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던전 생성기]
-유일급 던전을 생성하여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면 엄청난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남은 던전 생성 가능 횟수: 1회
서은채가 본 큐브의 정보였다.
큐브는 서은채가 손에 쥐는 순간, 봉인을 풀어버렸다.
“마냥 좋아할 건 아니다. 그거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심하면 목숨까지도 위험하고.”
한수호는 큐브가 만들어 내는 던전, 침묵의 협곡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해주다 보니 그 생생함은 실제와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서은채는 한수호의 설명을 들으며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안도하면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10여 분에 걸친 설명이 끝났을 때, 서은채는 두려움이 아닌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한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수 있겠어?”
“당연하죠! 안 그래도 6급, 7급 게이트 돌아다니는 건 재미가 없었거든요. 델링그 한 방이면 죽이지 못하는 몬스터가 없으니 실전감 향상에도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니 그렇지. 하지만, 침묵의 협곡에서는 전처럼 여유 있게 싸우는 건 꿈도 꾸지 마라.”
“네네. 절대 자만하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서은채가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한수호는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서은채의 실력으로는 적어도 8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을 터.
무리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상당한 수준의 보상을 얻어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아카데미 관뒀다면서요?”
서은채가 샐쭉한 표정으로 한수호를 힐끔거린다.
“그새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냐? 소문 한번 엄청 빠르네.”
“아빠가 대한맹 맹주시니까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정보가 들어오던데요? 아무튼, 이제 어쩌려고요? 정말 게이트 폐쇄 임무에 참여할 거예요?”
“거기까지 알고 있어? 이거, 대한맹 보안이 엉망이로구만.”
서은채는 비돈귀살이 땅끝마을 1급 게이트 폐쇄 임무를 맡았다는 것과 그 임무에 한수호도 투입될 거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름 비밀에 해당하는 정보일 텐데, 아무리 맹주의 딸이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정보를 얻어냈다는 건 충분히 문제가 될 만했다.
“성태 삼촌이 오빠에 대한 정보라고 슬쩍 알려준 것뿐이에요.”
서은채가 말한 성태 삼촌은 한수호가 삼척 게이트에서 만나 각성을 도와주었던 김성태 대위를 의미했다.
“김성태 씨도 이제 대한맹 식구가 된 모양이네?”
“네. 한 달간 대한맹 연수원에서 고생 좀 하셨다가 지금은 정보부에서 근무하세요.”
“그 아저씨도 참 대단하다. 대한맹 정보를 빼서 조카한테 흘리기나 하고. 이거 알려지면 짤리는 거 아냐?”
“삼촌이 그랬어요. 벌써 외부에 다 알려진 정보라서 괜찮다고요.”
“외부에 알려진 정보라고?”
한수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돈귀살과 한수호가 마공사들과 함께 땅끝마을의 1급 게이트를 폐쇄하러 갈 거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당장 그곳을 찾아 움직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강지훈과 황도13궁이 그들이었다.
강지훈은 한수호의 얼굴만 봤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한수호의 정체를 충분히 파악해낼 수 있었다.
또한 대법원 게이트에서 비돈귀살과 한수호에게 당한 바가 있는 황도13궁이기에 어떡하든 복수하려고 준비 중이었을 터.
이번에 비돈귀살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분명 그들의 목표가 될 게 틀림없었다.
“아빠 말이 맞았네요. 이미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갔다는 걸 오빠한테 말해주면 분명 심각해질 거라고 했었는데….”
“그럼 맹주께서 나한테 그 사실을 말하라고 한 거야?”
“네. 오늘 오빠 만난다고 하니까 꼭 말해주라고 하셨어요.”
“흐음….”
한수호는 대한맹 맹주 서한광도 황도13궁이 스승 부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말씀은 더 없으셨고?”
한수호가 질문을 던지자 서은채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진도에 내려가거든요. 땅끝마을하고는 그리 먼 곳도 아니라서 기회가 되면 게이트 폐쇄팀에 합류할 생각이에요.”
“뭐? 네가? 그걸 맹주님이 허락해 주셨다고?”
“당연히 아니죠. 아빠는 제가 진도에 가는 것도 못마땅해하시는걸요. 하지만, 진도에 있는 우리 태극서가 본가에 가는 거라 막지 못하는 거예요.”
태극서가는 인천에 자리하고 있지만, 진짜 본가는 진도에 위치해 있었다.
그건 한수호도 아는 사실이라 굳이 검증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갑자기 서은채가 진도 본가로 향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
“본가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널 부르기라도 한 거냐? 갑자기 거길 왜 가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도 거기 계시고, 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내년부터 아카데미 다니게 되면 또 한동안 찾아가지 못할 테니 이번 기회에 가려는 거죠.”
“핑계는 좋구나. 아무튼, 네 진짜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땅끝마을 쪽으로는 오지 않는 게 좋다. 와도 임무에 널 끼워줄 사람도 없어. 바로 맹주님한테 연락이 갈 테니 괜한 헛수고는 하지 말고.”
한수호가 짐짓 엄한 얼굴을 하고 주의를 주었지만, 서은채는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히죽 웃어 보이며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노노노. 그건 제가 정하는 거지, 오빠가 정하는 게 아니랍니다~”
“오면 엉덩이를 발로 차 버릴 거야.”
“어룡도에 볼일이 있어서 간다고 하면 누구도 못 막을 걸요?”
“어룡도? 거긴 또 왜?”
어룡도는 진도와 땅끝마을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그곳은 인구도 적고 볼 것도 없어서 관광지로도 이름이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대한맹 맹주의 딸인 서은채가 그곳을 찾아갈 이유는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오빠는 모르겠지만, 그 섬에 친한 동생이 살고 있어요. 어룡도에 엄청 큰 별장이 하나 있고, 거기서 10년째 별장을 봐주는 모녀가 있거든요. 매년 거기 가서 휴가를 보내곤 해서 그 모녀랑 엄청 친해졌죠. 근데, 그거 알아요? 12살짜리 딸이 있는 아주머니인데, 그냥 보면 30대 처녀처럼 보이는 분이라는 거. 나도 꼭 그분처럼 동안으로 살아갈 거라고요.”
그런데 서은채의 말을 들은 한수호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눈썹을 찌푸렸다.
10년, 모녀, 12살짜리 딸.
이 몇 가지 단어들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팔의 솜털들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
한수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서은채의 손목을 덥썩 잡아 쥐었다.
“그 모녀 이름이 뭔지 말해봐!”
“네? 이름…이요?”
서은채는 갑자기 손목을 잡혀서 살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줌마는 이혜란, 딸 이름은 민지예요. 그런데, 왜요?”
이혜란과 민지.
기대하던 이름과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 모녀가 정말 한수호가 생각하는 인물이 맞다면, 그들은 이프리트로부터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명을 쓰고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생김새는? 아니다. 혹시 이 얼굴하고 닮지 않았어?”
한수호는 인벤토리에 늘 가지고 다니던 엄마 이태희의 사진을 꺼냈다.
그 사진을 본 서은채는 눈을 반짝이면서 입을 열었다.
“와~ 엄청 이쁘신 분이네요?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어룡도의 그 아주머니는 동안이긴 해도 이렇게까지 예쁜 얼굴은 아니고요.”
“…. 그래?”
이번엔 한수호도 어쩔 수 없이 실망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한수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얼굴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하다못해 아티팩트 같은 걸로 외모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거고.’
한수호는 어룡도의 모녀가 엄마인 이태희와 동생 한별이 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승인 구천승의 말에 따르면, 10년 전 지리산에는 조금 늦게 오긴 했어도 송혁과 서한광, 그리고 장현오까지 모두 있었다.
만약 서한광이 절벽에서 떨어진 엄마와 한별이를 구해서 어룡도에 몰래 숨겨 놓은 거라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 어룡도 별장 말이다. 거기에 나 좀 초대해 줄 수 있을까?”
몰래 숨어 들어가서 모녀의 정체를 확인해도 되지만, 괜히 섣부른 행동을 했다가 서한광이라는 강력한 마공사와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초대요? 뭐, 어려울 건 없지만…. 대신 제가 오빠 초대해 주면, 오빠도 제 부탁 한 가지 들어줄래요?”
“땅끝마을 게이트는 안 된다.”
한수호는 서은채가 뭘 부탁할지 알기에 사전에 철벽을 쳤다. 그런데, 서은채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아닌데요. 제 부탁이 뭐냐면….”
서은채는 아직도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는 한수호의 손을 바라봤다. 그러다 손을 슬쩍 뒤집어 한수호의 손을 맞잡았다.
“딱 5년만 기다려 줘요.”
“…. 뭐? 무슨 5년?”
난데없는 행동과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한수호.
“나 스무 살 되면, 오빠 여친 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요.”
“어? 음…. 그게. 허어. 거참.”
한수호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탄식했다.
그리고 서은채의 손을 슬며시 밀어내고는 자기 뺨을 긁었다.
“왜요? 고작 5년인데 못 기다려요?”
“그게 아니라…. 그 5년 사이에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그러지.”
서은채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한수호.
그게 우스운지 서은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그러니까, 5년을 기다리는 게 싫은 건 아니다 이거죠?”
“아니, 거기에 무슨 싫고 좋고 있겠냐고?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너 얼른 가라. 바쁜데 억지로 시간 낸 거라며. 가서 볼일 봐. 나도 갈 테니까.”
한수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한수호도 서은채가 자신을 단순히 아는 오빠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서은채는 얼굴까지 붉어진 한수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탁자 위에 큐브와 아공간 주머니, 그리고 오른손까지 올려놨다.
“이것들 모두 오빠가 저에게 준 거예요. 내겐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물건들이죠. 특히, 이 오른팔은…. 저에게 세상이 아직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알려줬고요.”
서은채는 한수호에게 받은 오른팔을 왼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네가 가치 있게 사용해 준다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아도….”
“의미를 두고 안 두고는 제가 결정할 문제에요. 그리고 앞으로 5년이에요. 그 안에 전 오빠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을 강한 마공사가 되겠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서은채는 한수호의 말을 자르며 자신의 목표를 당당하게 선포했다.
싱긋이 웃는 그녀의 얼굴은 한수호가 지금껏 보아온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어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수호.
앞에 놓인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5년이 됐던, 10년이 됐던 내 옆에 제대로 서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다. 난 위험을 부르는 사람이니까.”
“그 정도 각오는 이미 충분히 하고 있어요.”
서은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앞에 놓여있던 커피를 원샷으로 들이켰다.
“이만 가 보마. 건강해라.”
한수호는 서은채의 남다른 각오에 마주 웃어주고는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네. 조만간 다시 보겠지만, 그때까지 오빠도 건강하세요.”
두 사람은 그렇게 가벼운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 * *
2051년 9월 6일 오전 9시.
미국 LA발 비행기가 드디어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아직까진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이 하늘까지 장악한 건 아니라서 비행기가 운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2057년 초부터는 비행기 운행이 완전히 멈춰진다.
그건 세계 곳곳에 산재하여 등장한 1급 게이트들에서 대형의 비행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한수호가 김재우와 함께 찾았던 던전에서 봤던 가고일을 비롯하여, 드래곤 하위 버전인 드래이크, 역사에 등장하는 익룡을 닮은 모사트론, 날아다니는 성과 다름없는 메가프레타 등이 지구의 하늘을 지배하게 된다.
인류가 몬스터에게 빼앗기는 건 하늘뿐만이 아니다.
바다에도 메갈로돈이나 플레시오라, 메시메르당이라는 이름의 거대 몬스터들이 출현해 바닷길마저 막히고 말았던 것.
결국, 세계 각국은 바다를 경계로 완전히 이동이 멈춰버렸고, 육지에서도 먼 길을 이동하기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들이 고립되었다.
특히 섬나라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다른 국가의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게이트에서 밀려 나오는 몬스터들에게 점점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해.’
한수호는 공항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공항에 도착한 지는 벌써 3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폭탄 테러가 발생할 만한 장소를 모두 탐문해 봤지만, 아직까지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재희 누나가 공항에 오지 못하게 막아 놨다고 했으니,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이 다른 인물로 바뀌었을 텐데, 대체 누구지?’
원래대로라면 공항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범인은 김재우의 연인인 윤재희다.
하지만 김재우가 윤재희를 꼼짝 못 하게 집에 붙잡아 놨기에 그녀가 테러를 일으킬 염려는 없었다.
문제는 이번엔 과연 누가 테러를 일으키냐였다.
‘나스타샤를 마중 나온 특무부 요원 중에 한 명이려나?’
회귀 전에는 윤재희가 마중을 나왔다가 테러를 일으켰다.
때문에 이번에도 범인은 마중을 나온 마공사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수호는 김재우에게 몰래 전해받은 오늘 이곳에 온 요원들의 명단을 자세히 살폈다.
‘이동석, 문현수, 김재덕, 박종규…. 그리고 임주현.’
다섯 명 모두 어느 정도 아는 이름들.
회귀 전의 한수호는 동료들과 별다른 친분을 다지지 않았지만, 얼굴과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다섯 명은 별다른 접점도 없었고, 특이할 만한 사항도 없었기에 딱히 누굴 한 명을 정해놓고 의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한수호.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생각이 번쩍하고 스쳐지나갔다.
‘잠깐!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수호는 다섯 명의 이름이 적힌 공법폰 화면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