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상황은 모두 정리됐다.
한수호가 백진성의 손가락과 쌍어금검, 그리고 구진철에게서 얻은 아티팩트까지 몇 개 꺼내 놓자 모든 것이 확실해 졌다.
유대룡은 백윤후의 증언과 한수호가 내놓은 증거를 통해 백진성이 폭마 박준규이며, 쌍어궁의 궁주라는 사실을 바로 특무부와 대한맹에 알렸다.
다행히도 유대룡은 아들을 잃은 분노에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유대룡의 분노가 결코 적지 않으며, 이번 일을 기점으로 하여 황도 13궁을 향한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될 것임을.
송지문과 권열은 유대룡과 함께 떠났다.
한수호가 그들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백진성의 음모에 의한 것임을 알려주자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하며 유대룡에게 사죄했다.
그들이 유재형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기에, 유대룡에게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유대룡은 그들의 사죄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대신 한 가지를 부탁했다.
유대룡은 아들 유재형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에게 이 비극을 조금도 가감 없이 설명해 줄것을 송지문과 권열에게 부탁했다.
아비인 자신이 직접 아들의 목을 베었다는 말을 아내에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정중히 부탁을 해오자 송지문과 권열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떠나자 남은 건 강우진과 한수호, 그리고 친구들뿐이었다.
의외였던 건, 강우진이 백윤후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는 사실이었다.
강우진은 사실 자신도 백진성의 정체를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스승이었기에 차마 의심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한수호가 알파 몬스터인 뱀파이어 로드라고 생각했다며 마찬가지로 깊은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한수호는 강우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강우진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믿어주는 척해야 했다.
강우진은 저택에 남아 백윤후가 광양백가의 가주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가주였던 백진성이 사라진 이상, 광양백가가 공중분해 되지 않게 하려면 강우진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백윤후도 거절하지 않았다.
백윤후의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한수호는 친구들과 함께 컨테이너 하우스로 돌아왔다.
장한설이 한수호를 위해 치료 특성을 지닌 진급 마공사를 부르겠다고 했지만, 한수호는 한사코 거절했다.
치료 포션이면 충분하다면서, 괜한 호들갑이라며 그냥 집에서 쉬면 된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
결국, 한수호와 친구들 모두가 컨테이너 하우스로 우르르 몰려가게 되었다.
* * *
“정말 고마워요. 오빠를 지켜주는 언니, 오빠들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에요.”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한수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라라의 말이었다.
그녀는 부상을 입고 돌아온 한수호를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보기와는 달리 큰 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금방 침착을 되찾았다.
한수호는 귀가하는 도중 정신감응을 이용해 라라에게 상황을 모두 알려주었다.
그래서 라라는 동생으로서 연기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고맙다니. 오히려 우리가 태산 오빠한테 도움을 받았는걸. 너무 걱정하지 마. 보기엔 상처가 심해 보이지만,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니거든.”
이들 중 라라와 가장 친하다고 볼 수 있는 이하윤의 말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태산 오빠가 잘못되었으면 정말 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가 있는데 잘못될 리가 없지. 안 그래?”
최지혁은 라라의 청초한 모습에 괜히 얼굴을 붉혔다.
“윤후 오빠도 무사하신 거죠?”
라라가 백윤후의 안부를 묻자 신소이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의 대부분을 긴 머리카락으로 가린 상태였지만, 신소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윤후는 무사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할지도….”
신소이는 백윤후가 오늘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아버지 백진성이 그 흉악한 무리인 쌍어궁의 궁주이자 사대광마 중의 하나인 폭마 박준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어찌 평범할까.
“다들 피곤해 보이시네요. 태산 오빠는 걱정 말고 이만 돌아가 쉬세요.”
라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여기 있어 봐야 불편하기만 할 테니 이만 돌아들 가자.”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어…. 응. 장태산이 쉴 수 있게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듯해.”
장한설의 말에 양소혜가 맞장구를 쳐주고, 신소이까지 동의하자 이하윤은 혼자 여기 남아 한수호의 간호를 하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라라가 없다면 모를까, 친동생은 아니지만 라라가 있는데 굳이 남아있겠다고 하기엔 명분이 없었다.
“응. 이제 우리도 가자. 다들 쉬어야지.”
이하윤까지 돌아갈 차비를 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라야.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줘. 알았지?”
이하윤이 걱정 어린 얼굴로 말하자 라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연하죠. 여기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언니 오빠들뿐이니까요.”
“비돈귀살 두 분께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말씀드려봐야 괜한 걱정만 하실 테니.”
최지혁은 비돈귀살이 오늘 벌어진 일을 알게 되면 만사 제치고 서울로 달려올까 봐 걱정이었다.
“네. 오빠 상처가 나으면 그때 말할게요.”
“그래. 그럼 이제 가보마.”
최지혁이 인사를 하자 다 같이 라라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한 뒤 밖으로 나섰다.
한수호의 친구들이 모두 컨테이너 하우스를 떠나고 현관문을 닫은 순간이었다.
근심 가득하던 라라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확 변했다.
“적당히 좀 하시죠, 오.라.버.니?”
라라가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하자 안쪽 방에서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들 아직 멀리 안 갔다. 말 좀 조심하면 안 되겠냐?”
피곤함이 가득한 한수호의 음성.
그 말에 라라는 거실을 지나쳐 한수호가 쉬고 있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니, 뭐 하러 이런 연극을 하게 만들어요? 사왕오패도 두려워하지 않을 분이, 이렇게까지 실력을 감춰야 할 이유가 대체 뭐죠? 오라버니가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졌다는 걸 친구들이 알게 되면 관계가 소원해 질까 봐 두려운가요?”
라라는 허리에 손을 척 얹고서는 한수호를 답답하다는 듯 바라봤다.
침대에 걸터앉아 기지개를 켜고 있던 한수호.
그는 라라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고는 쓴웃음을 흘렸다.
“나에 대한 걸 모두 알게 되면, 녀석들이 위험해질까 봐 그런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진정한 친구들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친구들을 너무 보호하는 것 같아요. 그런 걸 과잉보호라고 하던데, 아닌가요?”
“조금도 과잉이 아니다. 그만큼 적이 강하다는 말이고. 지금의 녀석들은 내 적들을 감당하기엔 아직 위험해.”
한수호의 표정은 착잡했다.
원래는 회귀한 이후, 그 어떤 인연도 만들고 싶지 않았었다.
오직 가족의 복수를 하고 인류의 멸망을 막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친구들과 인연이 이어졌고 이제는 그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지경까지 왔다.
장한설은 쌍둥이 동생이니 가족이었고, 최지혁화 양소혜, 이하윤과 신소이 모두 잃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정 그러면 다 제쳐놓고서라도 적부터 해치워야죠. 이젠 대충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결과가 나온 거 아니에요?”
라라는 텔레파시를 통해 한수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제부터 그럴 생각이다. 그러니 너도 정신 바짝 차리고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야 할 거다.”
한수호의 말에 라라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바로 그거죠. 답답하게 시간 끌 필요 없이, 드러난 적들부터 파바박 해치워 버리자고요!”
라라가 주먹까지 불끈 쥐며 의욕을 보이자 한수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래서, 드러난 적들이 누군데? 나도 아직 정확하게 파악을 못 했는데, 넌 알고 있다 이거냐?”
“고민할 거 뭐 있어요? 오중헌인가 뭔가 하는 놈이랑, 박혜리 아줌마, 그리고 그 당채룡이라는 중국놈 잡아서 조지면 되는 거 아니예요? 거기다 박새한이라는 작자도 인류 멸망에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위치 추적해서 바로 때려잡으면 되는 거죠.”
라라는 귀엽고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달리 노빠꾸의 상여자였다.
“넌 타초경사라는 말도 몰라? 그놈들이 다가 아니야. 황도 13궁 전체를 뒤에서 아우르는 흑막이 누군지부터 파악해야 하고, 강씨호왕가가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적은 또다시 어둠 속 깊이 숨어들 거라고.”
“에이…. 뭘 그리 복잡하게 해요? 의심 가는 놈들 죄다 때려죽이면 오라버니 복수도 하고, 인류의 미래에 드리운 어둠도 거둬낼 수 있는데.”
라라는 인간이 아닌, 세이렌이었기에 생명의 소중함이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워버리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도 아닌 것이다.
“알았으니까 문단속이나 다시 잘하고 와봐. 잠시 나랑 다녀올 곳이 있다.”
“지금요?”
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한수호는 눈을 얇게 떴다.
“가기 싫으면 나 혼자 가고.”
“1초만 기다려요.”
말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진 라라.
그녀는 정확히 1초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딜 가시나이까, 오라버니?”
빙그레 웃음을 걸고 다가서는 라라의 모습에 한수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널 그곳에 데려가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에휴….”
“어디 가냐니까요? 맛집? 아니면, 관광명소? 어디죠? 와, 진짜 궁금하다.”
“호들갑은 그만 떨고 이리 가까이 오기나 해.”
한수호가 손짓하자 라라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다가섰다.
“아니, 어딜 간다면서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안 하고 왜 침대로 불러들여요?”
“아오! 어린놈이 생각하는 게 왜 그따위야?”
“어린놈 아니라니까요? 300살이 넘었는데 뭐가 어리냐고요!”
“그만.”
한수호는 라라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고는 바로 전투영역을 활성화했다. 그 순간, 한수호와 라라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 * *
“와하하하하! 너 고블린 맞니? 완전 영악한데? 네가 인간보다 낫다, 얘.”
라라는 월의 팔뚝을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치면서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라라의 손힘에 월의 작은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월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수호는 그런 라라와 월을 자신의 집 2층 베란다에 서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예정보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라라를 월에게 소개시켜 주어야 했기에 일단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라라의 붙임성이 굉장히 좋았다.
“저 애가 범이고, 쟤는 살이라고? 이름이 뭐 그따구니? 이름 붙여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작명 센스가 완전 젬병이다, 얘.”
“그 젬병이 저기에 있다.”
월이 베란다에 서 있는 한수호를 가리키자 라라가 입을 가리며 큰 소리로 웃는다.
“어머, 어머! 난 설마 오라버니가 이름을 지어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젬병이라고 해서 어쩐다니? 호호호!”
“미안해할 필요 없다. 내 이름이 월로 지어지는 순간 난 이미 모든 걸 포기했다.”
“내 말이! 나도 라라라는 이름이 없었으면 쎄이나 이렌, 뭐 이런 이름으로 불렸을 거 아니야?”
“넌 세이렌이니 쎄렌이 되었을 거다. 내가 워리어 고블린 이라서 월이 되었듯이. 라라라는 이름이 있어서 좋겠구나. 솔직히 그건 좀 부럽다.”
“나도 기회 봐서 이름 바꿔 달라고 말해볼게.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월이 뭐니, 월이? 월월월~ 뭐 이렇게 부를 거도 아니고.”
라라와 월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수호는 이마에 핏줄이 빡 돋아나는 충동을 느꼈다.
친해지라고 라라를 데리고 오긴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 덕에 범이와 살이는 어색함이 하나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다.
[라라 누님! 이왕이면 저희들 이름도 좀 멋지게 바꿔주시죠!]
범이가 눈으로 원하는 걸 말하자, 살이도 끼어들었다.
[내 이름은 돼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싫다. 이름이 살이 뭔가, 살이.]
“알았으니까 다들 이 누나한테 잘 보여. 니들 주인은 이 누나 말에 껌뻑 죽는다니까? 호호홋!”
“이것이 침대 로비인가?”
“…. 어?”
월의 가감 없는 말에 라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한수호도 월을 그냥 뒀다가는 자식 낳는 소리까지 나올 거 같아 급히 중재에 나섰다.
“헛소리들은 작작 좀 해라. 내가 라라를 여기 데려온 건, 너희들끼리 서로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서 언제든 합을 잘 맞춰 적을 상대하라는 뜻이야. 그러니 가볍게라도 서로 대련을 좀 해 보던가.”
“대련? 오라버니는 지금, 이 귀여운 애들을 상대로 힘을 쓰라는 거예요? 그러다 애들 다치면 어쩌려고요?”
라라가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월이 발끈했다.
“네 힘으로는 월을 다치게 할 수 없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그러니? 얘. 이 누나가 세이렌의 여왕이라는 말 못 들었어? 어디 감히 워리어 고블린이 여왕한테 엉기려고.”
“네가 세리렌의 여왕이면, 난 고블린의 왕이다.”
“어쭈? 지금 해 보겠다는 거야?”
라라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진짜 한판 붙을 기세를 보이자 그제야 한수호는 한시름 놓았다.
‘이래야 정상이지. 월이 보통 월이 아닌데, 라라 성질을 돋우지 않을 리가 없다니까? 흐흐.’
한수호는 라라와 월이 기세 싸움을 하며 저택 옆에 붙은 수련장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다가 2층의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앉아 오늘 얻은 무기와 아티팩트 모두를 모조리 구현시켰다.
와르르르르…..
거실 바닥에 쏟아져 내린 십여 개의 아티팩트들.
한수호는 그걸 하나하나 살펴보며 어떻게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