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특성석에 뭐가 새겨져 있는지 보이기라도 하느냐?”
구천승은 뭐 하냐는 눈빛으로 한수호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아티팩트에 담긴 정보를 알아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
한수호에게 개조 특성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응시하는 것만으로 정보를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이진 않지만, 대단한 뭔가가 담겨진 것 같긴 하군요.”
한수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염룡아가 새겨진 특성석.
침묵의 협곡에서 최고의 보상 목록에 나왔던 염룡아는 이미 주인이 있는 것으로 나왔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염룡아의 주인은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니라 특성이 담긴 특성석에 주인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0티어 특성을 강우진에게 넘긴다라….’
괜히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강우진이 구천승의 후계자가 되는 건 막아냈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 특성석도 놈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한수호.
구천승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만한 짧은 시간에 한수호는 기가 막힌 묘수를 떠올렸다.
“어르신. 한 가지 부탁을 하겠습니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못 준다. 널 후계자로 삼기로 한 이상, 이것까지 주면 우진이 녀석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걸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딱 13초만 제가 만져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겁니다.”
“13초 동안 그냥 만져만 보겠다고?”
“네. 절대 특성을 흡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수호의 단호한 대답에 구천승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10초도, 15초도 아니고 13초는 또 뭘까?
무언가 의미가 있는 숫자겠지라고 스스로 납득한 구천승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려울 게 없지. 하지만, 명심할 게 있다. 작은 욕심 때문에 더 큰 행운을 발로 차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마.”
구천승은 한수호가 염룡아 특성에 욕심을 부려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행운을 잃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수호는 흔쾌히 대답했고, 구천승은 특성석을 한수호에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특성석을 받아든 한수호.
그는 이 특성석을 가지고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생각이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시도는 해 보자고.’
한수호가 하려는 건, 초감각을 이용해 130초의 여유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초감각 수치 1로 얻을 수 있는 시간은 10초.
현재 한수호의 초감각은 13이나 되기에 2분 10초라는 긴 시간 동안 특성석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분석이 가능하다면, 한수호는 두 가지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첫째, 강우진이 이 염룡아 특성을 갖게 되더라도 제대로 된 특성은 가질 수 없게 마나회로를 교묘히 망가뜨릴 것이다.
둘째는, 한수호가 염룡아 특성의 마나회로를 완전히 이해하여 스스로 인챈트 스톤에 이 특성을 새겨버리는 것이고.
잘만 된다면 일석이조, 일타쌍피의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수호는 특성석을 꽉 움켜쥔 상태에서 오랜만에 초감각을 발동시켰다.
그동안은 단숨에 큰 마나력을 소모하게 되는 초감각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키이이이이잉-
한수호의 눈앞으로 한 줄기 빛이 쭉 그어지며 귓가로 이명이 울려 퍼졌다.
주변에 울리던 새소리와 수많은 자연의 소리가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느려졌다.
공기의 움직임도.
옆에서 한수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구천승도.
평소보다 10배나 느려진 세상 속에서 한수호 혼자만이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갖게 되었다.
‘서두르자!’
한수호는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 특성석의 정보에 나타난 ‘염룡아’에 관한 마나회로를 깊숙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특성 그 자체가 아니라, 특성석에 새겨진 특성이었기에 마나회로를 분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소 3단계로 가려진 마나회로를 파고 또 파고들었고, 결국 미세한 틈으로 염룡아의 마나회로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이뤄내는 데 걸린 시간이 81초.
현실 시간으로 8초에 해당했다.
한수호는 서둘러 염룡아 특성의 정보를 자세히 훑었다.
[특성: 염룡아]
-0티어 상위에 있는 특성입니다.
-마나력 3,000을 소모하여 접촉한 사물, 또는 생명체를 다섯 줄기의 보이지 않는 칼날로 분쇄합니다.
-상대의 방어력 80%를 무시합니다.
-쿨타임: 5분
‘방어력 80% 무시라고? 0티어가 괜히 0티어가 아니구나.’
마나력 3천이 소모되는 만큼,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이 염룡아를 특성으로 획득하게 되면, 제아무리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상대라 해도 평범한 공격 한 방에 그냥 죽여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걸 최대한 엉터리로 만들어야 하는데….’
한수호는 염룡아의 정보를 여기저기 개조해 봤다.
>>’0티어’를 ‘3티어’로 변경하는데 20,000,000LP가 소모됩니다. 변경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ES/NO
>>’마나력 3,000’을 ‘마나력 10,000’으로 변경하는데 22,000,000LP가 소모됩니다. 변경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ES/NO
>>’방어력 80%’를 ‘방어력 10%’로 변경하는데 30,000,000LP가 소모됩니다. 변경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ES/NO
무엇을 수정해도 포인트 소모량이 어마어마했다.
현재 한수호가 보유한 포인트는 1천2백만.
이 엄청난 포인트로도 어느 하나를 수정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3초.
한수호의 시간으로는 30초였지만, 한 번만 개조를 실패해도 끝나는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초감각 수치를 1까지 떨어뜨리면, 몸에 큰 문제가 생기기에 실질적으로는 20초밖에 남지 않은 셈.
짧게 고민을 마친 한수호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수정을 포기하는 대신, 하나의 제약을 추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사용 횟수가 늘어날수록 사용자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를 추가하는데 1,500,000LP가 소모됩니다. 변경된 내용을 저장하시겠습니까? YES/NO
한수호가 추가한 항목은 바로 이것이었다.
‘악영향’이라는 불명확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문제가 생길지 예상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0티어 특성으로서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항목을 추가한 것이다.
한수호는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YES를 선택했고, 항목이 염룡아 특성의 정보에 추가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히든피스: 사용 횟수가 늘어날수록 사용자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추가된 항목 맨 앞에 ‘히든피스’라는 말이 붙어버렸다.
‘이건 오히려 좋은데?’
히든피스가 붙게 됨으로써, 이 염룡아 특성을 흡수하게 될 강우진은 이 정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좋다고 0티어 특성을 흡수했다가 전혀 예상 못한 폭탄을 맞게 될 테니 한수호로서는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특성에 함정을 숨겨 놓는 데 성공한 한수호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초감각 수치가 1까지 내려갔다.
급히 초감각을 꺼버린 한수호.
“잘 봤습니다. 여기….”
한수호가 특별한 행동 없이 그대로 특성석을 돌려주자 오히려 구천승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돌려받은 특성석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특별히 달라진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로서는 한수호가 특성석을 12초 동안 빤히 바라보기만 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볼수록 특이한 녀석이로군. 아무튼, 특성석을 무사히 돌려받았으니 나도 약속을 지켜주도록 하마. 네가 훔쳐 간 게이트는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구천승이 확실하게 결론을 내려주자 한수호는 밝게 웃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어르신을 모셔다드리죠.”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이제 게이트는 네 것이다만, 네가 내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은 반드시 나와 함께 들어가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어깨를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한수호의 말에 구천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호는 구천승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놓고 한마디 했다.
“지금부터 보게 되는 모든 건, 저와 어르신만의 비밀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내 입은 1톤짜리 쇳덩이보다는 무거울 것이다.”
“그냥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구천승을 향해 히죽 웃어 보인 한수호.
그가 눈을 번쩍 뜨는 순간,
퓻
한수호와 구천승이 그 자리에서 지워지듯 사라져 버렸다.
* * *
“잘 다녀오십시오.”
한수호의 인사말에 구천승이 ‘오냐’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2호 게이트 속으로 훅 뛰어 들어갔다.
구천승은 강우진과 방태식이 걱정된다며 게이트부터 다녀오기로 했다.
“주인. 앞으로 저 아재가 사문의 존장이 되는 것인가?”
세 발자국 뒤에 서 있던 월의 질문이었다.
한수호는 구천승을 전투 영역으로 데려온 뒤,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인 월고 살이, 범이 등을 소개시켰다.
그리고 이 공간이 자신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특별한 아공간이며, 오직 한수호 자신만이 자유롭게 이곳을 드나들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구천승은 크게 놀라워했다.
아공간 능력을 지닌 마공사들은 종종 만나봤지만, 한수호처럼 아예 그 공간을 직접 드나드는 마공사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뭐, 비슷해. 그러니까 저 어르신 앞에서는 최대한 예를 차려야 한다.”
“그런가…. 그럼 월은 저 아재와는 대화를 안 하는 게 낫겠다.”
월은 자신이 높임말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에, 한수호를 위해 대화를 안 하는 쪽을 선택했다.
“노력을 좀 해라, 노력을! 높임말 쓰는 게 그렇게 어렵냐?”
“태생이 그런 걸 어쩌라고. 아무튼 주의는 하겠다.”
“살이하고 범이도 잘 교육해. 어차피 걔들은 눈으로 말하는 거니까 글로 존대 쓰는 건 쉽잖아.”
“노력해 보겠다.”
월은 대충 얼버무리듯 대답하고는 다시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혼자 남게 된 한수호는 자신의 눈앞에 자리한 1호, 2호 게이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유현을 통해 얻은 1호 게이트와 구천승이 발생시킨 2호 게이트.
이제 이곳엔 이런 게이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게이트에서 웨이브가 발생하는 일은 아직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로 변하게 되리라.
‘어쩌면, 발자크와의 최종 전쟁도 여기서 벌어질지도 모르고.’
한수호는 문뜩 이곳에 집을 지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원래의 목적은, 이 전투 영역을 가장 안전한 장소로 만들어 가족과 함께 평온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게이트를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이 가능해진 이상, 더는 안전한 장소로 볼 수 없었다.
‘게이트 보관소를 완전히 요새화 시켜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상 이곳에 가족을 데려오는 건 오히려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한수호는 저 멀리서 살이, 범이와 함께 게이트 보관소를 구축하고 있는 월을 잠시 바라봤다.
‘최고의 재료를 사서 최강의 아티팩트로 보관소를 지어보자!’
한수호는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개조 특성을 이용해 이 게이트 보관소를 그 어떤 힘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강력한 건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일단, 지금 할 일부터 확실하게 해 놓고.’
한수호는 바로 보관소를 벗어나 보관소로부터 2백여 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1층 거실에 편하게 누운 그는 상처 회복 특성을 한 번 더 사용했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 꽤나 무겁게 느껴졌던 몸이 말끔하게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상처 회복 특성의 효과는 확실히 대단했다.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말끔하게 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과도한 마나력 사용에 의한 장기 손상까지 완벽하게 치료했다.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치료 계열의 마공사 도움 없이 스스로 힘으로 치료를 해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상처치료 특성도 더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겠어.’
지난번에 치유류 아티팩트를 흡수하게 되면서 2단계로 업그레이드된 효과가 이 정도이니,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간다면 그 이상의 효과가 나올 테니 기대가 컸다.
사실, 치유류 아티팩트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C급 치유 포션은 몇백만 원 선이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지금의 한수호에겐 백만장자 부럽지 않을 정도의 돈이 쌓여 있었으니까.
‘어디 보자….’
한수호는 잡생각을 접고, 현재에 집중했다.
인벤토리에서 인챈트 스톤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제야 절반쯤 차오른 마나력을 스톤에 주입시켰다.
스톤은 밝게 빛나기 시작했고, 한수호의 눈앞에 메시지를 띄워주었다.
>>인챈트를 시작합니다.
>>인챈트 시전자의 각인 적합도는 29%(+50%) 입니다.
>>마나력 1,000을 소비하여 궁급 이하의 특성을 각인할 수 있습니다.
>>각인을 원하는 특성을 선택하세요.(광폭화(6/7)/개조(4/5)/얼음불(최종)/쇄혼/약탈[1]/약탈[2]/돌파/이기어검(최종)/내가중수(최종)/인벤토리(최종)/체질개선/상처회복/공간조작/괴인혈)
‘응? 적합도가 올라갔네?’
한수호의 적합도는 원래 73% 수준.
그런데 지금은 79%까지 상승했다.
그동안 특성이 늘어났고, 여러 경험치가 쌓이게 되면서 적합도도 함께 오른 모양.
한수호는 자신이 분석해낸 염룡아의 마나회로를 인챈트 스톤에 새겨넣을 생각이었다.
적합도로 인해 위력이 살짝 떨어지긴 하겠지만, 명색이 0티어 특성인데 열화판이라도 대단한 위력을 지녔을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각인을 원하는 특성 목록에는 ‘염룡아’가 없다는 점이다.
한수호는 머릿속으로 염룡아의 마나회로를 구체화 시키며 특성 선택 목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조금만 더… 더!’
희뿌옇게만 보이던 염룡아의 마나회로가 점점 구체화 되었고, 구체화된 마나회로의 설계도를 구현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어느 순간,
피잉-
갑자기 눈앞에 빛이 번쩍하더니 특성 목록 끝에 세 개의 글자가 새롭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그 글자를 천천히 읽어봤다.
‘뇌…룡…아?’
목록에 등장한 이름은 염룡아가 아니라 뇌룡아라는 엉뚱한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