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서은채는 잠시 넋이 나갔다.
한수호가 갑자기 어룡도 별장에 초대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에도 별생각 없이 그저 한번 와보고 싶었나 보다 하고 간단히 생각했다.
10년째, 어룡도의 별장을 관리해 주고 있는 이태란과 그녀의 딸 민지에게 한수호가 유독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극적인 상황을 예측했던 건 아니었다.
한수호가 이태란의 아들이었다니.
아니, 그 이전에 이 모자는 왜 10년이나 떨어져 지내야 했고 지금까지도 서로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일까?
서은채는 감동의 재회를 옆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한편, 이 가족이 품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조용히 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
옆에서 아무 질문도 없이 그저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간신히 이 가족의 비극을 알아낼 수 있었다.
서은채가 5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서한광이 그 어느 때보다 엄한 표정으로 태극서가를 떠나던 그날을 확실하게 기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이 바로 지리산에서 한수호 가족이 참사를 당한 날이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녀의 가족은 모두 어룡도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서한광은 한 여인과 두 살짜리 아이를 둘러업고 별장으로 돌아왔었다.
그날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며, 여인과 여아에 대한 것도 절대 아는 척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당시 너무 어렸던 서은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날의 기억을 거의 잊어버렸었다.
그저 별장을 관리해 주는 이태란 아주머니와 자신보다 세 살 어린 동생 민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 틈만 나면 별장으로 놀러 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은채의 오빠인 서병찬의 생일에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단체로 어룡도에 놀러 왔다.
당시 서병찬은 13살이었고, 서은채는 7살의 개구쟁이 아이였다.
그날 어룡도에 놀러 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유명한 마공사들의 자식들이었다.
그중엔 강씨호왕가의 강우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씨호왕가와 태극서가는 관계가 돈독했다.
그래서 서로 왕래가 잦았고, 자식들의 생일에 서로를 초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의 생일파티는 서한광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뒤늦게 서병찬이 어룡도로 친구들을 불러들였다는 걸 알게 된 서한광.
그는 크게 역정을 내었고, 당장 친구들과 함께 어룡도를 떠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늦은 밤에 태극서가의 가신들이 어룡도를 찾아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최병찬이 초대한 친구들을 불러 모았고, 그중 강우진이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장난을 즐기고 모험에 대해 많은 환상을 지니고 있던 강우진.
그는 가신들의 눈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녔다.
그러다 섬 끝에 위치한 절벽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강우진은 이태희와 한별을 목격했던 것이다.
13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강우진은 그날 자신이 본 이태희와 한별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위태로워 보이는 절벽 위에서 밤하늘을 배경 삼아 여인이 펼쳐내던 검무(劍舞)는 각인처럼 기억에 새겨졌다.
그 옆에서 검무를 보고 따라 하는 4살짜리 여아의 모습 또한 충격적이었고.
여인, 이태희는 뒤늦게 강우진을 발견했지만 차마 13살의 어린아이를 해쳐 입막음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태희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강우진의 기억 일부를 봉인시켰다.
그래서 강우진은 그날의 기억을 머릿속에는 가지고 있을지언정, 스스로는 떠올리지 못하는 기이한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서은채의 기억으로 그때쯤 이태희의 얼굴이 크게 달라졌던 것 같았다.
1년 정도 어룡도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다시 찾아갔을 때, 이태란은 기억과는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난다.
하지만 서은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태란은 여전히 마음씨 좋고, 어여쁜 이모였고 민지는 자신을 잘 따라주었으니까.
서은채는 이제야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태산 오빠의 본명이 한수호였구나. 민지는 한별이였고.’
한수호와 민지의 본명마저 알게 된 서은채.
그런데 이런 비밀을 왜 자신이 모두 듣고 있는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건지 궁금했다.
“성찬이와 설아도 모두 살아있으니 정말 다행이구나.”
이태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수호가 한성찬과 한설아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알려주자 또 펑펑 울기 시작했던 것.
“엄마, 울지마. 이렇게 둘째 오빠도 만났고, 큰오빠랑 언니가 잘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는데 왜 울어? 바보같이.”
한별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 오히려 이태희를 다독거렸다.
“그런데, 엄마. 그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수호는 10년 전, 그날.
지리산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이태희는 눈물을 훔치고는 한수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일단 이것부터 떼고.”
이태희가 턱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잡더니 위로 확 잡아 뜯자 얇은 껍질 같은 가면이 벗겨졌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한수호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원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긴 했지만, 이 얼굴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이프리트가 또다시 찾아올 수 있기에 한수호는 걱정되었다.
“나중에 벗어도 되는데, 지금 괜찮겠어요?”
“이젠 상관없다. 이 엄마가 지금껏 왜 이곳에서 얼굴까지 바꿔가면서 숨어 지냈는지 아니?”
“별이를 지키기 위해서잖아요.”
“그것도 맞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단다. 난 살아서 너희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마음 속으로는 수백 번, 수천 번 복수를 하려고 다짐했지만, 그랬다가 잘못된다면 너희들을 다시 못 볼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어. 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너희들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난 살아야 했다.”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이태희.
한수호도 이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복수보다 자식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비참하더라도 숨죽여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태희.
이제 한수호를 만났고, 한성찬과 한설아 또한 훌륭히 성장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굳이 신분을 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가 별이를 안고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 아래엔 다행히도 강이 흐르고 있었단다. 그리고 거기서 은채의 아버지인 한광 씨를 만났던 것이고.”
한철형과 함께 검은 세력을 상대로 파 놓았던 함정.
하지만 친구들 중 한 명의 배신으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그날 지리산에서 한철형을 돕기로 했던 친구들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가면 쓴 괴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때문에 그 누구도 현장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지만, 단 한 명.
서한광만은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던 덕분에 지리산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우연인지, 천운인지 그가 있던 장소로 이태희가 추락한 장소에 때마침 서한광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서한광은 한철형이 7대 마화기를 얻게 된 이후에 가까워진 인물이었고, 이날의 사건에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한철형은 서한광을 마지막 보험으로 삼아 비밀리에 지리산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던 것.
결국, 서한광만이 이프리트의 정보망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이태희와 한별이가 살 수 있었다.
서한광은 한철형이 준비한 함정에 대해 모든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태희와 한별이를 구하자마자 지리산을 떠나야 했다.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누가 배신자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봤자 오히려 위험할 뿐이었으니까.
“누가 배신자인지는 알아냈어요?”
한수호가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배신자의 정체였다.
이산까지 포함하여 총 8명의 강자들.
회귀자인 이산은 빼고, 스승인 구천승을 제외한다면 남은 건 6명뿐.
그중에서 한수호의 손에 이미 목숨을 잃은 백진성까지 뺀다면 5명만 남는다.
유대룡. 박새한. 송혁. 강지훈. 신유.
한수호는 과연 이들 중 한 명만이 배신자일지, 아니면 다수가 배신자일지 그것이 너무도 알고 싶었다.
“강지훈. 그자가 모든 걸 계획했다.”
드디어 이태희의 입에서 범인의 이름이 지목되었다.
한수호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이름.
얼마 전, 횡경도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추악한 모습은 강지훈이 지닌 진면목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었다.
“거기다 박새한이 거들었지.”
두 번째 이름, 박새한.
이미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도망치게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 너무도 후회됐다.
‘그놈도 배신자였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것을….’
주먹을 꽉 말아쥔 한수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후…. 그런데, 서한광 맹주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분을 꾹 눌러 참은 한수호가 질문을 던졌다.
이태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은채를 바라봤다.
“나와 별이를 구해준 은인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말할 수 없었단다. 적어도 네 아빠의 복수는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싶었으니까.”
“그럼 아버진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내놓은 거였어요?”
정황상 한철형은 가면인들의 추격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누가 배신자인지 알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스스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갔으니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때, 이태희가 대답 대신 서은채에게 말했다.
“은채야. 미안한데 물 한 잔만 가져다줄 수 있겠니?”
“네? 아…. 알겠어요.”
서은채는 자신이 자리를 피해주길 바란다는 걸 느끼고 바로 일어났다.
그녀가 사라지자 이태희는 다시 한수호를 바라봤다.
“그날 네가 직접 말했지? 네가 17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그리고 네가 본 미래에서 나와 네 아빠 모두 적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말이야.”
“그 말 믿지 않았던 거 아니에요?”
당시엔 9살 어린아이의 헛된 망상이라고 생각했을 줄 알았는데, 이태희는 그날 한수호가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내 아들이 정색하면서 한 말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었겠니?”
“그럼, 왜….?”
더욱 이해가 안 간다.
한수호가 겪은 미래에선 자신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고 말했는데, 왜 한철형은 제 발로 죽음을 찾아갔단 말인가.
“그게 순리니까. 그리고 운명이니까.”
착잡한 음성으로 대답한 이태희.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고요?”
“네 아빠는 수호, 너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가 몰살당한다는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거란다. 그이마저도 살아남기 위해 운명을 거부하려 한다면, 결국 누구도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면서….”
“아….”
한수호는 이제야 한철형이 굳이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걸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날 나한테 내가 본 미래에선 적들의 정체를 알아냈냐고, 미래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봤던 거였어.’
한수호가 미래에서 회귀했다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했을 때, 한철형은 침착한 얼굴로 몇 가지를 물었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 보니 한철형은 한수호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한수호가 겪은 미래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던 것이고.
한수호는 미래에도 적의 정체를 몰랐으며, 가족 모두가 몰살당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철형은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이건 나스타샤가 말한 운명의 개입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회귀자가 개입을 하게 되면 거부반응이 나오게 되고, 그 거부반응은 더 큰 사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같은 맥락으로 한철형 또한 회귀한 한수호의 말을 듣고 가족 모두가 살아남으려 한다거나, 적의 정체를 일찌감치 밝혀버린다면 더 큰 문제가 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으로나마 운명에 따르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난 네 아빠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네가 본 미래에서는 살아있을 수 없었던 네 형과 동생들이 여전히 살아있지 않니?”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는 죽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수호가 바라는 건 가족 모두의 생존이었으니까.
“네 아빠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신다. 지금도 우릴 지켜보고 계실 테니까 언제나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이태희는 이제야 눈물을 닦고 환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아들, 착하네. 엄마 없이 외로웠을 텐데, 훌륭히 자라줘서 너무 고맙구나.”
“훌륭하신 분들이 절 돌봐주셨어요. 조만간 그분들 인사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래, 엄마도 꼭 그분들을 만나 뵙고 싶구나.”
이태희의 얼굴에 이제서야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간은 남편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었지만 이젠 다시 만난 자식을 위해 웃어야 했다.
그것이 엄마로서 역할이었고, 의무였다.
“그런데, 수호야. 너 은채랑 어떤 사이니? 여기 올 때마다 아는 오빠 얘기를 엄청 하던데, 그게 수호 너였을 줄은 몰랐구나.”
“어, 저기. 아무 사이 아닌데요? 제가 열다섯 살 짜리 어린애하고 무슨 사이일 수가 있겠어요?”
한수호는 갑작스러운 이태희의 말에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그러자 이태희가 흐뭇한 표정이 되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애는 몰라도, 은채는 괜찮다. 엄마가 허락해 주마.”
“아, 뭐에요! 갑자기 허락은 무슨!”
“녀석. 쑥스러워 하기는. 다 아니까 숨길 거 없다.”
“아니라니까요!”
모자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별.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마디 툭 끼어들었다.
“은채 언니가 나한테 그랬는데. 5년 뒤에 시집갈 거니까 축의금 두둑이 준비 놓으라고.”
갑작스러운 말에 한수호와 이태희 모두가 크게 놀랐다.
“그걸 너한테도 말했어?”
한수호는 인천의 카페에서 서은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황당해했고,
“5년은 너무 길잖니? 그때까지 기다릴 거 없이 식부터 올리자꾸나.”
이태희는 아예 날짜까지 잡을 태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