 말에 옆에 있던 살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오늘은 주인 얼굴 딱 한 대만 때렸으면 좋겠습니다.]
살이가 무섭게 생긴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며 부르르 몸을 떨자, 고니가 기다란 꼬리로 살이의 면상을 파리 잡듯 빡 후려쳤다.
크르릉.
눈매를 찌푸린 고니는 마치 ‘감히 네가?’라고 따져 묻는 듯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