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참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로구나.”
구천승이 A급 포션을 꺼내 한수호에게 한 병을 넘기고 그 자신도 한 병을 들이켰다.
구천승 역시 몸에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가벼운 자상인지라 포션을 흡수하자 곧바로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반면, 한수호의 상처는 포션을 마셨음에도 쉽사리 아물지 않았다.
그만큼 한수호가 입은 상처는 평범한 게 아니었다. 상처 회복 특성으로 쉽사리 아물지 않을 정도로.
“금방 회복될 겁니다.”
한수호는 몸 전체에 가득 찬 고통을 근성으로 참아내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황윤성의 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몸으로 또 무얼 하려고?”
“가여운 한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려고요.”
한수호는 황윤성의 머리를 주워 든 다음, 편안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한 황가련의 시체까지 수습했다.
황윤성의 머리를 황가련의 가슴에 안겨주고, 시체를 안아든 한수호는 동굴의 가장 안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 시체와 머리를 함께 넣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평안하기를….”
한수호는 두 사람의 명복을 빌어주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삐링-
>>당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합당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본 보상: +10,000,000LP
>>추가 보상: +2,000,000LP
한수호의 눈앞에 떠오른 황당한 메시지들.
사실, 황가련이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직후에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당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소녀가 소원을 남겼습니다.
>>소녀의 소원은 평온한 안식입니다.
이 메시지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한수호는 황가련과 황윤성을 한 곳에 묻어준 것이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행동도 아니었고, 그저 어린 황가련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뿐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을 못 했던 엄청난 보상이 나왔다.
도합 1천2백만이나 되는 엄청난 포인트.
“잔인한 성격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감성적인 면이 있군.”
구천승도 한수호 옆으로 와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죽일 놈들을 죽였을 뿐입니다.”
“내 말은 자기 몸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는 놈은 네가 처음이라는 뜻이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면, 저도 할 수 없었겠죠.”
“너처럼 독한 놈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아무튼…. 이제 어쩔 것이냐?”
구천승은 한수호와 함께 황가련 남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마지막 계산을 해야겠지요.”
동굴 밖은 조용했다.
이곳 주변에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던 새한교의 교인들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구천승은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도망쳐 버린 적들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슥 훑어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쯔읏. 네가 원하는 대가를 치러줄 손님들이 죄다 사라져 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제가 바라는 계산은 어르신께 받아낼 생각입니다만?”
“나한테?”
구천승은 이 발칙한 젊은 녀석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한울뇌왕 구천승을 상대로 계산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놈이라니.
한수호는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구천승을 향해 다시 한번 눈웃음을 그렸다.
고통 내성이 82%나 되어서 그런지 이젠 어느 정도 참을 만했다.
“아까 어르신이 열어버린 게이트 말입니다.”
“웃기는 놈이군. 그걸 내가 열었다는 건 또 어찌 알았느냐?”
“2056년도에 이곳에 2급 게이트가 열린다는 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허어…. 네놈도 회귀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구나. 어쨌든, 그래서?”
구천승은 적들이 완전히 물러갔다는 걸 확인하자 편안한 마음으로 근처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옆에 나란히 앉은 한수호는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게이트…. 저한테 파시죠.”
“…. 뭐?”
“제가 어르신을 도와 적을 물리친 업적이 있으니 최대한 싸게 파십시오.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한수호의 말에 구천승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게이트를 판다?
물론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대부분의 게이트는 정부에서 관리하지만, 일부 안정성이 확보된 게이트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경매에 붙여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동굴에 구천승이 열어버린 게이트는 정부 소유도 아니었고,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에 누구에게 팔 수 없었다.
“너도 시간을 거슬러 왔으면 알겠지. 아까 그 게이트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미 거기서 얻을 건 다 얻은 상태이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구천승은 회귀 전에 이미 게이트에 들어가 뇌격혼 특성을 얻었으며, 뇌신기를 더욱 강하게 업그레이드할 뇌의 기운까지 얻었으니까.
하지만, 구천승에게 이곳에서 열린 게이트는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뇌격혼이 중첩을 통해 단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것.
뇌의 기운도 중첩이 가능했기에 뇌신기의 위력 또한 배로 높일 수 있었다.
그런 게이트를 어찌 한수호의 말 몇 마디에 넘겨줄 수 있으랴.
“너도 모르는 게 있다. 때문에 게이트는 너에게 팔 수 없다.”
구천승의 단호한 말에 한수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 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게이트 보관할 장소를 제가 지정할 수 있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한수호가 진짜 원하는 건 이거였다.
처음부터 이걸 말하면 거절당할 수 있으니, 게이트를 팔라는 말로 일부러 자극한 것이다.
한수호 또한 게이트를 살 생각은 없었다.
“보관할 장소를 네가 정하겠다고?”
“보관 장소를 어디로 할지 저에게 맡겨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게이트를 다시 보여드리죠.”
“네가 게이트를 옮겨 둔 장소로 날 데려가겠다 이거냐?”
과연 구천승은 눈치가 빨랐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게이트를 어디로, 어떻게 숨겼는지부터 캐물었을 텐데, 구천승은 한수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약속해 줄 수 있겠습니까?”
“….”
이번엔 구천승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아무리 간단한 약속이라도 쉽사리 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예 약속을 안 하면 모를까, 그 자신이 직접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기에 섣불리 약속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구천승이 꺼낸 말은 한수호로서도 완전 의외의 내용이었다.
“네가 내 뒤를 잇겠다고 약속하면, 나 또한 약속해주지. 그래야 일방적인 약속이 아닌, 정당한 거래가 되는 것이고.”
“뒤를… 잇다니요?”
평소 크게 놀라는 일이 적은 한수호였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구천승의 뒤를 잇는 인물은 바로 강우진이다.
회귀 전에도 구천승의 후계자는 강우진이었을 터.
이번에도 구천승은 강우진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째서 이번엔 같은 미래를 걷지 않고 스스로 비틀려고 하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라면 알고 있겠지.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도 내가 강우진을 후계자로 삼았었다는 사실을.”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해보였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난 강우진만큼 마공사로서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자를 본 적이 없다. 너도 녀석에 비하면 자질이 한참 부족하지.”
강우진과 비교당하는 말에 한수호는 속으로 발끈했지만, 겉으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자질이 독보적이기에 그 녀석이라면 인류의 존망을 맡겨도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 생각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어떤 변화죠?”
“바로 너라는 변화.”
“…네?”
한수호를 바라보는 구천승의 두 눈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날 봤던 날, 나 또한 널 본 기억이 있다.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친우를 잔인하게 죽여버린 날 닮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이 네 눈빛에서 느껴졌지.”
“그땐…. 그랬습니다.”
“그날 이후로 11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넌 이미 나와 버금가는 강자로 거듭났구나. 그게 가능했던 건, 결코 자질의 문제가 아닌 것 같고.”
구천승은 한수호가 고작 11년 만에 이처럼 강력한 마공사로 변모할 수 있었던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노력이라는 걸 했을 뿐입니다.”
“맞다.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 노력이지. 우진이는… 녀석은 그 노력의 마음이 부족하고.”
거침없이 내뱉는 구천승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강우진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놀라운 자질이 있지만, 그 자질을 더욱 돋보이게 해줄 마음가짐은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반면, 한수호는 자질은 강우진에 비해 떨어지지만 마음가짐 만큼은 구천승을 크게 흡족하게 할 정도로 단단하고 깊었다.
구천승은 한수호의 그 점을 높게 사고 있었다.
“저를 그렇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하군요. 하지만, 묻겠습니다. 제가 어르신의 뒤를 잇는다고 해서 제게 어떤 이익이 생길까요?”
“첫째, 네가 원하는 그 게이트를 가질 수 있게 되겠지.”
“게이트를요?”
이건 생각 이상으로 큰 이득이었다.
안 그래도 한수호는 게이트를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차선책으로 보관 장소를 지정할 권한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 게이트를 그냥 주마. 그걸로 네가 떡을 사 먹든, 사탕을 사 먹든 난 상관하지 않으마.”
“두 번째도 있습니까?”
“물론 있지. 둘째는 네 몸에 뇌신기를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뇌신기가 무언지는 알겠지?”
뇌신기.
한수호도 구천승의 뇌신기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한울뇌왕이라고 불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 뇌신기 때문이었으니까.
뇌신기는 벼락의 힘 그 자체였다.
마나력을 끌어올리면 몸에서 벼락을 품게 되어 그 어떤 존재도 접근할 수가 없게 된다.
뇌신기는 구천승이 가주로 있는 한울뇌가에서 오랜 시간 가다듬어온 구결에 담긴 정수였다.
이건 오직 한울뇌가의 가주에게만 전해지며, 반드시 일인전승이어야만 했다.
그걸 한수호에게 주겠다?
이건 한울뇌가를 통째로 한수호에게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강우진은…. 버리는 겁니까?”
한수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구천승이 한수호를 후계자로 삼는다면 강우진은 후계자가 될 수 없게 되는 것이기에.
“버리는 건 아니다. 녀석만 한 자질을 지닌 놈은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 어찌 버리겠느냐? 내 후계자로 삼지 않는 대신, 녀석에겐 다른 선물을 주어야겠지.”
“그 선물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참 희한한 놈이군. 넌 어째서 강우진에 관한 이야기에만 이리 예민하게 구는 것이냐?”
구천승의 질문에 한수호는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한수호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렇게 강우진과 관계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뭐랄까, 그냥 그를 보고 있자면 안 좋은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랄까?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적개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낯짝이 마음에 안 드네요.”
“허. 말이 되는 소릴 하거라. 내가 할 소린 아니다만, 그 녀석도 나중엔 세상을 구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게 될 테니 너무 미워하진 말거라.”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네 질문에 답부터 주자면…. 난 녀석에게 특성석 하나를 넘겨줄 생각이다.”
“특성석을요?”
한울뇌왕 구천승이 주는 특성석이라면 분명 보통의 것이 아닐 터.
한수호는 과연 어떤 특성이 담긴 특성석일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구천승은 한수호의 그런 마음을 금방 파악했다.
“알고 싶으냐? 그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는다면 알려주마.”
“….”
한수호가 잠시 머뭇거리자, 구천승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놈도 알 거 아니냐. 지금 이 근처엔 너나 나를 위협할 만한 그 어떤 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후우…. 뭐, 알겠습니다. 하지만, 꼭 특성석에 대한 걸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어르신은 이미 제 얼굴을 알고 계셔서 아무 상관이 없는 것뿐입니다.”
“말이 많구나. 얼른 벗기나 해라.”
한수호는 말이 끝나자마자 가면을 벗어 바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손에서 가면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자 구천승이 눈을 반짝했다.
“거참, 신기한 능력이구나.”
아공간 능력이 있는 아티팩트에 넣지도 않고 그냥 지우듯 없애버리는 광경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잔재주일 뿐이죠.”
한수호는 후드까지 벗어 잘생긴 얼굴을 훤하게 드러냈다.
“어이쿠. 강우진, 그 녀석만큼이나 잘생긴 얼굴이구나. 둘 다 얼굴과 능력 모두를 가졌어. 신도 참 불공평하단 말이지.”
“어르신도 젊었을 땐, 이름 좀 날렸을 것 같습니다.”
“크하하하! 혓바닥 하나만큼은 우진이보다 낫구나. 어쩌면 이 특성석은 우진이보다 너한테 더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구천승은 시원하게 웃으며 손가락에 낀 얇은 은가락지를 손으로 톡 두드렸다. 순간,
퓻
구천승의 손 위로 손바닥만 한 특성석이 나타났다.
그 또한 아공간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고, 특성석을 그 안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
한수호는 구천승의 손 위에 올려진 특성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특성석]
-보유 포인트: 1,000,000LP
-염화룡 이그리아실이 죽어가며, 자신의 드래곤 하트와 초월급 마나력을 사용해 강력한 특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성, ‘염룡아’가 새겨져 있습니다.
>>특성을 흡수하고 포인트를 획득하겠습니까? YES/NO
놀랍게도 특성석에는 침묵의 협곡에서 봤던 0티어 특성인 ‘염룡아’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