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미소마궁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미소마궁이 네 손에 들어갔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흐흐흐.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
박준규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때, 그의 옆으로 뭔가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퍼억
폭죽처럼 터져 버린 머리.
박준규의 머리가 갑자기 터지더니 그의 몸뚱이까지 화르륵 불타올랐다.
“감히!”
박혜리가 크게 놀라며 누군가를 향해 채찍을 휘두른 순간,
콰득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손으로 채찍을 움켜쥐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는 사내.
그의 손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에 채찍 또한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박혜리는 황급히 채찍을 놓아버리며 눈앞의 사내를 향해 모든 마나력을 방출시켰다.
“죽엇!”
그녀의 쫙 펼친 손바닥이 장발의 사내를 향했을 때,
콰아아앙!
그가 서 있던 공간이 폭발해 버렸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급히 뒤돌아 서려던 박혜리.
몸이 반쯤 돌아섰을 때, 그녀의 목을 움켜쥐는 손이 있었다.
활활 불타는 손은 박혜리의 가녀린 목을 단숨에 꺾어 버렸다.
우득
뒤통수가 등에 닿을 정도로 목이 꺾인 박혜리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화르르륵
그녀의 시체도 순식간에 한 줌 재로 화했다.
갑자기 난입해 박준규와 박혜리를 죽여버린 사내.
그는 한 마공사를 향해 돌아서며 담담하게 말했다.
“합류가 늦었습니다.”
이산을 비롯해 어렵게 생존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내의 시선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쏟아졌다.
그는 다름 아닌 김무성이었다.
“이제야 오다니…. 너무 늦었구나.”
김무성은 덧없이 죽어버린 동료들의 시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사내는 김무성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하아…. 이제라도 왔으니 다행이다. 네가 마음을 돌려준 것만으로도 인류에겐 큰 홍복이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 싸움을 준비…. 헛!”
김무성이 갑자기 헛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숙인 사내의 뒤쪽으로 달려들었다.
사내도 뭔가를 느끼고는 몸을 홱 휘돌리며 불타는 손으로 등 뒤를 가격했다. 하지만,
서걱
빛이 번쩍하더니 사내의 팔 한 짝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김무성의 공격을 튕겨내고 불꽃 사내의 공격까지 피해 기습을 성공시킨 건, 드래곤의 형상을 한 전신갑주를 걸친 누군가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용갑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사내.
그는 화염을 뿜어내는 검을 들고 있었다.
그의 검에 팔이 잘려 나간 장발 사내는 다급히 뒤로 물러나며 용갑 사내를 경계했다.
그때 이산을 비롯한 모두가 장발 사내를 보호하듯 인간 장벽을 세웠다.
이에 안심한 김무성이 용갑 사내를 향해 폭풍처럼 공격을 가했다.
이미 70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의 온몸엔 마나력이 가득했고, 공격 한 번에 쇠조차 박살 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용갑의 사내는 연신 뒤로 밀려났다. 아니, 좀 전과는 다르게 김무성에게는 아예 반격을 하지 않고 방어에만 집중했다.
그들에게서 30여 미터 떨어져 있던 이산과 마공사들.
장발 사내의 상처를 살피던 이산은 어떤 아티팩트고, 어떤 포션도 상처에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방어에만 급급한 용갑 사내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어째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쓰러뜨리려는 것이냐!”
하지만 용갑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신 장발 사내를 죽이지 못한 것이 분한지 그를 무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하이야. 김무성 선배를 도와라! 진무현, 너도 합세하고!”
이산이 이하이와 진무현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도 돕겠소!”
사왕오패 중 유일한 생존자인 송혁이 얼굴 가득 피칠한 모습으로 도를 콱 움켜쥐었다.
이산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김무성에 이어 세 명의 마공사가 합류하자 용갑의 사내는 금새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용갑의 방어력이 엄청나지 않았으면 진작에 팔다리가 잘려져 바닥에 드러누웠을 만큼 네 사람의 공격은 무시무시 했다.
사실 용갑의 사내가 이들 네 명을 상대로 평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다.
궁급을 뛰어넘어 파급에 오른 김무성과 송혁.
거기에 궁급 끝자락에 오른 진무현과 이하이까지 합세한 상태에서 평수를 유지할 수 있다니.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용갑의 사내가 파급마저 넘어선 멸급의 마공사라는 것을.
전투가 시작된 지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용갑 사내는 뭔가 다급해졌는지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김무성과 송혁의 방행에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용갑 사내의 눈빛은 시간이 갈수록 광기에 물들어 갔다.
“더는…. 더는 내 앞을 막지 마시오!”
용갑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딘가 문제가 있는지 숨까지 헐떡거리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용갑 사내.
하지만 그를 상대하고 있는 네 사람의 공격엔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용갑 사내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화염의 검을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심장에 꽂아 넣으려고 했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한 송혁은 도를 휘둘러 용갑 사내의 검을 바깥쪽으로 쳐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크윽! 이런, 젠자아앙!”
용갑 사내는 크게 당황한 듯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 눈부신 빛이 폭사되어 나왔다.
쿠하아아악!
빛에는 강력한 마나가 담겨 있었고, 사내를 공격하던 사람들은 그 힘에 멀리 튕겨나갔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미 생을 마감한 마공사들의 무기들이 자력에 끌리듯 용갑 사내 쪽으로 빨려들어갔다.
무기들은 용갑에 닿자마자 눈녹듯이 녹았으며, 그때마다 용갑 사내의 몸집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안 그래도 용갑을 착용한 덕에 2미터에 가까웠던 키가 단숨에 3미터까지 커졌다.
“크아아아아!”
용갑 사내는 자기 머리를 붙잡은 채로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이를 본 이산이 급히 소리쳤다.
“뭔가 이상하다! 지금 당장 저 놈을 죽여야 해!”
이산의 외침에 장발 사내를 돌보고 있던 이하윤과 외국에서 온 마공사 나스타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숨겨둔 장치로 촬영하고 있던 조유현까지 전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용갑 사내는 좀 전보다 두 배나 강해졌다.
꽈과과과과광
그가 휘두른 공격 한 번에 땅이 뒤집어 지고, 공간이 박살났다.
가장 먼저 이 모든 걸 촬영 중이던 조유현이 목숨을 잃었다.
눈이 핏빛으로 변한 용갑 사내가 순간이동을 하듯 달려들었고, 그 즉시로 머리와 하체가 분리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화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저 멀리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촬영할 뿐이었다.
잠시 후, 진무현이 용갑 사내의 검에 목이 잘려나갔다.
그 뒤는 송혁이었다.
김무성에 이어 두 번째로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송혁이 용갑 사내의 손에 붙잡혀 머리가 으깨지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조유현의 시신에서 촬영장치를 찾아 주어들었다.
그는 이산이었다.
모든 걸 촬영하고 지시한 사람이 이산이었기에, 조유현이 죽자 그가 직접 촬영 장치를 챙긴 것이다.
“후…. 결국 마지막 방법을 쓰게 되는구나.”
이산의 중얼거림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그런데, 이산도 생각 못 한 변수가 생겼다.
팔이 잘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던 장발 사내.
그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용갑 사내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20미터 이내로는 다가서지 않았다. 그러다 귓볼에 달고 있던 귀걸이 장식을 떼어내더니, 그걸 용갑 사내 쪽으로 슬쩍 내던졌다.
허공을 날아가는 그건, 새끼손톱만큼이나 작은 크기의 나비였다.
나비의 움직임은 너무도 은밀했기에 용갑 사내는 자신의 목덜미로 나비가 내려앉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퓻
장발 사내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고, 대신 용갑 사내의 등 뒤에 달라붙듯 나타났다.
장발 사내는 그 상태에서 손에 든 단검을 용갑 사내의 등에 꽂아 넣었다.
푸욱
“크아악!”
용갑 사내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휘돌렸다.
그 단순한 동작에,
퍼억
장발 사내의 머리가 잘려져 멀리 튕겨 나갔다.
그의 머리가 떨어진 장소엔 이산이 서 있었다.
“이럴…수가!”
이산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바닥을 굴러 멈춰선 장발 사내의 머리.
그의 긴 머리카락이 모두 헤쳐져 맨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데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끔찍한 화상으로 가득했다.
장발 사내를 죽여버린 용갑 사내는 등을 관통한 단검에 심장을 찔린 충격으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는 용갑 사내.
그를 향해 살아남은 김무성과 이하이, 나스타샤가 달려들려던 그때,
“멈춰요!”
갑자기 이하윤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어이없어할 때, 이하윤이 몸을 돌리더니 용갑 사내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꼭 살아남아야 해요. 그것만이 인류가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이에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즉시, 이하윤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용갑 사내의 온몸을 한차례 휘감았다가 다시 이하윤의 손으로 흡수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하윤의 얼굴 피부가 흐물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얼굴 피부가 녹고,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해 푸스슥 흩어졌다.
빠르게 노화한 이하윤은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죽어가고 있던 용갑 사내가 몸을 튕기듯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이하윤의 몸이 힘없이 튕겨 나갔고, 허공에서 퍼석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다.
용갑 사내는 광기에 가득한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노려보다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푸학!
사내의 주먹이 김무성의 몸통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나스타샤와 이하이가 한발 늦게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터엉
용갑 사내는 땅을 박찼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하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런 용갑 사내에게 나스타샤가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쏟아 부었지만,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득
이하이마저 용감 사내의 손에 목이 꺾이고 말았다.
나스타샤는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자 겁먹은 눈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산.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허허. 허허허….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이산이 중얼거리며 품에서 꺼낸 것은 자그마한 모래시계였다.
위쪽은 빨갛고, 아래쪽은 파란색인 엄지손가락 크기의 모래시계.
이산은 파란색 쪽에 가득 쌓인 모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걸 천천히 뒤집었다.
그 시점에 용갑 사내는 나스타샤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산이 모래시계를 뒤집어 바닥에 탁 하고 내려놓은 순간,
피이이이이잉-
모래시계에서 시작된 엄청난 고음이 광화문 전체로 크게 울려 퍼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팍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 * *
한수호는 두 번째 영상을 보고 나서야 이산과 김명중이 한 말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활의 열쇠 네 명과 살의 열쇠 셋.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네 사람이 바로 활의 열쇠였으며, 이산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 세 사람이 살의 열쇠였다.
특히, 죽어가는 용갑의 사내를 뜬금없이 되살려버린 이하윤의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가만히 영상의 내용을 되새겨본 한수호는, 몇 가지 의문점을 찾을 수 있었다.
영상 속 폭마 박준규의 얼굴은 얼마 전 한수호가 죽인 백진성의 얼굴과 완전히 달랐다.
그건 영상 속의 세상에서는 박준규가 백진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얼굴을 성형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모든 게 달라졌다는 얘기군.’
그것만이 아니다.
장발의 사내가 오른손에 착용하고 있던 건, 7대 마화기 중 하나인 염마갑이 분명했으며, 그가 마지막 순간 용갑 사내의 몸에 꽂아 넣은 단검은 ‘그랑’이 분명했다.
염마갑과 그랑을 소유한 자.
얼굴에 화상이 너무 심해서 누군지는 전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염마갑을 찾으면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용갑을 걸친 사내.
한수호의 예상대로 용갑은 나샬이었다.
나샬을 걸치고, 손에는 라뮬을 들고 있는 사내가 보인 행동은 한수호도 한 번 겪었던 상황이었다.
나샬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화 계열의 특성이나 능력을 지녀야 했고, 나샬의 복종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오히려 나샬의 노예가 되어 살인 기계가 될 뿐이었다.
용갑 사내는 그걸 알기에 일정 시간이 지나자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길 벗어나지 않으면 나샬의 힘에 굴복당할 테니까 그랬던 거겠지.’
하지만 용갑 사내는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위험을 없애려고까지 했다.
그는 장발 사내만을 죽일 목적으로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용갑 사내는 우태범이 맞아.’
한수호는 용갑 사내의 눈빛이 우태범과 닮아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용갑 사내의 정체는 윤곽이 잡혔지만, 장발의 화상 사내는 정체가 여전히 오리무중.
한수호는 이번엔 그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세 번째 영상 파일을 클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