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우우우웅
게이트가 잔잔한 떨림을 일으키더니 한 사람을 밖으로 토해냈다.
한수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짙은 혈향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가…’
사방이 피와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분지였지만, 그곳이 다 붉게 보일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피가 흩뿌려진 것인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바다 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었다.
“스승님….”
피에 절어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구천승이었다.
왼손에는 누군가의 팔 한쪽을 들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뇌문의 문주만이 지닐 수 있는 뇌전검을 쥔 채였다.
그런데, 구천승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복부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입가로는 검붉은 피를 흘리며 낮은 탄식을 토해냈다.
“하아…. 결국, 여기까지였나 보구나.”
그의 시선이 한수호 쪽으로 움직였다.
비틀
“스승님!”
한수호는 급히 구천승을 부축했다.
상황을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예상이 됐다.
강지훈.
그가 이곳에 온 것이리라.
구천승이 한 손으로 꽉 쥐고 놓지 않고 있는 팔의 주인은 강지훈의 것일 테고, 주변에 가득 흩뿌려진 피와 살점들은 그와 함께 온 마공사들, 혹은 키이라 같은 무서운 존재들일 터.
구천승은 혼자서 그들과 맞서 싸우다가 이런 상처를 입게 된 것이 분명했다.
“수호야….”
구천승이 한수호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이름을 부른다.
“밀린다 싶으면 게이트로 피하신다면서요!”
“허허…. 막상 배신자를 앞에 두다 보니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구나. 한철형, 그 녀석을 처참히 살해한 놈이 앞에 있는데 어찌 등을…. 쿨럭!”
구천승이 핏물을 울컥 토해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이 상처를 바로 치료….”
말을 하던 한수호의 손을 구천승이 덥석 잡아챘다.
“이미 늦었다. 내 상처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후…. 너에겐 미안하구나. 적어도 강지훈, 그 개자식을 저승길 동무로 삼았어야 했는데, 고작 이 팔 한 짝이 전부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어찌 한철형의 목숨을 이깟 팔 한 짝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그래도 네가 조금이나마 쉽게 복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니 내 죽음이 아예 쓸모없진 않았길 바랄 뿐이…다.”
구천승의 눈에서 빛이 점점 사라져갔다.
한수호는 더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고, 서둘러 구천승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그의 뻥 뚫린 복부 위에 손을 얹었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시면 됩니다.”
“무엇을…. 하려는 게냐?”
구천승이 희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질문을 던졌지만, 한수호는 아무 말 없이 자기 할 일을 이어갔다.
>>약탈 대상이 존재합니다. 상대의 상처를 약탈하여 관련 내성을 획득하겠습니까? YES/NO
한수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에겐 약탈[1]이 있었고, 이 특성이라면 죽어가는 구천승의 목숨을 구하기에 충분했다.
YES를 선택한 순간,
투웅!
한수호의 몸이 튕기듯 뒤로 크게 젖혀졌다.
“크윽!”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수호의 입에서 거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반면 죽어가던 구천승의 얼굴엔 빠르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구멍난 복부는 빠르게 재생이 이루어졌고, 불과 몇 분 만에 말끔한 피부로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만큼 한수호가 받아내야 할 고통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5분 여가 지났을 때,
“우웨에엑!”
한수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왈칵 피를 토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긴 했지만, 고통 내성이 82%나 되는 한수호가 이 정도로 고통스러워할 정도이니 구천승의 부상 상태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구천승은 자신의 몸이 재생됨과 동시에 한수호가 큰 고통을 겪는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정신없이 졸음이 밀려왔고, 눈앞이 빠르게 침침해졌다.
“수…수호…야….”
구천승은 한수호의 이름을 부르는 와중에 잠이 들고 말았다.
강력한 수면제에 취한 것처럼 의지로는 전혀 제어할 수가 없었다.
구천승이 정신을 잃었을 때, 한수호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한수호의 눈앞으로 이제야 내성에 관한 메시지가 등장했다.
>>내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내성을 한 가지 선택하세요.(노화/불/고통/번개/구토/숙취)
한수호는 너무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이 원하는 내성 항목을 정확하게 선택했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크게 향상됩니다.
>>내성 효율은 98%입니다.
한수호가 선택한 내성은 고통이었다.
이로써 고통에 대한 내성이 거의 100%에 근접했고, 그 덕분인지 끔찍했던 고통이 빠르게 진정되기 시작했다.
“후우, 후…. 후.”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한수호가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하면서 표정이 풀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피잉-
이제 막 혼란을 벗어나고 있던 한수호의 감각으로 은밀한 파공성이 느껴졌다.
파공성이 시작된 방향은 남서쪽 약 1킬로미터 지점.
한수호는 그곳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섬전처럼 날아드는 작은 탄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대로 피해버릴까 했으나 교묘하게도 한수호가 피할 경우, 그의 뒤쪽에 누워있는 구천승이 당하는 상황이었다.
‘끝까지 이런 짓을!’
한수호는 이미 이 암습을 가한 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보트 하나.
그 보트 위엔 한 팔을 천으로 칭칭 돌려 감은 상태로 기이하게 생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강지훈.
수하 다섯과 함께 이 섬을 찾아왔던 강지훈은 모든 수하를 잃고, 자신의 팔 한 쪽마저 이곳에 남겨둔 채로 홀로 도망치는 와중에도 마지막 한 방을 놓치지 않았다.
한수호는 이를 뿌드득 갈며 쐐기처럼 날아드는 탄환을 왼손으로 확 낚아채 버렸다.
쇄혼을 두른 왼손은 마나력 2천 5백이 담긴 탄환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냈다.
한수호는 그 상태에서 투수가 와인드 업을 하듯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앞으로 크게 내디뎠다.
꽝!
바닥이 포탄을 맞은 듯 터져나갔다. 그리고,
피잇
폭발을 꿰뚫고 탄환이 다시 튕기듯 쏘아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
탄환이 날아가는 광경은 무시무시했다.
바닥에서 약 30센티 정도 위에 뜬 상태에서 땅과 바닷물을 거칠게 파헤치며 보트를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올 때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탄환에 담긴 위력 또한 두 배 이상이 되어 강지훈을 물어뜯기 위해 날아갔다.
이를 본 강지훈이 기겁한 듯 놀라며 되돌아오는 탄환을 향해 자신의 자랑인 창을 휘둘렀다.
후우웅!
정확히 목표를 가른 줄 알았으나, 탄환은 코앞에서 방향을 크게 선회했고, 결국 강지훈의 몸통을 후려쳤다. 순간,
쿠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보트가 터져버렸고, 강지훈의 모습은 바다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얕았나?’
한수호는 이기어검 특성으로 탄환을 되돌려 보냈지만, 마지막 순간에 강지훈의 몸에 방어벽이 둘러지는 모습을 알아봤다.
탄환은 직격했다.
그러나 강지훈이 죽었는지, 아니면 부상만 입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았다.
‘내가 직접 확인한다!’
한수호는 강지훈의 생사를 확인하기로 했다.
인벤토리에서 고니와 사툴란을 소환한 한수호.
“둘 다 여기서 스승님을 지켜. 그 어떤 자라도 스승님을 해치려고 한다면 이유 불문하고…. 죽여라.”
그 말만 남긴 채 한수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지워지듯 사라졌다.
* * *
“푸하!”
바닷물 위로 솟구쳐 오른 한수호.
그는 낭패한 모습으로 섬의 모래사장에 올라섰다.
“제길!”
한수호는 발을 세차게 굴렀다.
콰직
그 힘에 모래사장에 박혀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두부처럼 으깨어졌다.
한수호는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훈을 찾아 주변 바닷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강지훈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수호의 이기어검 특성에 직격되어 폭발한 보트.
그 잔해는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강지훈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수호의 인간을 초월한 감각으로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건, 그가 살아서 이곳을 도망쳤다는 뜻이었다.
‘내 얼굴을 봤을까?’
그가 살아났다면 한수호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는 굳이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갈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한수호가 아카데미를 다니게 된 이유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가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프리트가 대한민국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장악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이프리트의 수장이 강지훈이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해진 상황.
거기다 형과 쌍둥이 동생은 이미 찾아냈다.
어머니 이태희와 막내 한별이의 생사만 불투명했었는데, 강우진의 기억을 통해 그것도 알아냈다.
남은 건, 강우진을 통해 어머니와 동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아내는 것뿐.
그렇다면 아카데미 생활은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모든 걸 접고 전면전을 준비해야겠구나.’
이제는 더 이상 희희낙락하며 친구들과 어울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이곳 횡경도를 거점으로 삼아 이프리트와 발자크를 상대할 힘을 키우는 편이 훨씬 나았다.
‘오히려 잘된 건가…?’
한수호는 개강에 맞춰 서울에 들렀다가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이곳으로 되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강지훈에게 얼굴을 보인 이상, 자신이 아카데미에 머무는 건 주변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다시 산 정상에 오른 한수호.
그곳엔 여전히 누워있는 구천승과 그 앞에 꼿꼿하게 서서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사툴란이 있었다.
작은 사막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니는 그런 사툴란의 어깨 위에 뒤돌아 앉아 다른 방향을 살피는 중이었다.
“크루룩?”
사툴란이 한수호를 바라보며 왜 빈손이냐는 듯 으르렁거렸다.
“벌써 튀었어. 도망치는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네.”
“크루어어!”
사툴란이 분하다며 발을 쿵하고 굴렀다.
그러자 중심을 잃은 고니가 굴러떨어졌고, 그걸 한수호가 받아냈다.
“스승님은 어때? 괜찮은 거 같냐?”
한수호의 질문에 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머리를 주억거렸다.
고니는 치료계 능력은 없지만 최고 등급의 정교한 몬스터 봇이어서 그런지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건 기가 막히게 잘했다.
“다행이네. 이제 돌아가서 대기해. 필요할 때 또 부르마.”
한수호는 고니와 사툴란은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로 괴인혈 2단계를 발동시켰다.
슈아아아아악
한수호의 몸 주변으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쳤다가 눈 깜작할 사이에 사라졌다.
한수호의 눈에서는 광망이 번쩍였다.
1단계 수인화를 단숨에 뛰어넘어 인간의 모습으로 괴수의 힘을 사용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괴인혈을 통해 마나 친화도를 크게 높인 한수호는 스승 구천승을 둘러업은 상태로 횡경도 게이트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스팟!
한수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사라지며 게이트도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수호가 모습을 감춘 직후였다.
스슥
작지만 울창한 숲으로 된 곳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돌연 나타났다.
키 190이 넘는 장신에 비교적 마른 신체.
거기에 얼굴은 가발인지, 진짜인지 모를 장발로 가려져 있어 용모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한수호가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재밌는 녀석이군. 후후후…. 구천승. 이번 후계자는 제대로 된 녀석을 골랐구만. 아공간 능력을 쓴다는 점만 빼면, 나조차도 탐나는 녀석이란 말이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사내의 눈빛이 더욱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내는 머리 위쪽으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숫자 1을 허공에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놀라웠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는데, 사내의 손가락이 지나가자 종잇장처럼 부욱 찢어지며 균열을 만들어 냈다.
순식간에 길이 2미터, 폭 50센티 크기의 균열을 만들어 낸 사내.
그는 환영인 듯 꿈틀대는 균열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다. 순간,
파앗!
균열은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가 번쩍하고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