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장한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 그녀가 펼쳐낸 건 특성 일도양단.
이 특성이 펼쳐지면 무기가 베어지는 주변 2미터가 거의 진공상태로 변하며 그 어떤 것도 파고들 수 없을 만큼 촘촘한 기막이 펼쳐진다.
따라서 멀쩡한 정신을 가진 자라면 이 특성이 펼쳐지는 동안에는 감히 접근할 생각도 가질 수 없는 게 정상.
그런데 한수호는 달랐다.
오히려 일도양단의 기세를 밀어내며 장한설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한수호는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더니 어깨로 장한설의 손을 툭 올려 쳤다.
그 간단한 동작 하나에 장한설은 으스러지게 쥐고 있던 검을 놓치고 말았다.
붕 떠오르는 검.
그 아래로 섬전처럼 달려든 한수호.
그의 손이 잔영을 흩뿌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 순간,
뽁. 뽀보보보복!
마치 기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장한설의 온몸이 푸른 기운으로 뒤덮였다.
그녀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검을 놓치는 손 모양도 그대로였고, 한수호를 응시하던 눈동자도 멈춰 섰다.
하늘을 높게 날았던 검이 중력에 의해 다시 떨어질 때, 한수호가 그 검을 가볍게 받아쥐었다.
그리고 검을 다시 장한설의 손에 쥐여주었다.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할게.”
한수호가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린 순간,
털썩
장한설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한수호가 방금 펼친 수법은 마나압축법을 응용한 타혈술이었다.
이 타혈술은 오래전 스승 부부로부터 배운 것으로, 마나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 주는 효과가 매우 좋았다.
더군다나 이제는 타혈술의 요체를 완전하게 이해한 터라, 방금 장한설에게 펼친 타혈술의 효과는 탈태환골에가까웠다.
한수호는 최적화된 몸으로 천천히 변화해 가는 장한설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결투대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스윽
손을 친구들 쪽으로 내밀고는 까딱거렸다.
“언제든지 덤벼.”
활짝 웃는 한수호의 미소가 오늘따라 너무나 얄미워 보였다.
* * *
“어우, 씨. 무슨 저딴 괴물이 다 있어?”
최지혁이 바닥에 엎어졌다가 몸을 뒤집으며 한 말이었다.
한수호의 공격 한 방에 나자빠진 것만 벌써 세 번째.
친구들 여섯 명 중에서 아직 한 번도 바닥에 키스하지 않은 건 백윤후 한 명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백윤후보다 장한설이나 이하윤이 더 강해야 정상.
그런데 그 둘이 막아내지 못한 한수호의 일격을 오히려 백윤후 혼자만 막아냈다.
한수호는 이하윤에게도 일말의 애누리 없이 똑같은 강도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격투대 링까지 튕겼던 이하윤마저 바닥과 키스하는 명장면을 만들어 냈다.
이하윤은 이제 마공 아카데미의 여신으로 등극할 정도로 본래의 외모를 되찾은 상태였다.
장한설의 미모도 연예인급이었지만, 이하윤은 그걸 뛰어넘을 만큼 대단했다.
그런데 한수호는 그런 미인을 상대로도 가차 없이 공격해 쓰러뜨렸다.
당연히 이하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오빠가 저한테까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네요.”
이하윤은 퉁퉁 부은 손목을 매만지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하윤, 넌 씨 그래도 낫잖아! 장태산, 저 자식은 나하고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는지, 계속 얼굴만 건드린다고!”
양소혜가 벌게진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나마 장한설과 신소이는 큰 부상이 없었다.
장한설은 한수호가 타혈술을 펼쳐준 이후로 볼썽사납게 나자빠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신소이는 용케 비껴 맞아 운 좋게 흉한 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난 포기. 더 덤볐다가는 병원 가봐야 할 판이다.”
최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이대로 포기하면 장태산 녀석 좋다고 휴학계 내고 도망칠 텐데?”
양소혜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또다시 열의를 불태웠다.
“소혜야. 나도 그만 할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우리가 떼로 덤벼도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는 녀석인데, 굳이 못 가게 막을 필요가 있을까?”
장한설이 링에 기대며 한 말에 이하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말이 맞아. 이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봐. 오히려 더 큰 물에서 놀라고 흔쾌히 보내주는 게 맞는 거 같고.”
“나도 동의. 저 녀석 지금까지 우릴 속인 게 분명해. 애초부터 우리와 급이 다른 실력을 가졌으면서, 우릴 놀리려고 대충 비슷하게 맞춰준 거라고. 젠장. 그것도 몰랐다니. 우리가, 아니 내가 멍청했네.”
최지혁은 기분 나쁜 듯 투덜거렸지만, 그 말에 담긴 진심은 완전 반대라는 걸 이곳의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때,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녹초가 된 듯 주저앉아 있던 신소이가 백윤후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그, 그런데…. 윤후, 너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어? 전보다 훨씬…. 엄청나게 강해진 거 같아.”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백윤후에게 쏠렸다.
백윤후는 이 상황이 어색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가문을 내가 잇게 되었잖아. 그래서 책임감이 더 커져서 그럴 거야.”
“하긴. 이제 대 광양백가의 주인인데, 허접한 우리랑 같이 놀면 안 되겠지. 안 그래?”
양소혜의 비꼬는 말에도 백윤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난 아버지와는 달라. 아니, 달라졌어. 그러니 이젠 나에 대한 편견은 잊어주면 좋겠다.”
백윤후가 정중한 어투로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양소혜가 당황했다.
“아니, 뭐. 그렇다고 그렇게 정색할 건 또 뭐래? 알았으니까 머리는 좀 들어라. 사내자식이 아무 데서나 머리 숙이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백윤후가 미소를 짓자 그 웃음이 친구들 모두에게로 번졌다.
양소혜도, 장한설도, 신소이도, 이하윤도.
그리고 최지혁과 한수호도 모두 웃음을 머금었다.
잠시 후, 한수호는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친구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이건 내가 사과의 의미로 주는 선물이다.”
“선물?”
“이게 뭔데?”
한수호가 친구들에게 건넨 건 아티팩트들이었다.
백진성에게서 얻은 물건들로, 상대의 신체 능력을 훔쳐보거나 능력치를 스캔해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을 달고 있었다.
한수호는 최지혁에게는 마나 보충제를, 백윤후에게는 근력의 각반을 넘겼다.
이하윤에겐 환영 마스크를 줬으며, 장한설에겐 재생 밴드를 주어서 부상에 대한 위험도를 낮춰주었다.
신소이한테는 스캔 버클을, 양소혜에게는 돋보기 단추를 줬는데 아티팩트의 효과를 확인한 양소혜만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만 이게 뭐냐? 남들 신체 능력 훔쳐봐서 뭐 어쩌라고. 야, 백윤후! 너 그 각반이랑 이 단추랑 안 바꿀래?”
“원하면 얼마든지.”
백윤후는 흔쾌히 양소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 한수호는 각반을 양소혜에게 주려다가 막판에 마음을 바꿨다.
각반을 양소혜한테 주면, 돋보기 단추를 백윤후에게 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백윤후가 자신의 능력을 훔쳐볼까 봐 일부러 그런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단추가 백윤후에게 가고 말았다.
이미 친구들에게 넘겨준 거라 이제와서 빼앗을 수도 없는 일.
그렇지만 경고 정도는 해둘 필요가 있었다.
“나 정보 훔쳐볼 생각은 하지 마라. 그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농담처럼 꺼낸 말에 백윤후는 히죽 웃음을 그렸다.
“언감생심 내가 그러려고. 걱정 마라. 어차피 거기서 거길 텐데 굳이 네 정보 훔쳐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흐흐.”
대놓고 보는 것보다 더 기분이 나쁜 말이다.
한수호는 그런 백윤후를 잠시 노려보다가 친구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너희들이 졸업할 때 쯤에는, 아니지.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시간 내에 세상이 어둠에 잠길지도 몰라. 그때는 너희들의 힘이 세상을 위해 발휘될 수 있도록 부탁한다.”
다소 무게감이 있는 말에 모두 표정이 딱딱해졌다.
지금껏 그들이 보아온 한수호는 절대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난 너희들을 떠나는 게 아니야. 잠시 아카데미를 쉬는 것뿐이고, 모든 게 잘 마무리 된다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거다. 그때까진 너희들 모두 최선을 다해 실력을 키워. 그것이 너희들의 의무고 책임이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우리가 세상에 도움이 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거잖아. 괜히 나섰다가 헛되이 목숨을 잃을 게 뻔하니, 여기서 죽기 살기로 실력을 높여야 한다는 거고. 맞지?”
장한설의 표정엔 각오가 서려 있었다.
비록 한수호가 떠나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떠나는 한수호에게 더 이상의 부담은 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꼭 강해지겠다.”
최지혁이 강한 눈빛을 보이며 다짐했고,
“강해져서 네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다!”
양소혜는 의욕을 다졌다.
“우, 우리도 반드시 너처럼 강해질 거야!”
신소이는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넘기며 이국적인 용모를 드러냈다.
“절대 오빠한테 짐이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할게.”
이하윤은 작은 주먹으로 한수호의 가슴팍을 툭 하고 때렸다.
한수호는 그런 이하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장태산. 너 나랑 할 이야기가 좀 있지 않냐?”
백윤후가 묘한 눈빛을 보이며 한수호와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 * *
백윤후와의 대화는 비교적 짧게 끝났다.
백윤후가 한수호에게 독대를 요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앞으로 광양백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며, 자신이 이렇게 인간 세상에 깊게 관여해도 되겠냐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원래 아스루나 세계에서 도플갱어에 불과했던 백윤후.
한수호 덕분에 백윤후의 몸을 차지하여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광양백가라는 큰 가문을 이끌게 되었으니 어찌 부담이 되지 않으랴.
물론 한수호의 강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승하고 있어 백윤후의 생명 코어 역시 엄청나게 강화되어 마공사로서 궁급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이 정도 능력이면 정체가 발각되어도 얼마든지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윤후는 최대한 한수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정확히 광양백가를 어떻게 키워 갈지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그동안 백윤후가 광양백가의 가주로서 가문을 살펴본 결과, 황도13궁이 가문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려 했다.
비록 백진성이 황도13궁의 궁주로 활동하긴 했지만, 백가의 뿌리는 그보다 깊었고 그 오랜 전통을 모두 먹어치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진 못했던 것.
그 덕에 백윤후는 광양백가의 전통 세력의 힘을 등에 업고 내부를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이제 광양백가는 황도13궁과도, 이프리트와도 전혀 상관없는, 오롯이 백윤후 자신만의 명령에만 따르는 독자세력이 된 것이었다.
백윤후는 그런 광양백가를 통째로 한수호에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광양백가에 자신이 직접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 세력은 백윤후가 이룬 것이고, 명실상부한 주인 또한 백윤후이니 자신이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다.
다만, 백윤후가 그 세력을 인류의 멸망을 막는 일에 사용해 준다면 더할 나위없이 고맙겠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백윤후는 흔쾌히 한수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더불어 한수호에게 인챈트 스톤을 달라고 한 뒤, 거기에 자신의 고유 특성인 ‘마나회복’을 새겨 주었다.
인챈트 스톤을 이용해 마나회복 특성을 얻게된 한수호.
특성을 흡수해 정확한 정보를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될 특성이었다.
[특성: 마나회복]
-정신력을 소모하여 5초간 마나회복력을 극도로 높여준다.
-효과: 마나회복력 100/정신력 1
-마나 회복류 아티팩트를 흡수하여 시간 및 회복력을 늘릴 수 있습니다.
-쿨타임: 10분
정신력 1을 소모하는 대가로 초당 마나력 100을 회복할 수 있는 특성.
게다가 지금의 효과가 끝이 아니었다.
상처회복 특성처럼 동일 계열의 아티팩트를 이용해 특성의 효과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게 가능했다.
한수호는 곧바로 마나 회복 특성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최지혁에게 주고 남은 마나 보충제 17개 중에서 10개를 흡수함으로써 마나 회복력을 1,000까지 상승시켰다.
하지만 그 이상은 마나 보충제로도 높일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한수호는 이제 초당 마나력 1,000을 회복시키는 특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마나를 바닥까지 사용했을 때 이 특성으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리라.
한수호는 훌륭한 선물을 해준 백윤후에게 크게 고마워했다.
* * *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 한수호.
그는 기숙사로 돌아가 모든 걸 정리하여 전투 영역에 옮겨 놓은 뒤, 지평학 교수를 찾아갔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교수는 여전히 교수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내 생각보다 빠르구나.”
지평학은 한수호가 조만간 아카데미를 떠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황도의 무리와 큰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들었다. 대구와 무주에서 큰일이 있었다지?”
지평학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대구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이 조유현이라는 인물이 벌인 살인사건이었으며, 그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 한수호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한수호 덕분에 특무부는 새한교의 본거지를 찾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었으며, 적상산에서는 황도의 무리들이 구천승과 충돌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까지 모두 들었다.
“많은 피를 묻혔습니다.”
한수호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탄식하듯 꺼낸 말에 지평학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네 잘못은 없다. 그들이 자초한 것이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황도의 무리는 사라져야 할 악일 뿐이야.”
“지소연… 그녀의 목숨도 취했습니다.”
한수호의 말에 지평학이 움찔했다.
하지만 곧 낮게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과연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구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지소연이 교수님과, 아니 김무성 어르신과 깊은 사이였다는 것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