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한수호는 이날 하루를 온전히 가족을 위해 투자했다.
아직 형과 쌍둥이 여동생까지 함께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회귀 전에는 아예 볼 수조차 없었던 어머니와 막냇동생이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10년 만에.
정확히 말한다면 27년 만에 어머니가 해 주는 집 밥을 먹으며 한수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동생 한별은 한수호의 눈물을 닦아주며 밥 먹을 때 울면 복 달아난다고 핀잔을 주었다.
아무튼 그날 밤 11시가 넘는 시간까지 한수호는 이태희, 한별, 그리고 서은채와 함께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도 주고받았는데, 놀랍게도 막내 한별은 12살의 나이로 이미 자연각성을 한 상태라는 것이다.
한별이 각성한 특성은 ‘무한증강’.
다소 낯선 느낌이 드는 특성이었지만, 특성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직 기본 1단계에 불과한데도, 이 특성을 사용하면 어떤 생명체와도 쉽게 친해질 수가 있다고 한다.
이 친화력은 단순한 게 아니었다.
한별의 정신력보다 낮은 상대라면 얼마든지 강제로 호감도를 높일 수 있으며, 그렇게 높아진 호감도를 이용해 상대를 조종할 수도 있기 때문.
그래서 한수호는 한별의 정신 수치를 확인해 봤다.
한별의 정신 수치는 무려 12.
일반인이 1이고, 사왕오패 같은 강력한 마공사들이라고 해도 최대 15를 넘지 않는다고 보면 정말 엄청난 수치.
즉, 한별은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몬스터나 동물들, 또는 정신력이 낮은 마공사들을 얼마든지 부려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태희는 오히려 이런 특성을 각성한 한별이를 크게 걱정했다.
그래서 한별이가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자기 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단련을 시켜왔던 것.
이에 한수호는 선물을 내놓았다.
그건 세 개의 인챈트 스톤이었다.
뇌룡아, 마나회복, 상처회복이 새겨진 인챈트 스톤 세 개를 재회의 선물로 꺼내놓자 이태희도, 서은채도 크게 놀랐다.
선물을 받는 당사자인 한별이만 이 인챈트 스톤이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최고의 보물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
한별은 곧바로 스톤에 새겨진 특성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걸 테스트 해 본다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한수호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똑같은 인챈트 스톤 세트를 이태희한테도 건네주었다.
“이건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내 것도 있어? 넌 이런 특성석들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인데, 그것도 똑같은 특성석들을 두 개씩 세 세트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다니.”
이태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별것 아닌 특성석이라고 해도 그걸 얻은 마공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파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한수호가 이 특성석들을 돈 주고 샀을 리는 없다.
“제가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이 좀 많아서요.”
한수호는 그저 웃으며 정확한 대답을 피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은채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솔직히 다 이해는 하는데, 적어도 나한테도 선물 하나쯤은 해주는 게 정상 아니에요? 나도 사람인데. 치잇.”
모자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부러움에 투정 부리듯 꺼낸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다.
서은채의 가족은 이에 비해 상당히 데면데면한 관계라 서로 간에 애틋함이 별로 없었으니까.
“저번에 만났을 때, 선물 줬잖아. 그거 말고도 내가 준 게 한두 개가 아니라며 좋아라할 땐 언제고.”
“에이. 그건 그때고요.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죠. 헤헤.”
서은채도 딱히 따질 말이 없는지 그냥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그런데 이를 본 이태희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내걸 은채한테 줄게. 난 솔직히 크게 필요가 없을 것 같구나.”
이태희는 자신이 받은 인챈트 스톤 세트를 모두 서은채에게 주려 했다.
“아, 안 되요, 아주머니. 아니, 어머니! 제가 그걸 받으면 오빠가 저 엄청 욕할걸요?”
“그건 걱정 마. 이 엄마가 딸 같은 은채한테 주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니?”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냥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서은채는 이태희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굉장히 허둥대며 말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더 스톤을 줬다 거절했다를 반복했다.
이를 본 한수호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마디 했다.
“알았어요, 엄마. 은채한테도 하나 줄게요.”
한수호는 인벤토리에서 여유분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상처회복’ 스톤을 꺼냈다.
“넌 이거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거야.”
“…. 에? 진짜 줘요?”
“안 주면 엄마가 계속 저렇게 도끼눈을 뜨고 계실 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주는 거다.”
한수호의 말에 서은채가 이태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뜨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음. 어…. 이거 줬다 다시 뺐기 없기에요?”
“안 뺏는다. 너도 가서 별이랑 같이 특성이나 테스트해 봐.”
“예스! 안 그래도 치료계 특성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잘됐다!”
서은채도 아직 애는 애였다.
한수호한테 받은 선물에 완전 행복한 얼굴이 된 서은채는 곧장 한별이 쪽으로 달려가서는 함께 특성 테스트에 들어갔다.
둘만 남겨지자, 한수호는 이태희에게 조용히 말했다.
“엄마. 이제 여긴 정리하시고 저와 함께 가요.”
“물론이지. 다만, 서한광 맹주님께 감사의 인사 정도는 하고 떠나는 게 맞을 것 같구나.”
이태희도 한수호와 재회한 이상 굳이 이곳에 남아 궁상을 떨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젠 두 번 다시 서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가족이 한데 뭉쳐서 사는 게 당연했다.
“성찬이 형하고 설아도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둘 다 기억이 봉인된 모양이지만,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요.”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야. 기억은 언젠가 돌아오겠지. 엄마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단다.”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며칠 게이트에 다녀와야 해요. 그동안 서한광 맹주님을 만나서 정리해 두세요.”
“설마 땅끝마을 게이트는 아니지?”
이태희도 한때는 이름을 날리던 마공사였던 만큼, 게이트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었다.
어룡도에서 불과 5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땅끝마을의 게이트.
그 게이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거기, 맞아요. 하지만 생각보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전 오래전에 그 게이트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요.”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었다.
한수호가 땅끝마을 게이트를 경험한 건, 실제 경험자를 통해 이야기를 들은 것이 다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거긴 수많은 고위급 마공사들을 잡아먹은 지옥 같은 곳이다. 쉽게 생각했다간 큰코다칠 거야.”
“절대 쉽게 생각 안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양부모님과 스승님도 함께 갈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면 다행이긴 하다만….”
그나마 안심한 표정이었지만, 자식을 물가에 내놓는 부모의 마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으랴.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한수호는 다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한별에게 몇 가지 전투 기술을 가르쳤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적을 상대하는 방법과 어제 새로 얻은 특성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등이었다.
서은채는 그 사이에 끼어서 한별 찬스를 이용해 톡톡히 이득을 보고 있었다.
한수호는 어룡도를 떠나기 전, 이태희와 한별을 꼭 안아주었다.
늦어도 2주 안에는 횡경도로 돌아갈 것이니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중간에 서은채가 자기는 왜 안아주지 않냐고 투덜댔지만, 한수호는 꿀밤을 때리는 걸로 작별 인사를 대신해 주었다.
그리고 한수호는 어제 이곳에 왔을 때처럼, 어부 사내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보트를 타고 육지로 향했다.
이제 대한민국 최대 마경 중 한 곳인 땅끝마을로 돌아가서 게이트를 폐쇄할 시간이었다.
* * *
“여어~ 어디 좋은데 놀러 갔다 오시나? 신수가 아주 훤~해지셨어?”
게이트 주둔 부대에 들어선 한수호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다름 아닌 최지혁이었다.
작전 개시까지 이제 2시간밖에 남지 않은 지금.
주둔 부대엔 한수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최지혁을 필두로, 백윤후, 장한설, 양소혜, 신소이, 이하윤까지 모두 있었으며, 송지문, 송유나 남매와 권열, 그리고 우태범까지 무려 열 명이나 되는 아카데미 학생들이었다.
그들을 이곳에 이끌고 온 건 놀랍게도 지평학 교수였다.
“너희들이 여긴 무슨 일로….?”
“내가 서한광 맹주한테 부탁을 좀 했다.”
지평학이 한수호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정은 이렇다.
지평학은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장래가 창창한 학생들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카데미 안에서만 가르치고 있는 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선별한 우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번 게이트 폐쇄 작전에 참관수업을 추진한 것이다.
물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옥석인 학생들에겐 상당히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실전 경험도 적고, 게이트의 무서움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는 햇병아리들에게 1급 게이트 폐쇄 작전을 참관하게 한다니.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능한 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지평학이었고.
그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무려 서령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 냈던 것.
서령그룹이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거대 기업이자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최고의 아티팩트 제작업체를 소유한 글로벌 사업체가 바로 서령이다.
회장 이재춘은 각성하지 않은 일반인이지만, 막강한 재력을 이용해 수많은 마공사들을 수하로 부리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재춘의 아들인 이자웅은 대한맹의 부맹주 자리를 맡고 있었다.
문제는 이자웅이 얼마 전 한수호의 손에 죽은 이대경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당시엔 어찌어찌 무사히 넘어가긴 했지만, 아들을 죽인 존재가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자성 역시 모르지 않을 거라는 게 한수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평학은 그런 서령그룹에 무슨 수를 썼는지 마공사 15명이라는 전폭적인 지원을 끌어낸 것이다.
궁급 마공사 3명에 진급 마공사 12명.
거기다 다양한 용도의 아티팩트가 담긴 커다란 금속 상자 다섯 개.
아티팩트 중에는 마나 탐색기가 20개나 포함되어 있었으며, 최근 서령그룹에서 개발을 완료한 ‘마공슈트-201K’까지 무려 50벌이나 준비되어 있었다.
마나를 다를 수 있는 사람이 입기만 해도 최소 특급에서 최대 궁급에 이르는 막강한 방어력을 갖출 수 있게 해주는 마공슈트-201K.
그 슈트에는 서령그룹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고, 이 슈트를 이번 게이트 폐쇄 작전에 참가한 마공사들이 착용만 해준다면 무료로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 서령의 요구였다.
서령은 이번 게이트 폐쇄 작전을 직접 촬영하길 원했다.
그래서 촬영기사 한 명과 리포터 한 명이 일행에 추가된 상태.
서령은 이 작전에 투입한 마공사 중 절반을 아카데미 학생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운용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 이런 조건으로 참관수업을 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서맹주에게 정식으로 요청했지.”
“맹주께서 그걸 허락해 주셨다고요?”
이건 조건의 좋고 나쁨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대단한 마공사들이 학생들을 보호해 준다고 해도 그들이 참관한다는 자체가 이미 짐이 되는 것이고,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는 것이니까.
“물론,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내 명예를 걸고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설득한 끝에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단다.”
그렇게 말하는 지평학의 표정은 주변의 눈치가 상당히 신경 쓰이는 듯 불편해 보였다.
‘설마 서한광 맹주한테 김무광이라는 사실을 밝힌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아무리 아카데미 최고령 교수로서의 명예를 걸겠다는 말에 넘어갈 서한광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수호의 머릿속으로 지평학의 마나전음이 파고들었다.
[서맹주한테 내 진짜 신분을 밝혔다. 그러니 그만 따지고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척 좀 하거라. 너한테는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만, 이번 작전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켜요? 갑자기 왜요?]
한수호는 당연한 질문을 던졌고, 지평학은 한마디 말로 한수호를 이해시켜버렸다.
[이 게이트와 연결된 거대한 섬이, 바로 발자크가 봉인된 암흑섬이라는 정보가 있다.]
쿵!
한수호는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느낌이었다.
발자크가 봉인된 암흑섬.
그렇다면 이 섬 어딘가에 발자크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번 게이트 폐쇄 작전이 결코 단순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한수호가 크게 놀랐다는 사실을 눈치챈 지평학은 자세한 설명을 위해 따로 자리를 만들 필요를 느꼈다.
“커흠. 사람들이 다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있으니 따로 이야기 좀 하자꾸나.”
지평학의 말에 한수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비돈귀살을 바라봤다.
“작전 시간도 변경됐나요? 더 올 사람들이 있는 거고요?”
“우리도 조금 전에 서 맹주한테 연락을 받았다. 특무부와 정의국, 그리고 전국 각지의 마공가문들에서도 지원 병력을 보내준다더구나.”
일이 갑자기 엄청나게 커져 버렸다.
처음엔 1급 게이트 폐쇄엔 그다지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너도나도 이 작전에 끼어들길 원하고 있다니.
그 원인이 아카데미 학생들의 참관 수업 때문이라는 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평학은 학생들의 참관 수업이라는 타이틀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마공사들이 알아서 이 작전에 자원하게끔 상황을 유도했다.
“우선, 저는 교수님하고 이야기 좀 더 나눌게요.”
“그러렴. 우린 이번 작전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다시 협의하고 있도록 하마.”
장한구는 바로 주태란과 함께 대한맹 마공사들의 수뇌부들을 만나러 자리를 옮겼다.
이제야 단둘이 남게 된 한수호와 지평학.
친구들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한수호는 지금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교수님. 이제 말씀해 주시죠.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요.”
“네가 휴학계를 내고 아카데미를 떠난 직후, 이산과 김명중, 그 둘이 날 다시 찾아왔었다.”
이어지는 지평학의 말에 한수호는 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