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한다.”
한수호는 라라에게 이곳의 모든 걸 맡기고 대구로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그냥 근처에 있다가 위험할 때 도움만 주면 되는 거죠?”
“그래.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들킬 수 있으니까 적당히 거리 유지하는 거 잊지 말고.”
배낭에 간단한 짐 몇 가지를 챙긴 한수호는 배낭을 둘러맨 뒤,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들이켜고는 라라 앞에 마주 섰다.
“이거 받아.”
한수호가 내민 손에는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진 신용카드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 이게 뭔데요?”
“신용카드. 나 없는 동안 이걸로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으라고.”
“와! 진짜예요!”
라라는 날름 신용카드를 낚아채서는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폈다.
한수호는 그런 라라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현관문을 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장한설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해. 알았지?”
“네! 걱정 마세요. 이 라라가 목숨을 걸고 한설 언니를 지킬게요!”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한수호는 집 밖으로 나섰다.
집 앞 공터에는 올보의 최신형 SUV가 든든한 모습으로 한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은채한테 선물로 받은 차량이지만, 살이와 범이의 손을 거친 이후로는 웬만한 전술장갑차보다도 더 엄청난 전투용 차량으로 변신한 상태였다.
차량에 올라탄 한수호는 옆 좌석에 고니를 소환시켰다.
캬르릉!
간만에 인벤토리 밖으로 나오게 돼서인지 고니는 굉장히 기쁜 표정이었다.
쿠르릉
묵직한 엔진음이 들리며 SUV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도로를 따라 대로변으로 사라져 가는 차량.
컨테이너 하우스 현관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라는 폰 하나를 귀에 대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르르. 따르르르르르.
두 번의 신호음이 들렸을 때,
달칵
-네, 감사합니다. 사랑과 정성으로 손님을 모시는 출장뷔페 ‘한아름’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라는 매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여기 특A 코스 모듬으로 4인분 뷔페 보내주세요.”
-네? 특A 모듬이요?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 모듬 메뉴는 없고 특A 메뉴로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만.
“그러니까요. 그 모듬이요.”
-아, 특A 메뉴 3가지 다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맞아요.”
-어이쿠. 잘 알겠습니다. 오늘 네다섯 가족 모임이 있나 보네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1시간 내로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라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현관문을 닫았다.
* * *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는 대충 230킬로미터.
100킬로미터로 꾸준하게 달려도 2시간은 넘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한수호는 대구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한 뒤, 블랙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하여 차로 돌아갔다.
시간을 살피니 아침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10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아직 여유가 좀 있네.’
한수호는 이번 의뢰의 담당인 이병선 요원과 이미 통화를 마쳤고, 오전 10시에 대구 동성로 초입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운전석에 올라탄 그는 커피를 컵홀더에 끼워놓고 시동을 걸려 했다.
그때, 옆에 내려놓은 공법폰에서 벨이 울렸다.
‘재우 형?’
발신자는 김재우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운전 중이냐?
“휴게소예요. 제가 부탁드린 건 알아보셨어요?”
한수호는 대구로 출발하면서 김재우에게 연락해 몇 가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첫째는 특무부에 이프리트에 대한 정보가 수집된 것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요마 지소연의 최근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대구에서 새한교의 교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에 대한 정보였다.
-우선 지소연에 대한 것부터 알려주마. 지난번에 아카데미 교정에 느닷없이 나타난 이후 잠적해 버려서 위치를 추적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 그래도 내가 누구냐? 특무부 정보과에서도 찾지 못하는 걸 단 10분 만에 내가 찾아냈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던가요?”
-지금 안동에 있더구나. 그것도 흡정귀 마스터 두 명하고 함께 말이야.
흡정귀 마스터는 요마 지소연보다는 약하지만 나름 강력한 힘을 지닌 흡정귀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했다.
혈괴수 박인범과 흡요귀 전희지.
이 둘까지 지소연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안동에 뭐가 있죠?”
-특별한 건 없어. 하지만 그곳엔 지금 한 사람이 숨어 있지.
“그게 누군데요?”
-방태식.
방태식의 이름을 들은 한수호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전까지 인천 쪽에 머물고 있던 방태식이 갑자기 안동까지 내려갔고, 지소연과 흡정귀 마스터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곳으로 몰려갔다?
마치 악당이란 악당들은 모두 안동으로 모여드는 느낌이었다.
-너도 느꼈겠지만, 안동에서 빌런들이 회합이라도 하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수많은 마공 요원들이 안동으로 파견 나갔어. 나도 게이트 몇 개만 확인하고 나면, 안동으로 움직여야 할 판이고.
“대한맹도 움직였겠네요?”
-그야 당연하지. 이번엔 부맹주 이자웅이 직접 맹도들을 이끌고 안동으로 향했다던데?
“이자웅이 직접이요?”
이건 놀라운 일이다.
대한맹의 부맹주 이자웅.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 이대성을 잃고 충주 본가에 들어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소연이 안동으로 움직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맹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아들을 잃은 분풀이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하기엔, 이자웅이라는 인물이 지닌 성정과 너무 안 맞는다.
그는 아들 이대성의 죽음에 한수호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아카데미의 마공돔에서 한수호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은, 죽은 이대성이 가짜라는 걸 알기 때문일 터.
그가 충주 본가에 칩거한 이유는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이 절대 아니었다.
한수호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가 이대성의 죽음을 충주 본가로 들어갈 구실로 삼았을 뿐이며, 그곳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가 이번에 움직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규모 빌런 소탕 작전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한수호가 아는 이자웅은 회귀 전의 세상에서도 빌런에 대한 악감정이 끔찍할 정도로 지독한 자였다.
사람을 해친 마공사를 상대로는 일말의 연민도, 용서도 없는 인물이 바로 이자성이었다.
이번에 그가 움직였다는 사실은 안동에 모여들고 있는 빌런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안동에 피바람이 불겠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한수호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대구에 위치한 새한교의 본산을 찾아내서 박새한을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 내 말 듣고 있냐? 왜 대답이 없어?
공법폰 너머로 김재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죠?”
-허, 이 녀석 보게. 이 형님이 고생해서 얻어낸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데 딴생각을 해?
“정보료로 금괴 하나 드릴게요. 대신 5년 약정입니다?”
-아니, 내가 뭐 꼭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너도 알잖냐? 재희가 워낙 돈을 헤프게 쓰는 성격이라서 나라도 차곡차곡 저축을 하지 않으면 집 한 채 없이 신혼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지난번, 고대 도시 탐험 때 큰돈을 얻긴 했지만, 그건 나도 웬만해선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거든.
김재우가 민망한지 주절주절 변명을 해댄다.
한수호는 그런 김재우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 아니까, 됐어요. 그보다, 이프리트에 대한 거는요?”
-응? 아, 그거. 그게 좀 이상하다. 특무부 정보과엔 이프리트에 대한 정보가 단 하나도 없어. 어디서도 그런 이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거야. 마치 누군가가 깨끗이 지워버린 것처럼 말이야.
“유대룡 본부장님은 이프리트에 대해 굉장히 경계하고 있다던데요?”
-그건 맞아. 친한 동료 하나가 본부장님 측근인데, 그 녀석은 이프리트를 알더라고. 너도 들어봤지? 무진대라고. 특무부에 존재하지만 본부장님의 완전한 사조직처럼 움직이는 부대 말이야. 녀석이 바로 그 무진대의 넘버 세븐이다.
‘무진대’는 한수호도 잘 안다.
무력진압부대라는 이름을 지닌 조직이며, 단 7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명 한 명의 무력이 궁급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강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룡을 제외한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며, 국가 최고 원수인 대통령으로부터 살인 면허를 부여받은 특별한 요원들이었다.
한수호는 회귀 전, 유대룡의 양아들로 성장하면서 무진대 요원들과도 꽤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무진대의 7인 요원 중, 김재우가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은 딱 하나.
‘차진우 요원이겠구나.’
무진대 넘버 세븐 차진우.
다른 무진대 요원들의 나이는 모두 30이 넘지만, 유일하게 차진우만은 28살로 상당히 젊다.
그래서 회귀 전의 한수호는 차진우과 가장 가깝게 지냈었다.
물론, 김재우처럼 친밀한 정도는 아니다.
-아무튼, 무진대는 이프리트에 대해 별도로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양이야. 하지만, 녀석도 그 이상은 아무리 나라도 말해줄 수 없다는구나.
“알았어요. 그 정도만 해도 큰 성과네요. 더 이상은 깊숙하게 캐지 마요. 괜히 들쑤셨다가 형이 이프리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나보다는 너나 걱정해라. 나도 아카데미 학생 때 의뢰 수업을 여러 번 해 봤지만, 너처럼 단독 의뢰만 하려는 놈은 못 봤거든. 99.9%가 팀 의뢰를 수행하지, 단독 의뢰는 누구도 손을 안 댔는데 말이야.
“의뢰서가 버젓이 있는데, 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 이유를 한수호도 잘 알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아카데미 공고 게시판에 붙는 단독 의뢰는 그저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주는 선전용일 뿐, 그걸 진짜로 수행하는 학생은 전무했으니까.
-어휴. 알았다, 알았어. 아무튼, 내가 병선이한테 연락해서 잘 챙겨 주라고 했으니까, 별로 위험할 건 없을 거다.
“어? 이병선 요원하고 아는 사이였어요?”
-이놈아. 내가 이래 봬도 특무부 지휘요원 짬밥이 5년이다. 2~3년 차 요원들은 웬만하면 다 알지.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휴. 아닙니다. 아무튼 알았어요. 정보 주셔서 고맙고요.”
한수호는 다른 의미로 이병선과 아는 사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원래는 대구 동성로 실종 사건에 그다지 깊이 관여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수사에 참여하다가 슬쩍 빠져나올 생각이었던 것.
하지만 이번 사건 조사의 선임자인 이병선과 김재우가 잘 아는 사이라고 하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대구에 온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알면, 재우 형이 만사 제치고 여기로 내려올 테니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
이젠 어쩔 수 없이 이번 의뢰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분명 김재우는 이병선 요원에게 자기가 아끼는 동생이라느니, 실력 좋은 유망주라니 하면서 온갖 말을 해 뒀을 텐데, 대충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 나도 조만간 안동 내려가니까 시간 되면 대구에 들를게. 어차피 안동에서 대구까지 그리 안 멀잖아? 그러니까….
“이제 운전해야 하니까 끊습니다!”
한수호는 말이 길어지자 못 들은 척하면서 통화를 종료했다.
컵홀더에 둔 커피를 꺼내 몇 모금 마신 한수호.
조수석에 웅크리고 있는 고니를 슬쩍 바라본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엑셀에 발을 올려놓았다.
“고니야. 너 특무부 서버에 접속해서 대구 동성로 실종 사건과 관련된 정보 죄다 훑어서 보고해봐.”
캬릉?
고니가 고개를 들며 갑자기 뭐냐고 묻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번 의뢰 대충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차라리 후딱 해결해 놓고 내 편한 대로 움직이는 게 낫겠어.”
캬릉, 캬르릉!
고니는 바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
대구 동성로.
한수호는 길게 뻗은 동성로의 한 곳, 밀라노 앞에서 마른 체형의 20대 중반의 사내를 만날 수 있었다.
“이병선 요원님?”
이병선은 알아보기 쉬운 용모를 하고 있었다.
키는 190이 넘을 정도로 큰 대신, 상당히 마른 체형이라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네가 장태산? 뭐 이리 빨리 왔어?”
약속 시간은 10시였는데, 한수호가 여기 온 시간은 9시 반을 갓 넘긴 시간이었다.
“요원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나야, 뭐. 여기서 담배나 피면서 지나가는 청춘들 구경이나 하려고 했지. 그것도 나름 재미있거든. 하하하.”
이병선은 26살밖에 안되는데도 말투가 3, 40대 아저씨 같았다.
“자자, 아직 아침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테니 따라와라. 이 근처에 봐둔 맛집이 하나 있으니 거기서 배 좀 채우자고.”
“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재우 선배한테는 이야기 들었다. 아카데미 본교 1학년생 중에서 넘버 원이라면서? 초엘리트 학생을 캐어하게 되었으니 내가 영광이다.”
역시나 김재우는 이병선에게 이런저런 금칠을 한 모양.
한수호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앞서 걷는 이병선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동성로를 따라 한참이나 내려갔고, 구석에 위치한 작은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백반 두 개를 주문한 이병선은 소주부터 한 병을 시켜서 잔에 조르륵 따랐다.
“이해 좀 해 줘. 며칠째 냄새나는 하수구에 처박혀 수색에만 전념했더니 소주 맛이 너무 그립더라고. 같이 한잔하겠나?”
“아니요. 전 술이 약해서.”
약한 게 아니라 무척이나 술을 즐기지만 처음 만난 이병선과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개조 특성으로 훑어본 이병선의 신체 수치가 너무 이상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머리] : 71(-18)
[왼팔] : 61(-7)
[오른팔] : 65(-12)
[가슴] : 82(-35)
*[마나] : 622(-236)
[배] : 55(-8)
[왼발] : 68(-13)
[오른발] : 73(-16)
이병선의 신체 수치엔 처음 보는 마이너스가 수두룩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