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한수호는 병원 응급실에서 4시간 가량 푹 쉬었다.
다친 곳도 없지만, 외견상으로는 고생한 흔적이 가득했기에 누구도 한수호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덕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깊은 수면에 빠져들 수 있었다.
푹 쉬고 나니 온몸이 개운했다.
한수호는 더 쉬었다 가라는 의사의 말을 정중히 거절하고는 곧바로 퇴원했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 타고 미리 예약해 놓은 모텔로 향했다.
모텔에 들어선 한수호는 우선 몸부터 깨끗이 씻었다.
여벌의 옷은 있었지만, 굳이 새 옷으로 갈아입지는 않았다.
오늘 입고 있던 옷은 상의부터 하의, 신발까지 모두 특별하게 개조한 것들이 별도로 세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특별한 후드티]
-코스트: 12
-외부의 충격을 30% 흡수합니다.
-방한, 방열 기능을 보유합니다.
-자가수복 기능이 있습니다.
-인지능력 방해 기능이 있습니다.
-자동 세척기능이 있습니다.
이전의 다용도 후드티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특별한 후드티’라서 효능도 한층 강력해졌다.
후드티 말고도, ‘특별한 면바지’와 ‘특수한 신발’도 상당히 훌륭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수호는 겉옷을 모두 벗어 놓고 속옷만 입은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두 팔을 베개 삼아 누운 한수호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일로 복잡했다.
첫째로, 회귀 전의 세상에서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뜻을 모았던 조유현이 회귀자가 된 후로는 정반대의 악인이 되어 오히려 인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회귀자 한 명이 그런 길을 걸었다면, 다른 회귀자들도 그렇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산과 김명중은 여전히 인류의 멸망을 막아내려 애를 쓴다지만, 나머지 다섯은 조유현과 같이 악의 길에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일.
다른 누구도 아닌, 회귀자가 악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조유현이야 공간조작 특성 때문에 지능이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수호도 그를 처치하는 데 크게 애를 먹었을지 모른다.
‘회귀자라고 해도 정의를 버리고, 스스로 타락하는 길을 택했다면 누가 되었든 내 손에 죽는다.’
한수호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기로 했다.
둘째로, 이프리트가 침투해 있는 영역이 과연 어디까지인지가 걱정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10년 전, 아버지를 죽게 하고 가족을 흩어지게 한 가면인들이 바로 이프리트일 거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 게이트 안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황도13궁의 인물을 마주친 이후, 이프리트의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프리트는 정의국부터, 황도13궁에 새한교, 그리고 대한맹과 특무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늘 내가 흘린 정보가 놈들에게 들어간다면 반드시 나한테 접근해 오는 자가 있겠지.’
한수호는 이병선에게 일부러 가면인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이는 이병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가 윗선에 상황을 보고하게 되면 자연히 특무부 내에 숨어있을 이프리트의 첩자도 정보를 접하게 될 거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
그러면 특무부 내의 첩자가 사실 확인을 위해 한수호에게 접근을 시도할 테니 그때, 역으로 놈들의 꼬리를 잡으면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하는 것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한 가지 고민거리가 더 있었다.
한수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세 번째 고민은 바로 게이트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지만, 한수호는 조유현의 마나 친화도를 통해 게이트를 전투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게이트를 다른 장소로 이동시킬 수 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지에 주로 생기는 게이트들.
그 게이트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가능하다면, 도심지에 도사리는 위험을 단숨에 없애고, 한곳에 게이트들을 모아 집중 관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수호는 단순한 이동을 뛰어넘어 자신만이 오갈 수 있는 전투 영역으로까지 게이트를 옮길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막을 해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이트를 이동시키려면 괴인혈을 내 몸에 각성시키는 수밖에 없겠지?’
일단 괴인혈 특성을 각성시키고, 단계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조건은 포인트를 소모해 다른 내용으로 변경시키면 된다.
한수호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걸이에 걸어둔 옷은 어느새 깔끔하게 세척되어 새것처럼 탈바꿈했다.
특별한 후드티와 특별한 면바지를 입고, 특수한 신발까지 신은 한수호는 바로 전투 영역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잠깐. 복주머니 안에 USB 같은 게 들어 있었지?’
모텔 구석에 자리한 책상에 올려진 모니터를 보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전투 영역 안에 지어진 집에는 아직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USB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해 보려면 지금이 딱이었다.
한수호는 우선 복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자신의 인벤토리로 옮겨버렸다.
복주머니의 저장 용량이 200이나 되긴 하지만, 인벤토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굳이 두 개의 아공간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게이트 점프석을 비롯해 언월도에 포션, 현금다발 등을 모조리 인벤토리에 옮기자 남은 건 USB 하나뿐이었다.
한수호는 복주머니에서 USB를 꺼내고, 그 복주머니마저 인벤토리에 담았다.
‘어디서 많이 본 모양인데?’
직접 꺼내서 살펴보니 왠지 모르게 눈에 익숙하다.
폭 1cm에 길이 2cm의 USB.
특별한 아티팩트가 아니라서 별도의 정보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수호는 컴퓨터를 켜고 USB를 꽂았다.
그리고 USB 장치를 찾아 들어가 그 안에 담긴 것이 무언인지 확인했다.
그런데, 한수호의 눈을 의심케 하는 글자가 보였다.
[2058.02]
폴더명이 2058년이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이 달랑 하나 있는 폴더.
그 폴더에 들어가 보니 세 개의 영상 파일이 나타났다.
2차 몬스터 웨이브 방어전(악몽급 게이트)
재수 없는 열쇠들
네 번째 살의 열쇠?
영상 파일의 제목만 봐도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빤히 느껴진다.
‘네 번째 살의 열쇠?’라는 제목의 파일이 뭔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순서대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한수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첫 번째 영상을 플레이시켰다.
* * *
“결국 게이트가 열렸다! 모두 정신차리고 단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않게 막아야 한다!”
이산의 외침에 등을 보이고 앞에 서 있던 서른 명 가량의 마공사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내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인류 문명이 멸망하지 않도록!”
“…. 우리는 목숨을 걸고 이곳을 사수한다!”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때를 같이해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게이트에서 괴물체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큰 만큼, 거기서 나오는 몬스터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몬스터는 머리 크기만 5미터가 넘는 대형 몬스터, 렙티라였다.
생긴 모습은 풍뎅이와 흡사하지만, 머리와 몸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이족보행을 하는 거대 괴수 렙티라.
웬만한 마나력으로는 껍질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1급의 몬스터였기에 궁급 마공사와 맞먹는 힘을 지녔다.
렙티라 뒤를 이어 거대 지네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임베타가 등장했고, 그다음으로는 드래곤과 흡사한 모습의 골라리오르까지 나타났다.
게이트에서 뛰쳐나오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1급 이상이었고, 대형에서부터 초대형까지 다양했다.
하나하나가 궁급의 마공사를 우습게 상대할 수 있는 괴수의 왕들.
그런 엄청난 몬스터들이 줄기차게 나타나더니 무려 100여 마리 가깝게 늘어났다.
건물처럼 커다란 몬스터들이 게이트 앞에서 진형을 이루고 서 있는 모습에 마공사들의 몸을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산은 힘을 북돋기 위해 소리쳤다.
“우리는 인류의 희망이다! 저 괴수 중 한 마리라도 우리를 지나간다면, 내 가족, 내 친구, 내 후손이 살아갈 터전이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이산의 외침에 마공사들의 머리 위로 마나의 기운이 뭉실거리며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산은 이 기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이곳에 최후의 배수진을 친다. 목숨을 바쳐 이곳을 사수하여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지켜내자!”
“무조건 지켜내자!”
“반드시 지킨다!”
“우와아아아아!”
정확히 서른일곱 명의 마공사들.
이들 중 궁급이 아닌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공전뇌 이산이 수년에 걸쳐 모으고 모은 인재들.
이들이라면 악몽급 게이트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고, 게이트 안에서 최후의 봉인을 깨고 나올 발자크까지 세상에서 다시 격리시킬 수 있으리라.
마공사들이 뛰쳐나가자 거대 괴수들 또한 앞으로 달려나왔다.
37대 108의 전투.
서울의 광화문에서 열린 악몽급 게이트 코앞에서 벌어진 이 전투엔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었다.
마공사들과 대형 괴수들의 전투는 치열하고, 처참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마공사들 중 30%가 죽었고, 30분이 넘어가자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마공사들의 희생 덕분에 몬스터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1시간이 넘었을 때, 게이트 앞에 서 있는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살아남은 마공사들은 단 19명뿐.
하지만 그들 중 10명은 크고 작은 부상으로 온몸을 피로 물들인 상태였다.
“이제 마지막 전투만이 남았다.”
이산이 지친 마공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고, 그 말에 마공사들은 다시 힘을 끌어모으며 전투를 준비했다.
잠시 후, 19명의 마공사들은 비장한 얼굴로 7층 건물 크기의 게이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 * *
영상을 본 한수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이 영상을 촬영한 자가 바로 조유현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영상 속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조유현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총 37명으로 구성된 인류의 영웅들.
이들이 싸워 이겨낸 악몽급 게이트가 열린 건 2058년 2월 27일이었다.
한수호는 조유현이 손목에 차고 있던 전자 패널장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짜를 알아본 순간, 이 영상 속 전투가 자신이 회귀 전에 살았던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한수호가 회귀한 건, 2058년 2월 8일.
그날에 이산을 비롯한 7명의 인물이 동시에 회귀했다고 했으니 2월 27일의 영상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산이 첫 번째로 회귀했을 때의 미래로구나.’
한수호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의 미래.
자신이 본 적이 없는 미래를 영상으로 보게 되자 한수호는 뭔가 굉장히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영상들도 같은 세상의 내용이겠지?’
그야 당연할 테지만, 왠지 모르게 영상을 열어보기가 꺼려졌다.
방금 본 영상 속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꽤나 보였었다.
사왕오패가 모두 있었고, 백진성이나 박혜리도 보였다.
거기다 김무성과 비돈귀살, 심지어는 사대광마 네 명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놀라운 건, 37명의 영웅 중에는 지금 한수호의 친구인 이하윤과 신소이, 최지혁, 양소혜를 비롯해 백윤후와 진무현까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산의 옆에는 이하이까지 있었으니 아는 사람은 다 있었던 셈.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한수호 자신과 사기환만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 모두 끝내 궁급까지 성장했구나. 게다가 스승님들도 원래는 인류를 위해 싸우는 영웅이셨고….’
문제는 이들 중 많은 인원이 방금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
스승 부부도, 이하윤을 제외한 친구들 대부분도 모두 몬스터들과의 전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19명의 마공사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악몽급 게이트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한수호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한수호는 그 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김명중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게이트 안에서 발자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갑자기 배신을 하게 되면서 많은 영웅이 덧없이 죽고 만다.
물론 배신자들도 대부분 죽게 되지만, 두 명의 살의 열쇠가 살아남게 되고, 마지막 세 번째 살의 열쇠가 등장하게 되면서 모든게 끝이나게 된다.
‘두 번째 영상에 그 내용이 담겨져 있겠지?’
한수호는 네 번째 활의 열쇠와 세 번째 살의 열쇠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하길 기대하며 두 번째 영상 파일을 클릭했다.
* * *
“네놈들이… 네놈들이 정녕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인도할 셈이냐!”
이산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이산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눈매가 매섭게 생긴 중년 사내였다.
그의 뒤에는 박혜리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왼팔은 누군가에게 잘려 나간 상태였다.
“큭큭큭. 이산. 당신은 이 싸움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리 생각했다면, 정말 한심하군.”
“닥쳐라, 박준규! 네놈이 배신하지 않고 힘을 합쳤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승산? 웃기는군. 고작 우리 네 사람한테 일곱이 당해 놓고 승산을 논하다니.”
박준규가 주변을 훑으며 비웃음을 흘리자, 이산이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동료들의 시신을 바라봤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진 고깃덩이와 머리가 잘리거나 몸이 두 동강 난 시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지금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고작 열 명.
박준규와 박혜리를 빼면 여덟 명만이 발자크와 최후의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기습 따위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날려버리다니…. 폭마 박준규. 네놈만 아니었어도 우리의 후세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거늘!”
이산이 핏발 선 눈으로 박준규를 노려봤다. 이에 박준규는 더욱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왼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잔소리 말고, 어서 끝내지.”
박준규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뭔가를 움켜쥐듯 꽉 거머쥔 순간,
파칭!
그의 왼손에 거대한 대궁 하나가 쥐어졌다.
그건 다름 아닌 미소마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