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
백진성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가 누구였던가.
정의국 최고 권력자인 국장이자 광양백가의 가주였으며, 황도 13궁 쌍어궁의 궁주이기도 했다.
사왕 정도면 모를까, 오패 수준의 강자 정도는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 실력자인데 고작 19살짜리 학생을 상대로 뒤를 잡히고 말았다.
백진성은 놀란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는 벼락같이 몸을 휘돌렸다.
동시에 한수호의 얼굴을 향해 짧고 강한 일권을 내질렀다.
그건 마치 권투선수가 상대를 향해 크로스 카운터를 날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백보염왕권.
백진성이 지닌 대표적인 특성이었다.
가볍게 뻗어내는 주먹이지만, 그 주먹에 담긴 위력은 벽을 뚫고 바위를 부술 정도였다.
백보 안에 있는 목표라면 그 무엇도 이 주먹을 쉽게 막아낼 수 없었다.
막아내려 들면 빈틈을 찾아 파고들고, 피하려 들면 끝까지 쫓아가 기필코 격살시키고 만다.
지금의 광양백가를 있을 수 있게 만든 특성이 바로 이 백보염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꽈아아아앙!
백진성의 주먹이 단단한 뭔가에 막혔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혀 중간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건 한수호가 펼친 염동파쇄기였다.
염력과 흡사한 위력을 보이는 김무성만의 특별한 기술.
김무성의 제자인 최지혁도 보기만 했을 분, 흉내는 낼 수 없었던 염동파쇄기가 한수호의 손에서 펼쳐져 백진성의 백보염왕권을 가볍게 막아낸 것이다.
백진성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껏 이 권을 피한 사람은 봤어도,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손조차 움직이지 않고 막아낸 사람은 한수호가 처음이었다.
뻗어낸 주먹이 분노에 부들거릴 때, 한수호의 주먹이 천천히 뻗어 나왔다.
“국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학생을 왜 이리 미워하실까?”
한수호는 마나압축법을 사용해 주먹 앞에 빛의 구체를 뭉치기 시작했다.
이에 백진성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는지 더욱 강한 마나를 끌어올려 주먹에 실었다.
“장태산! 오늘 넌 여길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작게 중얼거리던 백진성이 7할에 이르는 마나력을 담아 주먹을 힘껏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기운이 번쩍했다가 사라졌다.
그 기운이 너무도 엄청났기에 백진성도, 한수호도 서로를 향한 공격을 멈추고 그 방향으로 시선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탑처럼 꼿꼿하게 선 거구의 사내가 휘두른 검이 괴물이 된 유재형의 목을 빠르게 베고 지나가는 장면을.
푸하아악!
검에 잘린 머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눈 깜작할 사이에 벌어진 상황에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7미터를 훌쩍 넘는 유재형의 거구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쿠웅
잘려진 목에서 뿜어지는 핏물은 순식간에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유대룡은 허공으로 튀어 올랐던 유재형의 머리를 손으로 받아들었다.
처연한 눈빛으로 흉측한 괴물이 되어버린 유재형의 머리를 바라보는 유대룡.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장한설과 양소혜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재형이 몬스터로 변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런 유재형을 아버지이니 유대룡이 직접 처치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유대룡을 바라본 한수호.
그는 유대룡이 왜 이런 조치를 취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파괴본능이 일깨워지면 두 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구진철에게서 빼앗은 아티팩트의 정보에 나타난 설명문.
이는 한번 몬스터로 변하게 되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 유대룡은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목숨을 취한 것이다.
유대룡은 그런 사내였다.
한수호가 회귀 전에도,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그르치는 일을 단 한 번도 행한 적이 없을 정도로 차가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안다.
유대룡이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감정이 메마른 인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감정을 배제하려 애쓰는 인물이었다.
그가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특무부를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늘 냉정하고 차갑게 행동하는 것이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저런 미친놈이!”
유대룡이 아들의 목을 베어버리자 백진성이 크게 놀라워했다.
설마 유대룡이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여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지금의 상황에 당황하고 만 것.
한수호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백진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의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이제 그만 가면을 벗으시죠.”
“무슨 헛소리냐? 네놈이 갑자기 내 보좌관을 공격하는 걸로 보아, 오늘 일어난 일의 원흉 또한 네놈이 분명할 터. 너야말로 그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고, 뱀파이어로서의 본질을 내보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백진성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한수호가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대놓고 밝혀버렸다.
“내가 뱀파이어라…. 그럼 이 아티팩트에 반응하고 있는 백윤후는 뱀파이어 로드쯤 되나 봅니나?”
“닥쳐! 유재형이 저런 괴물이 된 것 또한 네놈의 짓임이 분명하다! 난 오래전부터 네놈의 정체를 밝히려고 노력해 왔고, 오늘 이 자리에서 네 놈의 진실된 모습을 끄집어내고 말 것이다!”
백진성은 유대룡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까 봐 한수호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 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유대룡은 아들의 머리를 손에 든 채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한수호는 그런 백진성을 향해 ‘셀 부스터’를 내보였다.
“이걸로 유재형을 자극해 몬스터로 변이시켰다는 사실을 부인할 셈입니까?”
“미친놈. 네놈은 내 아들도 그 물건에 반응하고 있다는 걸 보고도 그따위 소릴 지껄이는 것이냐!”
백진성은 아직도 고통에 가득찬 얼굴로 몸부림치는 백윤후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한수호는 백진성의 말에 코웃음을 쳤으나 속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진성은 정말로 백윤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표정, 눈빛, 음성 모든 것을 감안해 봐도 이건 거짓된 연기가 아니었다.
백윤후가 왜 셀 부스터에 반응하여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는 모습은 단언컨대 거짓이 아니었다.
만약 백진성이 어느 시점에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이라면, 절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제삼의 인물이 백진성을 흉내 내는 게 아니야.’
처음엔 황도 13궁의 고위급 인물이 진짜 백진성을 몰래 해치우고, 그의 겉모습을 가로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진성을 보면 그건 절대 아니다.
누군가가 백진성의 모습을 가로챈 것이 아니라면?
그럼 원래부터 백진성은 황도 13궁의 인물이었고, 한수호의 부모님과 절친이었던 시절부터 이미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오중헌을 이용해 나와 내 가족을 없애라고 명령한 것 역시 당신이었나!’
한수호의 머릿속에 처참히 죽어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을 쫓아 어떡하든 죽여버리려고 했던 가면인 오중헌.
그 오중헌을 오랜 옛날부터 수하로 거느리고 있었던 백진성.
그리고 이젠, 유재형에게 특수세포를 주입하여 몬스터로 변이시켜 유대룡의 손에 죽게끔 만든 자.
모든 것이 백진성의 손아귀에서 벌어진 것임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프리트의 수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도 백진성일지 모른다.
손에 미소마궁이라는 마화기를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을 만한 상황.
이 자를 없앤다면 미래에 발생할 인류를 향한 위협이 어느 정도는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수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곳에선 보는 눈이 많으니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백진성을 끌고 가 생사의 결착을 보는 것이 맞으리라.
터엉
한수호가 바닥을 박차며 백진성을 향해 쇄도했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폭발을 일으킨 순간, 한수호는 이미 백진성의 측면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모든 걸 끝낼 시간입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은 한수호는 어느새 백진성의 어깨에 손을 얹은 상태였다.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바로 옆에 있던 구진철이 한수호의 얼굴을 향해 커다란 도를 뽑아 휘둘렀고, 한수호는 그 도를 맨손으로 막아냈다.
쇄혼을 두른 한수호의 손은 강철보다도 단단했기에,
까앙-
손과 도의 부딪침에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순간,
팟!
한수호를 비롯해 백진성과 구진철이 모두가 보고 있는 눈앞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 * *
‘더는 버틸 수가 없…!’
백윤후가 모든 걸 포기하고 불타오르기 시작한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기려는 순간, 한수호와 백진성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를 기점으로 백윤후를 괴롭히던 초음파 또한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들끓어 오르던 흉성은 빠르게 가라앉았고, 백윤후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려던 본체 또한 다시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갔다.
‘후…. 한 끗 차이였나?’
조금만 늦었어도 백윤후는 도플갱어로서의 본질을 모두의 앞에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흉성을 억누르느라 맥이 빠진 백윤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괘, 괜찮아, 백윤후?”
신소이가 다가서며 걱정스럽게 묻자, 백윤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넌, 내가 안 무섭냐? 유재형처럼 괴물이 될까 봐 걱정도 안 되냐?”
백윤후는 다소 황당하다는 말투였다.
백윤후가 유재형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걸 모두가 목격했을 텐데, 신소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너, 넌 변하지 않았잖아. 유재형은 미지의 힘에 굴복한 거고, 넌 굴복하지 않은 건데 내가 왜 무서워해야 해?”
“나…. 방금 전까지 굴복하기 직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굴복하지 않았으니 된 거지.”
신소이는 음침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살짝 거두어 올리며 빙그레 웃음을 그렸다.
“하…. 너도 참 대단하다.”
백윤후는 신소이를 향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 저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장한설과 양소혜, 최지혁 등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에겐 더 이상 팀을 나눠 대결할 이유가 없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라니? 유재형 선배가 괴물로 변하고, 그런 선배를 본부장님이 직접….”
양소혜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저 멀리 보이고 있는 유대룡은 아들의 머리통을 든 채로 너무도 슬픈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백윤후. 좀 전에 넌 왜 그런 거냐? 너도 유재형 선배처럼 병이라도 있는 거야?”
장한설은 유재형이 괴물로 변한 현상을 병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도 안다.
유재형을 괴물로 변하게 만든 것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누군가의 실험에 의한 끔찍한 결과라는 사실을.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너무도 끔찍한 초음파가 날 공격했고, 그 공격에 내 몸이 이상한 반응을 일으켰다는 건 확실해.”
백윤후는 은근슬쩍 자신이 유재형과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 본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임을 어필했다.
그 말은 모두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태산이가 한 말대로라면, 구진철 보좌관이 너와 유재형 선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 같아.”
최지혁이 한수호의 말을 종합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윤후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실험에 네 아버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양소혜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백윤후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사실 얼마 전부터 구 보좌관님이 아버지의 지시라면서 나한테 알 수 없는 약물을 먹이긴 했다. 어쩌면 유재형 선배도 그 약물을 먹고 저런 꼴이 된 것일지도….”
백윤후가 담담히 몇 마디를 한 순간, 멍하니 있던 유대룡이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훅 날아들었다.
그는 백윤후의 코앞에 나타나 그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구진철이 먹인 약물은 어떤 형태지?”
유대룡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백윤후가 먹었다는 약물의 정체는 너무도 중요했다.
방금 전, 유대룡은 괴물로 변한 유재형에게 심연의 눈 특성을 사용했고, 그 결과 아들이 두 번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확인했다.
이대로 둔다면 유재형은 특무부나 대한맹의 요원에게 사로잡혀 실험체가 되거나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겉보기엔 아들에게 냉담했지만, 이면에 담긴 진심은 다른 부모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유대룡.
차마 다른 사람의 손에 아들이 죽는 걸 볼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유재형의 목을 자르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보랏빛에 하얀 구슬들이 담긴 액체였습니다.”
백윤후는 얼떨결에 되는대로 말을 지껄였다.
실제로는 그런 액체를 먹은 적도 없지만, 여기서 모른다고 한다면 유대룡의 손에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아 거짓말을 한 것.
다행히 유대룡은 백윤후의 말을 믿는 듯했다.
“…. 백진성이 자신의 아들한테까지 끔찍한 짓을 저질렀구나.”
유대룡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옷을 찢어 아들 유재형의 머리를 감쌌다.
그때 강우진이 달려와 백윤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장태산은 어디로 간 거지? 백 국장님은? 구 보좌관까지 전부 어디로 데려간 거냐고!”
강우진은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이번 일의 원흉을 찾아 이유를 따지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백윤후도 한수호가 그들을 데리고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저도 모릅니다. 다만….”
“다만, 뭐?”
“적어도 주변 1킬로미터 내에는 없다는 걸 확신할 수는 있지요.”
백윤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생명코어가 한수호의 가슴에 박혀 있는 이상, 그가 1킬로미터 내에 위치한다면 정확히 장소를 특정해 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범위 내에서는 한수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거냐?”
“지금은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백윤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