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천재 마공사-263화 (263/375)

263화

적상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안국사.

거기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삼성각 안에 한 사내가 정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사내의 체격은 그리 크지 않지만,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조금 마른 듯한 인상에 짙은 눈썹.

전체적인 피부는 어두운 편이었다.

그는 조용하게 명상을 하는 듯 규칙적인 호흡을 하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번쩍

사내가 감겨있던 눈을 번쩍하고 떴다.

“정말 날 찾아 이곳까지 온 건가?”

활짝 열린 문밖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는 사내.

그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구식 공법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열어 2시간 전쯤 자신에게 도착한 메시지 하나를 열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2시간 내로 당신을 찾아가겠소. 나에게 힘을 빌려주시오. -∀]

간단한 두 개의 문장.

발신자 표시가 제한되어 있었지만, 사내는 그 문자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방태식….’

문장의 끝에 붙어있는 ‘턴에이’ 표식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단 두 명뿐.

그중 하나는 그의 아내였으나, 그녀는 이미 8년 전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이 문자를 보낸 이는 나머지 한 사람인 방태식이 분명했다.

8년 전, 사내는 아내와 함께 1급 게이트에 들어가 그곳에 숨겨진 특별한 약초 하나를 찾으려고 했었다.

사내의 아내는 오래전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고, 그 지병은 점점 악화되어 이제 남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그러던 중, 아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사내는 아내와 함께 그 게이트로 향했고, 거기서 초거대괴수 ‘삼두백화룡’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삼두백화룡을 쓰러뜨리고, 놈의 레어에서 자라나는 ‘홍엽초’를 취하려 했지만, 결국 양패구상하고 말았다.

삼두백화룡은 파급에 오른 역대급 괴수였고, 사왕오패 중 하나인 사내의 힘마저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다.

아내를 위해 홍엽초를 구하려던 사내는 삼두백화룡의 머리 세 개를 모두 터트렸지만, 그 자신도 가슴이 꿰뚫리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사내의 아내는, 사내가 없는 세상에 홀로 살아남아 무엇을 하겠냐고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

그때, 방태식이 나타나 그녀의 죽음을 가로막았고, 죽어가던 사내의 목숨까지 되살려내는 신기한 능력을 발휘했다.

방태식은 파괴된 사내의 심장을 어마어마한 힘을 함축시킨 아크로로 교체시켰다.

그리고, 삼두백화룡의 심장에 담긴 모든 힘을 그 아크로에 밀어 넣었다.

그 덕에 사내는 살아났고, 홍엽초까지 구해 아내에게 먹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홍엽초는 아내의 병을 완치하지 못했다.

아내는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을 때,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내는 그 반년 동안 모든 열정을 다해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었고, 그의 아내는 웃으면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사내는 방태식에게 크나큰 고마움을 느꼈다.

비록 아내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방태식이 아니었다면 이런 행복한 추억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기에 고마움의 깊이는 무척이나 깊었다.

그래서 사내는 방태식에게 자신의 표식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턴에이였다.

이 턴에이 표식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턴에이 표식이 담긴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당연히 방태식이리라.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삼성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걸음걸이는 평범했지만, 그가 스쳐 가는 공간은 마치 날카로운 검에 베이듯 갈라지고 있었다.

빠직. 빠지지직-

사내의 몸에서 조금씩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그는 안국사의 넓은 뜰로 나와 산 아래쪽으로 펼쳐진 숲을 응시했다.

‘많이도 몰려왔군.’

사내는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열세 개의 기운을 감지했다.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자는 방태식이 분명했고, 그의 바로 뒤에선 인간의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안드로이드?’

방태식이 생체 조작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그의 주변에 인간 같지 않은 안드로이드 개체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이 이상할 건 없었다.

‘음?’

사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13명의 기운 외에도 세 개의 기운을 더 느꼈다.

하나가 다른 두 개의 기운에 쫓기는 상황.

공교롭게도 그들이 향하는 방향도 바로 이곳 안국사였다.

‘사왕에 버금가는 강자다!’

안국사 주변에 나타난 16개의 기운 중, 유독 강한 기운이 하나 느껴졌다.

기운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사내의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

‘이건…. 사대광마 중 하나의 기운인데?’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소름 돋는 기운.

이런 류의 기운을 무의식중에도 뿜어낼 수 있는 존재는 사대광마밖에 없었다.

사내는 양방향에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기운들을 느끼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잠시 가늠했다.

‘허…. 상황이 이래서야, 그 힘을 쓸 수밖에 없겠구나.’

방태식의 뒤를 쫓는 무리만 있었다면 무리할 필요 없이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대광마 중 하나가 끼어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이제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한 방태식을 가만히 응시했다.

* * *

방태식은 안국사의 뜰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를 확인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중년 사내.

8년 전, 우연히 저 사내를 만나 도움을 준 적이 있었고, 그 도움 한 번이 자신을 위험에서 꺼내줄 생명줄이 되어버렸다.

그 생명줄을 쥐고 있는 자는, 현존하는 마공사들을 통틀어 최강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뇌왕!”

한울뇌왕 구천승이었으니까.

“정말 당신이었구려.”

승려복과 유사한 회색 옷을 걸친 구천승이 묘한 표정으로 알은체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저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이렇게 도움을 구하게 되었군요.”

사실 그가 마음먹고 도망친다면 얼마든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구천승이 은거한 장소를 찾은 이유는 배신자 박새한과 다른 극좌파 인물들을 여기서 처리해 버리기 위해서였다.

“내 손을 빌려 저들을 처리하고 싶은 것이오?”

구천승은 이미 방태식의 목적을 파악했다.

그렇다고 그가 방태식과 한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 놈들은 위험한 사상에 빠져, 인류를 도탄에 빠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둔다면 얼마 안 가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아스루나의 대마왕까지 부활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도 원래 저들과 한패인 걸로 아는데?”

“그건…. 그건 다르오. 내가 속한 우파는 공멸이 아닌, 공생이라는 공통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런 우리 우파를 없애고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 속에 밀어 넣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저들을 죽여달라?”

구천승은 자신보다 두어 살 많은 방태식에게 최대한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방태식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가질 시간을 준 인물이 아니었다면 절대 상종하지 않았으리라.

그에게 있어 방태식은 다른 황도13궁의 인물들이나 다를 게 없었다.

황도13궁의 인물들은 ‘정(正)’보다 ‘악(惡)’에 가까운 집단이었으니까.

“뇌왕께서 나와 한 약속을 어기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약속은 지켜질 것이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 또한 힘을 보태야 할 것 같소만.”

구천승은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어느새 11명의 가면인이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박새한을 비롯한 오희창과 당채룡, 박혜리 등이었다.

요마 지소연은 황가련과 함께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구천승을 샅샅이 훑는 중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한울뇌왕 구천승 오라버니네? 저 기억하죠, 오라버니? 10여 년 전, 서울에서 만났었는데.”

지소연은 구천승과 구면이었다.

당시의 지소연은 지금처럼 요마로 불리지 않았었다.

그녀가 요마로 불리며 사대광마 중 한 명에 포함되기 시작한 건, 정확히 11년 전부터였다.

“좋아하는 사내에게 마음을 거절당했다고 세상 모든 남자를 때려죽이려는 요녀 따위를 내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구천승은 지소연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실력마저 무시하는 건 아니다.

사실상, 이곳에서 구천승을 제외하고는 지소연의 무력이 가장 강했으니까.

물론, 잠시 후 또 다른 사대광마가 도착하게 되면 순위는 다시 뒤집어진다.

“에이, 너무하시다. 그땐, 잘되길 바란다며 응원까지 해 주셨으면서…. 뭐, 어쨌든. 그때의 인연도 있고 하니, 그냥 빠져주기만 하면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게 해 드리죠.”

“황도의 궁주가 된 게 아니라, 이프로드의 첩이라도 된 것 같군. 군소리 말고 그냥 돌아들 가라. 그러면 목숨까진 빼앗지 않겠다.”

구천승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황도13궁의 가면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이거, 한울뇌왕께서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신 모양인데?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린 열한 명이야. 당신 혼자 우리를 다 감당할 수 있을까?”

말을 한 자는 오희창이었다.

그는 여전히 반쪽짜리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나머지 반은 후드를 눌러써서 가리고 있었다.

그의 말에 구천승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목소리 감춘다고 모를 줄 아나, 오희창?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사왕오패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군. 사패극 오희창이 고작 이프로드의 명령을 듣는 황도의 개였다니. 후후후. 웃기는군.”

“닥쳐! 네가 뭘 안다고 나를, 아니 우리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하지? 내가 쪽수에 겁먹고 물러설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면, 곧 후회하게 될 거다.”

구천승이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말하며 발을 한차례 구른 순간,

쿠웅

주변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뒤흔들렸다. 더불어,

콰지지지직

구천승의 몸에서 튀어 오른 뇌전의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지며 눈부신 광경을 만들어 냈다.

“과연, 한울뇌왕의 명성은 헛된 게 아니었구려. 오늘, 안계를 크게 넓힐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한 가면인의 입에서 조금은 어눌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그는 박혜리와 함께 황도13궁의 행사에 전격적으로 끼어들기로 한 당채룡이었다.

“빌어먹을 황도의 개들이 이젠 더러운 들개의 무리까지 끌어들였구나.”

구천승은 당채룡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말이 심하시군요. 사왕의 한 명이 어찌 그리 천박한 말을 쓰시는 거죠?”

박혜리가 당채룡을 대신해 한소리 치자, 구천승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딴 가면 뒤에 숨어서 재잘대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당당하게 얼굴 까고 해라.”

“흥! 더는 말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박혜리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신의 일행들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츄아아악!

안국사 뒤쪽 숲에서 푸른 계열의 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붕 날아올랐다.

“웬 놈이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가면인 하나가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더니, 푸른 옷의 사내를 향해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휘웅

가면인이 휘두른 검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졌고, 그대로 사내의 가슴을 베어버릴 것 같았다. 그때,

따앙!

젊은 사내가 손을 휘두르자 맑은 소리가 나며 검이 튕겨져 나갔다.

“크윽!”

가면인은 기세 좋게 선수를 쳤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는 오희창의 아들이자 천갈궁의 소궁주인 오준하였다.

그런데 손으로 검을 튕겨낸 젊은 사내도 무사하진 못했다.

퍼억!

그의 바로 뒤를 쫓아 날아오른 검은 그림자의 손에 등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윽!”

사내는 그 충격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굴러 구천승 앞에서 멈춰 섰다.

“자네 괜찮나?”

방태식이 사내를 급히 부축했다.

“괘,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으윽!”

젊은 사내는 품에서 포션을 꺼내 급히 삼켰다.

“그런데, 자네…. 혹시 삼패창 강지훈의 아들 아닌가?”

방태식은 젊은 사내의 얼굴을 금방 알아봤다.

“저를 아십니까?”

“알지, 알아. 자네 아버지를 뵈러 강씨호왕가에 몇 번 들른 적이 있다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여기 이분은….?”

포션 덕분에 금방 안색이 좋아진 강우진은 차가운 얼굴로 자신은 본 체도 하지 않는 구천승을 힐끔거렸다.

“그분은 바로 한울뇌왕….”

“잠깐.”

구천승이 손을 뻗어 방태식의 말을 막았다.

그는 방금 강우진이 튀어나온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곳엔 한 사람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으로 검은 살기를 풀풀 풍기며 다가오고 있는 그는 건장한 풍채에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을 지닌 중년 사내였다.

그 사내를 가장 먼저 알아본 자는 방태식이었다.

“살마 문천득?”

살마 문천득.

사대광마 중에서 혈마 신유에 버금가는 강함을 지닌 자가 바로 그였다.

“후후. 날 바로 알아보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문천득은 거만한 표정으로 방태식을 노려보다가 구천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구천승을 바라본 문천득은 뭔가 이상한 현상을 접하고 흠칫 놀랐다.

‘날 보는 게 아니야?’

당연히 자신의 출현에 구천승이 놀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을 보니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뭔가에 굉장히 놀란 듯, 잔뜩 긴장한 눈빛까지 보이고 있었다.

문천득은 자기도 모르게 구천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자신을 덮쳐오는 검은 그림자를 목격하고 말았다.

문천득은 생전 처음이었다.

살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에 자신이 있었던 그가 누군가에게 뒤를 잡혀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전혀 몰랐을 줄이야.

적을 발견하자마자 급히 마나력을 끌어올린 문천득은 순식간에 코앞에 날아든 적을 향해 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촤좌좌좍!

그의 특기인 십자참도(十字斬刀)였다.

이 수법에 걸리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자라도 무기와 함께 몸통이 통째로 갈라지고 만다.

문천득은 적이 부상을 입을 때를 대비해 후속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슈칵!

빛이 번쩍한 순간, 적은 사라졌고.

푸욱!

적이 쥐고 있던 단검이 옆구리를 깊숙이 긋고 지나갔다.

“흐읍!”

문천득은 답답한 신음 소리를 내며 신속하게 몸을 뒤로 뺐다.

[뭐 하십니까? 이대로 포위당해서 죽고 싶으신가요?]

갑자기 등장한 자의 귀신 같은 움직임에 혀를 내두르던 구천승의 귀를 파고든 음성.

그 음성의 주인은 바로 한수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