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쿠우웅-
육중한 소음과 함께 중역 회의실 전체를 감싸고 있던 두께 50센티의 금속 차단벽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차단벽이 사라지자 남은 건 얇은 벽으로 둘러쳐진 육각형의 공간뿐.
그때, 회의실을 오갈 수 있는 두 개의 출입문 중 하나가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한 사람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상당한 모습으로 위태롭게 서 있었다.
“교, 교주님! 지금 이곳은 위험….”
새한교의 교인복을 걸치고 후드까지 눌러쓴 사내는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박새한은 급하게 사내 쪽으로 달려갔다.
거의 동시에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 과반수 이상의 시선이 그 사내에게 모두 쏠려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콰앙!
방태식이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폭음이 나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반대쪽 출입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이런! 방태식부터 잡아!”
천갈궁주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움직였다.
지소연을 비롯해 황가련과 화사한 옷차림의 여성과 쌍자궁주, 그리고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젊은 가면인이 방태식을 뒤쫓았다.
그리고 박새한과 천갈궁주, 그의 좌우에 서 있던 음침한 가면인 둘, 그리고 별말 없이 조용히 있던 두 명의 가면인은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누가 감히 우리 새한교를 힘으로 침입하려고 한다는….”
박새한이 비틀대는 교인을 부축하며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
“놈에게서 떨어져!”
천갈궁주가 벼락처럼 소리치며 교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후웅
묵직한 주먹이 공간을 가르며 그대로 교인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탁
무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갔지만, 타격음은 가볍기만 했다.
황급히 뒤로 물러선 박새한이 전신을 보호하며 눈앞의 교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천갈궁주의 주먹을 가슴에 얻어맞았음에도 단 1센티도 밀려나지 않고 멀쩡하게 서 있는 교인.
후드를 눌러쓰고, 오른손은 괴로운 듯 얼굴을 붙잡고 있던 교인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네가…. 침입자로구나.”
박새한은 눈앞의 교인이 저릿할 정도의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이곳이 새한교의 본거지에서도 가장 깊숙한 장소라는 생각에 벌써 침입자가 여기까지 숨어들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스윽
교인이 허리를 펴자 그의 건장한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고개까지 바짝 치켜든 자.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도 똑같은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이럴 수가!”
가면을 마주한 박새한은 기겁하며 놀랐다.
그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가 똑같았다.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
그들이 본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눈구멍만 존재하는 새하얀 가면.
그 가면의 이마 위에는 무려 열두 개의 꽃잎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 * *
5분 전.
한수호는 새한교의 본거지에서도 가장 깊숙한 장소까지 숨어들 수 있었다.
사효자굴 구석에 나타난 지하 계단을 통해 50여 미터 아래로 내려간 한수호를 맞이한 건, 크고 웅장한 모양의 신전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마치 게이트 너머에만 존재하는 보더쉘터를 연상시키는 구조물 속에는 많은 새한교의 교인들과 온갖 기계 장치들이 가득했다.
한수호는 혼잡한 와중에도 김영수의 상위 교인을 찾아내 그에게서 지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내린 지시는 이곳의 수많은 기계 장치들 중, E47구역을 감시하는 장치를 철저히 보호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장치를 조작해 누구도 여길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수호는 그 지시를 통해, 여기서 무슨 사고가 터질 것임을 감지했고, 김영수의 기억에서 얻어낸 정보로 ‘중역 회의실’이라는 장소가 있다는 것까지 생각해냈다.
‘중요 인물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있는 모양이군.’
한수호는 상위 교인이 장치 관리를 맡기고 사라지자 곧바로 기계를 개조시켰다.
[개조된 장치]
-E47구역 전체를 감시하고, 격벽을 내릴 수 있는 컨트롤러이다.
-2급 이상의 새한교인들만 아는 조작 방법으로 E47구역의 모든 자동화 무기를 가동시킬 수 있다.
-히든피스: 4분 뒤, 가짜 정보를 모든 전자 장비에 전송하여 외부에서 적이 침입한 것처럼 위장한다.
한수호가 기계에 추가한 건, 바로 히든피스였다.
정확히 4분 뒤에 엉뚱한 정보를 흘려 비상을 걸리게 만들고, 그 틈을 이용해 중역 회의실에 모여 있는 황도13궁의 간부들을 최대한 해치우는 것.
히든피스는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밑밥이었다.
은밀하게 자리를 빠져나온 한수호.
그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새한교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마주한 건 커다란 공간의 중앙에 마치 코어처럼 자리하고 있는 검은 건물이었다.
건물의 사방엔 새한교인들이 가득했다.
대충 확인해보니 특급 이상의 마공사만 20명이 넘었다.
다행히 주변 곳곳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잡동사니들이 잔뜩 있었다.
그곳에 숨은 한수호는 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마나파동을 뿜어내 감지 범위를 크게 확장시켰다.
한수호가 아니면 절대 느낄 수조차 없는 마나파동.
그건 검은 구조물 안으로까지 파고들었고, 그 안에 몇 명이 있으며 어떤 인물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까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한수호는 검은 구조물로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중역 회의실의 상황을 알아내고는 적잖이 놀랐다.
‘궁급 이상의 마공사가 13명이나 된다고?’
회의실 안에는 13명의 마공사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궁급 이상의 강력한 마공사였다.
‘내가 너무 쉽게 봤나?’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대화를 듣고 나니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군. 원래 박새한과 방태식 모두 극우파 소속이었는데, 박준규가 죽게 되면서 박새한이 노선을 바꿔 탄 거였어. 이 자리는 방태식을 극좌파로 끌어들이거나, 극우파에서 떼어내기 위한 함정인 거고.’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한수호.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적어도 박새한과 새한교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한수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개조 4단계의 커스터 마이징 효과가 풀리고 말았다.
김영수의 얼굴이 사라지자 한수호 본인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급히 후드를 눌러쓰고, 인벤토리에 있던 ‘유일의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썼다.
스으응
가면을 쓰자마자 온몸으로 거대한 기운이 훅 밀어닥쳤다.
‘정말 엄청난 힘이야….’
이미 광폭화 6단계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가면에서 전해지는 힘 덕분에 더욱 강해진 느낌이었다.
준비를 마친 한수호는 E47구역 감시 장치에 심어 놓은 시간을 확인했다.
침입자 경고가 발생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분여.
한수호는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이곳을 지키는 모든 새한교인들을 잠재우기로 했다.
피잇-
한수호의 움직임은 한 줄기 바람과 같았다.
특급 이하의 마공사들은 아예 감지조차 못했고, 몇몇 진급 마공사들만 희뿌연 그림자가 잔상을 그리는 걸 간신히 알아봤을 뿐이었다.
퍼버벅. 퍼억!
한수호는 커다란 중역 회의실 외곽을 15초만에 빙 돌면서, 주변을 철저히 감시 중이던 교인들 23명을 기절시켰다.
기절시킨 교인들을 한곳으로 모아 놓은 한수호는 단 두 개밖에 없는 회의실 출입구 중 한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를 내어 교인복 곳곳에 피를 묻혔다.
한수호는 그러는 와중에도 마나파동으로 회의실 안쪽을 파악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 다 만나는구나.’
회의실 안에는 한수호도 잘 아는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
총 13명의 인물들.
그중 박새한과 방태식은 이름만 들었을 뿐이지만, 회귀 전에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었다.
지소연이야 얼마 전에 직접 전투까지 벌였었고, 황가련은 월미도에서 한 번, 아카데미에서 한 번 하여 두 번이나 마주쳤다.
그들 말고도 의외의 인물이 자리했다.
그건 바로 당채룡과 박혜리였다.
독공의 대가 당채룡과 채찍을 제 몸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는 고수, 박혜리도 회의실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법원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인챈트 스톤이 숨겨져 있던 계곡에서 살벌하게 전투를 벌였었던 천갈궁의 소궁주도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가 지닌 독특한 마나력 덕분에 알아챘다.
그리고 방태식의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마나력은 황가련의 오빠인 황윤성인 것이 분명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누군지 잘 모르겠군.’
그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지니고 있는 힘은 하나같이 궁급 이상이었다.
어찌 보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의 강한 마공사들이다.
이런 자들이 황도13궁이라는 빌런 단체에 소속되어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들만 아니었어도, 세상의 흐름이 두 번이나 회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그 덕분에 자신이 살아서 지금 존재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한수호가 가면 속에서 씁쓸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갑자기 사방이 떠나갈 듯 큰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한수호가 심어 놓은 히든피스가 발동한 것이다.
한수호는 출입문 쪽에 바짝 붙어 섰다.
삐이잉
출입문 한쪽의 패널에 녹색불이 들어오더니,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밖에 무슨 일이지?
박새한의 음성.
어차피 경고음이 울려 퍼지면 실제 상황이 회의실 안쪽으로도 전달되기 때문에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한수호는 일부러 패널에 손바닥을 댄 채로 뇌전을 일으켰다.
치이익. 치직.
뇌전에 닿자 고장을 일으켜 잡음이 새어 나왔다.
-밖에 누구 없나?
박새한이 답답한지 다시 연락을 취했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외부에서 강제로 침입하려는 자들이…”
치이익.
적당한 시점에 뇌전에 의한 기계 고장으로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지이잉-
굳게 닫혀 있던 검은 차단벽이 바닥 아래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역시, 예상대로야.’
한수호는 일부러 방태식이 앉은 자리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출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 출입문을 열고 안에 있는 사람들 시선을 끌면, 방태식은 알아서 도주를 시도할 것이다.
그럼 황도13궁의 인물들은 어떡하던 두 패로 나뉘게 될 터.
‘나한테 덤비는 자들부터 처리하면 일을 쉽게 풀 수 있다!’
한수호는 모든 상황을 정리한 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였다. 그리고 출입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 * *
한수호가 쓰고 있는 가면에 새겨진 열두 개의 꽃잎 문양.
그걸 본 사람들은 찰나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가면과 이마의 꽃잎 표식은 질서와 위계의 상징.
황도13궁의 궁주들도 기껏해야 여섯 개에서 많아 봐야 일곱 개 꽃잎인데, 눈앞의 인물이 열두개나 되는 꽃잎을 가지고 있으니 경악할 수밖에.
그만큼 지금껏 그들을 다스려온 꽃잎 열 개의 사내는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었다.
이들이 멈칫하는 순간을 한수호가 그냥 둘 리 만무했다.
스팟
한수호가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박새한의 눈이 커지고, 급히 회피기동을 했다.
하지만 한수호의 목표는 박새한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노린 자는 천갈궁주라고 불리던 가면인이었다.
바람처럼 천갈궁주 앞에 나타난 한수호는 그의 가슴에 구멍을 뚫으려는 듯 꽉 오므린 손을 갈퀴처럼 뻗어냈다.
하지만 천갈궁주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의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었음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교차시켜 가슴팍을 보호했다.
한수호는 바로 그 상황을 노렸다.
가슴으로 향하던 손의 방향을 미세하게 바꿨고, 교차된 천갈궁주의 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의 가면을 잡아챘다.
그 상태에서 한수호가 뒤돌려차기를 날린 순간, 천갈궁주는 가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오히려 앞으로 몸을 내던졌다.
콰앙!
“컥!”
천갈궁주가 신음을 터트리며 회의실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한수호에게 빼앗겼던 가면이 다시 씌워져 있었다.
한수호는 가면을 낚아챘던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가면이 절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다시 천갈궁주를 바라본 한수호.
‘부상을 각오하면서까지 정체를 숨기려 들다니.’
천갈궁주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은 반밖에 없었다.
나머지를 한수호가 쥐고 있었으니 당연한 상황.
그런데, 절반만 드러난 천갈궁주의 얼굴을 본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천갈궁주라고?’
드러난 얼굴의 주인은 한수호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