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이산과 김명중은 회귀자다.
특히 이산의 경우, 두 차례에 걸친 회귀로 향후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7대 마화기와 5대 혼마기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으며, 발자크가 누구의 손에 어떤 식으로 봉인되었는지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산은 아스루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7대 마화기를 손에 넣으려고 했고, 2차 회귀 후 젊고 강한 마공사들을 구슬려 ‘유령 대저택’이라는 던전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거기서 운 좋게 7대 마화기를 손에 넣은 젊은 마공사들.
하지만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게 된 마공사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화기에 담긴 발자크의 마기에 잠식된 이유도 있지만, 애초에 심성이 바르지 못한 인물도 있었기에 쉽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로 인해 7대 마화기를 이용해 발자크를 상대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파탄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산이 차선책으로 삼은 것은 5대 혼마기를 차지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혼마청검과 혼마백도는 회수했지만 혼마귀부는 김무광의 손에 들어갔고, 혼마흑갑은 한수호에게 빼앗겼다.
남은 건 혼마적창 하나뿐.
그래서 이 혼마적창을 찾아 여러 게이트와 던전을 헤매던 중, 대신관 아캄이 남긴 또 다른 비밀 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책자엔 아스와 루나가 대마왕 발자크를 봉인한 장소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담겨 있었다.
지금까진 발자크가 봉인된 장소가 그저 암흑섬이라고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었지만, 새로 발견한 책자엔 암흑섬의 크기와 구조, 그곳에 상주하는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 정보를 모두 종합해본 결과, 그 암흑섬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이 땅끝마을 게이트 너머에 존재하는 섬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산과 김명중은 대한맹이 최근 땅끝마을 게이트의 준동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가 결국 폐쇄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지평학을 찾아와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이산은 이 게이트의 준동이 이프리트가 일부러 만들어낸 조작된 정황이며, 대한맹의 마공사들을 끌어들여 또 한 번의 대참사를 만들기 위해 함정을 파 놓은 것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마공사들의 대참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게이트의 마나폭발이었다.
게이트를 강제로 폭발시키고,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마공사들의 피로 암흑섬 전체를 적신다면 발자크의 봉인이 지금 당장 풀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평학은 서한광을 찾아갔다.
모든 것이 이프리트의 함정일 수 있으니 게이트 폐쇄 작전을 당장 중단시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먹히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이산이 그렇게 말했다는 말로는 설득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서한광이 이산을 그다지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서한광은 한철형이 죽고, 그의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게 된 중요 원인이 이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이산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유령 대저택에 데려간 이 시대의 강자들은 인간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인간들이도 섞여 있었고, 그들로 인해 한 가족이 파탄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이산이 말했다는 내용을 어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서한광은 오히려 이산이 고위급 게이트 폐쇄를 방해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거짓 정보를 만들었다고 보고, 지평학의 말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실 지평학도 이산의 말은 크게 신뢰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회귀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믿고 있었기에 적어도 그가 이런 함정을 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한광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이 김무광이라는 것까지 밝혔다.
서한광은 크게 놀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강의 고수, 권존 김무성이 이런 노쇠한 모습을 한 채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
하지만 지평학이 김무성이라고 하여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서한광은 이번에 땅끝마을 게이트를 확실히 폐쇄할 마음이었고, 거기에 어떤 방해자의 등장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름의 조치로 국가수호대의 특급 요원들까지 섭외하여 팀에 붙여놓은 것이다.
게이트 폐쇄는 인원만 많다고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특히, 땅끝마을 게이트의 경우 커다란 섬에서 얼마나 빠르게 알파 몬스터를 찾아내 해치우느냐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소수의 정예 요원들로 팀을 구성하는 게 가장 확실했다.
하지만 지평학은 이를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이프리트의 함정일 가능성이 단 1%만 존재하더라도 그건 진행해선 안 될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평학은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차라리 이 게이트 폐쇄 작전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서 세간의 관심을 끌어 모으자는 계획.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어 게이트 폐쇄 작전이 스포트 라이트를 받게 된다면, 이프리트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애초에 계획했던 함정을 어쩔 수 없이 회수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다시 어둠 속으로 감추는 것이고.
둘째,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더욱 화려하게 함정을 발동시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프리트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지평학은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피, 더 많은 죽음.
이프리트라면 오히려 이런 것들을 원하겠지만, 시간상으로는 아직 시기상조일 터.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세상과 전면전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이번 사태에 굳이 함정을 발동시킬 리 없다는 게 지평학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평학은 이번 일을 계기로 아예 이프리트의 첩자들을 대대적인 속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동안은 음지에 숨어서 야금야금 세상을 좀먹고 있었던 이프리트.
만약 놈들이 이번에 준비한 함정을 포기하고 물러선다 하더라도 꼬리를 밟힐 수밖에 없도록 역함정을 판 것이다.
그 함정의 키가 바로 아카데미 학생들이었고.
지평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수호.
그의 계획에 제동을 걸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너무 위험했다.
만약에라도 이프리트가 물러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판을 크게 키우려고 한다면?
어린 학생들을 이용해 이프리트를 양지로 끌어낼 역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더 지독한 함정을 준비한다면?
조금이라도 예측이 어긋나는 순간 어린 학생들에게 찾아올 불행은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란 말인가.
“어르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이번 작전에서 빼는게 맞습니다.”
한수호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지평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게 맞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학생들이 다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안심하거라. 서령그룹에서도 학생들 보호를 최선으로 해주기로 했고, 특무부와 정의국에서 파견된 요원들 역시 학생들의 안전부터 챙길 테니까.”
“어르신!”
한수호가 인상을 굳히며 지평학을 불렀다.
그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작전을 취소시키기 위해 서한광 맹주를 찾아갔다더니, 이제보니 오히려 이 작전의 규모만 더 키워놨다.
“복수의 화살을 이프리트에게 돌린 것이었습니까?”
“…. 무슨 말이냐?”
“제 손에 지소연이, 그리고 김민경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을 잃은 복수심의 대상을 제가 아닌 이프리트에게로 돌린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한수호는 지금의 지평학이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사랑했던 여인과 딸의 죽음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결코 복수할 생각은 없다. 넌 나를 그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것이냐?”
강력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는 걸로 보아 한수호의 말이 맞았다.
“어르신도 속으로는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난, 난 그저….”
지평학이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두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수호로서는 처음보는 모습.
한동안 머리까지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던 지평학.
그가 돌연 머리를 번쩍 들더니 한수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후…. 내가 크게 잘못 생각한 거 같구나. 미안하다.”
지평학이 결국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좀 더 과격한 방법으로 지평학의 마음을 돌릴 생각이었던 한수호는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이제라도 이해하셨으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뭔가 거림칙하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적이 없는 지평학이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는 하나 파급, 혹은 그 이상의 강력한 마공사인 지평학이 두통에 시달린다?
뭔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나이를 먹더니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구나. 학생들의 안전부터 챙겨야 할 내가 그들을 이프리트의 정체를 밝힐 미끼로 쓸 생각을 하다니…. 창피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지평학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한수호는 그런 지평학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한 번도 정보 스캔이 제대로 된 적 없는 지평학을 스캔했다.
휘이이잉
개조 특성이 발휘되는 잠깐의 찰나가 지나갔을 때, 한수호의 눈앞에 정보가 나타났다. 그런데, 정보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신체외적능력] : 164(!!)/9999
[신체내적능력] : 14/99
[마나] : 1,722(!!)/99999
일단 능력치와 마나력 수치가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예전처럼 물음표라도 등장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지금은 느낌표가 두 개나 붙어 있다.
한수호의 상식에서 느낌표는 뭔가에 대한 강조, 혹은 문제점이 있을 때의 표식을 위해 사용된다.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지평학의 능력치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수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까지 한꺼번에 찾아냈다.
“어르신. 우태범, 그 녀석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한수호는 나스타샤의 증언에 의해 진정한 살의 열쇠인 것으로 드러난 우태범에 대한 근황을 물었다.
우태범은 지평학의 추천으로 본교 아카데미로 전학했고, 그 후로 지평학의 특별학생이 되어 많은 지도를 받는 중이었다.
지평학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면, 우태범은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석은 생각 이상으로 내 지도에 잘 따라와 주고 있지. 그런 인재가 이제라도 내 눈에 발견되어서 참 다행이지 뭐냐.”
“지혁이보다 더 가까이에서 어르신을 모시는 중인가 봅니다?”
“알다시피, 지혁이 녀석은 여러모로 무디지 않느냐? 어찌보면 곰 같지. 그런데, 태범이는 꽤나 세심한 곳에까지 신경을 잘 써주더구나. 내 피부가 안 좋다며 아스루나의 알로에라고 불리는 히포크로녹의 액으로 만든 크림에 소화 기능에 좋다는 뷔프록시아 음료까지 챙겨주었지.”
피부 크림과 음료라는 말에 한수호는 바로 문제의 핵심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이리 피부가 촉촉해 지셨군요. 잠깐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한수호는 뜬금없이 지평학의 손을 만지려 했다.
하지만 지평학은 아무 의심없이 손을 내어 주었다.
지평학의 손을 두 손으로 살짝 만져본 한수호.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약탈 대상이 존재합니다. 상대의 상처를 약탈하여 관련 내성을 획득하겠습니까? YES/NO
지평학의 몸에서 메시지가 발생했다는 건, 약탈[1]의 특성을 발동시킬 수 있는 기본 조건인, ‘상처’가 있다는 뜻.
‘역시 아까 본 느낌표는 문제가 있다는 의미였군.’
한수호는 두고 볼 것도 없이 곧장 YES를 선택했다.
후욱
한수호의 손에서 청명한 기운이 지평학의 손을 타고 넘어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평학은 방어도 못한 상태로 그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 기운의 접촉에 깜짝 놀란 지평학.
“태산이, 너!”
“나쁜 거 아닙니다. 그러니 거부하지 마세요.”
한수호가 진심어린 얼굴로 말하자 지평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한 기운은 순식간에 지평학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었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 그걸 깡그리 긁어모았다.
그걸 그대로 한수호에게로 되돌려준 다음, 기운은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이, 이건 대체 무슨 힘이지?”
처음 겪는 시원함이었다.
수십 년간 꽉 막혀있던 곳이 뻥 뚫린 듯한 느낌.
지평학은 온몸이 날아갈 듯한 시원함을 느꼈지만, 한수호는 반대였다.
“크윽….”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방금 한수호는 약탈[1]을 사용함으로써 독, 두통, 구토, 숙취, 간지러움의 내성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확인했고, 거기서 독을 선택했다.
그 덕에 독 내성을 60%까지 높일 수 있었지만, 몸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이 고통은 멀쩡하게 참아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강한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건가?’
지평학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의 몸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독소가 잔뜩 쌓여 있었다.
고통 내성이 90%가 넘어가는데도 이렇게나 아프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독이라는 의미였으니까.
“이게 무슨 일이냐? 왜 네가….?”
“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그보다, 좀 어떠세요?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뭐? 정신이 드냐니 그게 무슨….”
말을 하던 지평학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눈으로 한수호를 바라보던 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주변을 돌아보더니 길게 탄식을 흘렸다.
“하…. 내가 완전 놀아났구나. 모든 게 그 녀석의 계획이었어.”
지평학은 이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