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다섯.”
“넷.”
숫자가 줄어들수록 황도13궁의 가면인들의 눈빛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에 있는 가면인들은 하나같이 궁급 이상의 고수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젊은 사내의 협박에 어찌 꼬리를 말고 도망칠 수 있을까.
그들 한 명 한 명이 대한민국 마공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기에 도망은 있을 수가 없었다.
“셋.”
이제 남은 숫자는 둘.
가면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지 눈만 뒤룩뒤룩 굴릴 뿐, 도망을 치지도 그렇다고 당당히 남아서 최후의 결전을 벌일지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둘.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한수호가 마지막 숫자를 말하려고 할 때,
쾅!
부상 당한 박혜리를 돌보던 당채룡이 한수호를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의 눈에는 복수의 빛이 가득 찼고, 검을 거머쥔 손은 시커멓게 물들어 비릿한 독향을 풍겨내고 있었다.
“죽여 주마!”
당채룡은 극도로 분노했다.
중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마공가문들 중에서도 최상위 가문에 속하는 제독당가.
그 제독당가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드는 고수 당채룡이 대한민국에까지 와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박혜리.
그녀의 미색에 단단히 빠진 당채룡이었기에 그녀를 다치게 만든 한수호가 증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당채룡은 자신의 분노를 풀어낼 상대를 단단히 잘못짚었다.
독기로 가득한 당채룡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수호.
상대의 검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그가 검을 향해 돌진하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순간,
퓻
한수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고.
퍼억!
‘검기상인(劍氣傷人)’을 펼치려던 당채룡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펑퍼짐한 옷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퍼어어어어엉!
그의 온몸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당사부!”
당채룡의 처참한 죽음을 목도한 박혜리가 부상을 잊은 채 벌떡 일어섰다.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구천승과 일전을 벌이던 문천득도 당황했고, 박새한 또한 기겁하며 놀랐다.
오죽하면 황가련의 지독한 염마력에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지소연까지 당채룡의 황당한 죽음을 목격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머뭇거림은 이 전투의 중요한 승부처가 되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눈을 판 문천득의 어깨로 구천승의 벼락이 꽂혀 들었고, 공의 영역으로 모든 공격을 무효화 시키던 박새한은 제때 특성을 사용하지 못해 복부에 강력한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가장 경악스러운 건 오희창이 뿜어낸 빛무리를 손에 거머쥔 한수호가 어느새 그걸 한 가면인의 가슴에 쑤셔 박았다는 사실이었다.
“커헉!”
핏물과 함께 격하게 토해진 신음성.
그로 인해 그가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져 땅으로 떨어졌다.
고스란히 얼굴이 드러난 중년 사내.
그의 얼굴을 알아본 구천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오패편 윤관호…?”
사패극 오희창에 이어 사왕오패의 하나인 오패편 윤관호까지 황도13궁의 고위 간부였다는 사실이 구천승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적어도 오패편 윤관호만큼은 황도13궁과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윤관호의 사람 됨됨이는 정직했고, 정의로웠으니까.
“이…. 이런 개자식이….!”
윤관호가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한수호를 노려봤다.
열두 개의 꽃잎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는 한수호는 무감정한 얼굴로 윤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그 어떤 동정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러게 다섯이 되기 전에 도망쳤어야죠.”
한수호는 피식 웃으며 윤관호의 가슴에 박혀있던 손을 천천히 뽑아냈다.
“컥!”
윤관호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뿜어지며 눈동자의 움직임이 덜컥 멈춰 섰다.
한수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윤관호를 힐끗 내려다봤다가 문천득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다시 셋을 세겠습니다.”
느긋하게 내뱉는 한마디.
그 짧은 말에 동굴 안의 가면인들 모두는 소름이 돋았다.
게이트를 손으로 쥐고 모습을 감쪽같이 감춰버리더니 단 몇 분 만에 귀신처럼 나타나 궁급 마공사 두 명을 단숨에 죽여버렸다.
제독당가의 당채룡은 그렇다 쳐도, 오패편 윤관호까지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어버릴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 중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문천득마저 한수호의 실력에 잔뜩 긴장할 정도.
“셋.”
한수호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사패극 오희창과 도끼를 든 가면인 하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행동에 제약을 걸 수 없었다.
문천득과 박새한은 구천승의 파상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지소연은 황가련의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다.
오직 박혜리 혼자만이 지독한 살기를 내뿜으며 한수호를 향해 다가서고 있을 뿐.
한수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방금 윤관호의 가슴에서 뽑아낸 심장을 콱 터트려 버렸다.
‘쇄혼과 돌파의 시너지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이야.’
사실 한수호가 방금 전에 보인 실력은 그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적의 무기를 튕겨내기 위해 오른손에 쇄혼을 발동시키고, 거기에 돌파 특성까지 덧씌웠을 뿐인데 생각지 못한 엄청난 위력을 만들어 냈다.
당채룡의 몸을 관통해 터트려 버린 것도 모자라 오패편 윤관호의 가슴까지 꿰뚫어 버리다니.
순간적인 파괴력만 따져보면 광폭화 6단계나 괴인혈보다도 강력했다.
게다가 돌파 특성의 쿨타임은 불과 2초.
한수호는 언제든 돌파를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오늘 네 놈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
박혜리가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한수호를 향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뱀처럼 날아드는 채찍의 움직임은 동굴 벽이며 바닥을 때려 부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한수호의 바람과 같은 움직임은 따를 수 없었고, 애꿎은 허공만 후려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수호가 채찍을 어깨 위로 흘려버리며 다시 돌파를 발동시켰다.
퓻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른 한수호.
쇄혼으로 달구어진 손이 박혜리의 가슴을 꿰뚫으려는 그 순간,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탁
쇄혼의 힘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도 가벼운 타격음.
한수호의 공포스러운 공격을 스폰지처럼 흡수해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박새한이었다.
“내 앞에서 네 공격은 통하지 않는…. 컥!”
한수호를 비웃던 박새한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완전히 흡수한 줄 알았던 한수호의 공격이 ‘공의 영역’ 특성을 사용한 박새한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만 것.
하지만 박새한은 그 상황에서도 한수호가 다음 공격을 이어갈 수 없도록 한수호의 손을 콱 움켜쥐었다.
이때다 싶은 박혜리가 채찍을 휘둘러 한수호의 허리를 휘감았고,
한쪽에서 기회만 보고 있던 오희창이 두 개의 극을 휘둘러 한수호의 목 양쪽에 구멍을 내려 했다. 하지만,
터덩!
한수호가 공간 조작 특성을 사용하자 목 부위에 투명한 방패막이 생성되며 쌍극을 튕겨냈다.
두 팔과 함께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혀진 오희창.
한수호가 그의 목을 수도(手刀)로 베어버리는 순간,
우드드득
그를 허리를 휘감고 있던 채찍이 엄청난 힘으로 옥죄기 시작했다. 그 찰나의 틈에 수세에 몰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지소연이 그녀의 고유 특성인 ‘유체화’로 황가련의 공세를 빠져나와 한수호의 머리를 손으로 찍어버리려 했다.
꼼짝없이 두개골에 구멍이 날 상황.
그때, 한수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몸체를 잃은 황윤성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한수호 대시 지소연의 날카로운 손톱 공격을 막아낸 사람은 바로 황가련이었다.
콰득
10센티가 넘는 지소연의 손톱이 등허리를 깊숙하게 파고들자 황가련은 핏물을 울컥 토해냈다.
그 상태에서도 황가련은 등 뒤로 손을 뻗어 지소연의 손을 콱 움켜잡았다.
“반드시…. 이 요마를 죽여… 줘요.”
황가련은 오빠 황윤성의 머리를 위로 휙 내던지고는 한수호의 허리를 휘감은 채찍에 최후의 염마력을 뿜어냈다.
화르르르륵!
수천 도가 넘어가는 뜨거운 염마력에 채찍은 삽시간에 불타버렸다.
채찍이 끊어지자 한수호는 그대로 뛰쳐나가 지소연의 목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스칵!
깔끔하게 잘려 나간 머리 하나.
지소연의 머리를 몸과 분리시킨 건 한수호의 검, 라뮬이었다.
화아아악!
라뮬이 뿜어내는 염화의 기운은 지소연의 머리를 단숨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머리를 잃어버린 지소연의 몸통이 그대로 엎어진 순간, 부상을 입은 문천득과 박새한, 그리고 오희창과 도끼를 든 가면인까지 냅다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단 한 명.
박혜리만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물러서지 않고 한수호를 향해 잘려 나간 채찍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박혜리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마나력을 끌어 올려 2미터도 채 남지 않은 채찍에 쏟아 부었다.
한계에 다다른 마나력이 뭉쳐 들어서일까?
잘려 나간 채찍의 끝부분에 반투명한 기운이 채찍처럼 튀어나왔다.
촤르륵. 촤좌좍!
채찍이 난도질하듯 허공을 찢어내기 시작하자 한수호의 움직임이 잠시 봉쇄되는 듯했다. 하지만,
콰득
한수호가 날아든 채찍을 손목에 휘감아 버린 순간, 분위기가 단숨에 반전했다.
“이제야 기억났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한수호의 담담한 한마디.
박혜리는 한수호가 갑자기 꺼낸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을 이전에 봤던 것 같은 말투.
하지만 박혜리는 한수호와 같은 강력한 마공사를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문뜩,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북인천 삭시고개에서의 그놈?”
박혜리가 떠올린 건 삭시고개에서 국수대 요원들의 탈출을 도왔던 마스크 사내의 모습이었다.
가면을 쓴 한수호의 모습은 묘하게 그 마스크 사내와 닮아있었다.
그 말에 한수호는 쇠고랑 위로 휘감긴 채찍을 확 끌어당겼다.
순간, 강력한 완력에 박혜리의 몸이 확 끌려갔고, 한수호는 그런 박혜리의 귓가에 속삭이듯 한마디 했다.
“그전에도 만난 적이 있지요. 10년 전, 지리산에서.”
귓가를 관통하는 속삭임에 박혜리는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10년 전이라는 시점과 지리산이라는 장소가 일치하는 사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너…. 너…!”
박혜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며 한철형이라는 이름을 꺼내려는 그 순간,
한수호가 내버리듯 집어던진 라뮬검이 마치 유도미사일이라도 된 듯 허공을 휘돌아 날아들었고,
퍼억!
박혜리의 목 중앙을 정확히 관통해 버렸다.
“크륵…. 너… 한…크르륵. 철….”
서걱
한수호가 라뮬검의 손잡이를 잡아 옆으로 베어버렸다.
투둑. 투르르르….
지소연에 이어 박혜리의 머리마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곧바로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버렸고.
쿠웅
머리를 잃은 박혜리의 몸통이 바닥에 엎어진 순간, 한수호의 앞으로 구천승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도 치열한 전투를 치른 탓에 몸 여기저기에 생긴 상처로 인해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한수호는 그런 구천승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놈들을 왜 그냥 놓아준 겁니까?”
동굴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구천승과 한수호, 단둘뿐이었다.
그 사이 황도13궁의 고위 간부 네 명이 쏜살같이 동굴을 빠져나갔던 것.
구천승은 잔뜩 찌푸린 눈을 하고 있는 한수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깟 쓰레기 같은 놈들 넷보다, 네 목숨 하나가 더 값지니까.”
구천승이 씁쓸하게 웃으며 꺼낸 말에 가면에 가려진 한수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웃음을 그렸다.
“용케…. 눈치채셨군요. 우웨엑!”
한수호가 핏물을 울컥 토해내며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구천승은 그런 한수호의 몸을 옆에서 부축해 주었다.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몇 단계나 뛰어넘는 힘을 사용하다니…. 네가 단단히 미친 게로구나.”
한수호를 나무라면서도 구천승은 손을 빠르게 움직여 한수호의 몸 곳곳의 혈도를 짚었다.
한수호의 온몸에서는 핏줄이 터져 진한 핏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구천승이 혈도법을 알고 있어,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한수호는 잠시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실, 한수호의 몸이 이런 상태가 된 이유는 한계를 넘어서는 마나력을 무식하게 끌어올렸기 때문이었다.
광폭화가 쿨타임에 들어간 이상, 그가 지닌 최강의 패는 괴인혈과 라그나로크, 그리고 진.용마검뿐이었다.
하지만 괴인혈을 발동시키면 3천밖에 남지 않은 마나력으로 얼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라그나로크와 진.용마검은 이들 앞에서 아직 사용해선 안 되는 일이다.
아직 이프리트의 진정한 수장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지닌 패를 먼저 꺼내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마나력을 최대한으로 쥐어짰다.
그래서일까?
한수호는 자신의 ‘육체한계치’ 수치가 ‘3/3’까지 상승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육체의 최대 한계치까지 차오른 숫자.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며 십여 곳의 혈관이 터져버렸다.
급격히 기운이 빠져나갔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핑 돌았다.
만약, 한수호가 ‘상처 회복’ 특성을 발동시키지 않았다면 진작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