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쾅!
우태범은 앉아 있던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분을 삭였다.
“그 개자식이 모든 걸 망쳐 놨어요.”
지금 우태범은 이프리트의 은신처에 숨어 있어야 하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이번엔 정말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 토너먼트를 기회로 삼아 서울 본교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고, 지평학 교수의 눈에 들어 제자처럼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번 일을 추진한 것이었다.
“너무 흥분할 것 없다. 그래도 네 덕에 그동안 우리의 행사를 방해해온 핵심 인물이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우태범 앞에 앉아 있는 체격 좋은 사내의 말.
사내는 꽃잎 열 개가 그려진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나 체형이 조유현의 영상에 나왔던 그 가면인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제 놈의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됐으니 최대한 빨리 없애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아직은 아니다. 오히려 우린 잠시 동안 숨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왜 숨죽이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요? 그럴 필요 없이 저희가 준비해 놓은 힘을 모두 사용하면 발자크의 봉인을 푸는 건 시간문제이지 않습니까?”
우태범은 가면인과 가까운 사이인지 말을 함에 있어 가리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가면인은 우태범의 태도를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태범아. 네가 가져온 영상, 제대로 분석은 해 보았느냐?”
“보기야 봤죠. 놈에게 그런 강력한 무기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벼락을 뿜어내는 창이라니. 제가 가진 혼마적창보다도 한 단계 위의 무기인 것 같던데요?”
우태범은 한수호가 지닌 뇌격창에만 관심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가면인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무기는 그저 도구이지, 그 엄청난 일을 벌인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넌 창 하나로 네가 일으켜 세운 수천의 사자(死者) 군단을 쓸어버리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버지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태범은 가면인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호칭을 인정하는지 가면인은 별말 없이 잠시 우태범을 응시했다.
“설마…. 아버지도 불가능한 일인 겁니까?”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으나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
“그, 그럴 리가!”
우태범에게 가면인은 신과 같은 존재.
그런 가면인조차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을 열아홉 살의 한수호가 성공시켰다?
이건 생각조차 못 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녀석은 네가 ‘사자의 성령’으로 되살려낸 몬스터들만 정확하게 특정하여 공격했지. 그건 나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야.”
“그게 무기의 힘이 아니라 그 녀석이 지닌 힘이라는 겁니까?”
“그래. 녀석은 발자크의 파편도 본인의 힘만으로 쓰러뜨렸다.”
가면인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한수호를 관심 있게 지켜본 게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마지막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구나.”
“드디어 결심이 서신 겁니까?”
“그런 셈이지. 인류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내가 좀 힘들더라도 인류와 공존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게 그나마 나을 테니까.”
가면인의 말에 우태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가면인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네가 인류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네가 살던 세계를 멸망으로 이끈 아캄이 지구에서 넘어간 과학자일 거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지. 하지만, 지금의 넌 엄연히 지구인이고, 내 아들이다. 기억의 잔재에 파묻혀 매몰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도록 해야 한다.”
뭔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우태범은 그 말에 표정을 금방 풀었다.
“네, 아버지. 저도 제가 더 이상 아스루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압니다. 아무튼 아버지 말씀대로 이제 마지막 준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면서 네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하여라.”
“네. 걱정 마십시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땅끝마을 게이트는 깨끗이 폐쇄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1급 게이트가 폐쇄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정부에 큰 희망을 남겨주었다.
이 폐쇄 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득을 봤다.
먼저 아카데미 학생들.
10명의 학생이 참관수업을 위해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1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그들의 활약으로 아카데미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그래서 살아서 돌아온 9명의 학생에겐 아카데미 이름으로 상당한 규모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다음은 서령그룹이었다.
대한맹 부맹주인 이자웅이 사장으로 있기도 한 서령그룹은 이 폐쇄 작전에 많은 소속 마공사와 마공슈트를 지원함으로써 명예와 실리를 동시에 챙겼다.
이자웅은 아들 이대성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고 아카데미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덕분에 이번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최신형 마공슈트가 큰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돌아 슈트 판매 실적이 엄청나게 뛰어올랐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서령그룹의 마공사 15명 중 9명이 사망했지만, 그에 비해 몇십 배나 큰 이득을 얻었기에 손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세 번째는 대한맹이었다.
특무부에 밀려 만년 2위 조직이라고 놀림 받던 대한맹이 이번 작전의 성공으로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았다.
사실상 대한맹 요원들의 희생이 가장 컸다.
현장에 있던 예비 요원까지 합쳐 거의 30명에 가까운 인원이 투입되었으나 살아서 돌아온 건 12명뿐.
이렇게 큰 희생이 있었지만, 희생이 커진 이유가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서 모두 대한맹을 높이 치켜세웠다.
게다가 이번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비돈귀살을 대한맹 소속의 마공사로 흡수하게 되면서 이제야 인재를 알아본다며 세상으로부터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매우 좋은 평판을 듣게 되었다.
그 덕에 대한맹 소속이 되고자 하는 재야의 마공사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마지막은 비돈귀살이었다.
한때는 사대광마 다음으로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었던 비돈귀살.
그런 그들이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기에, 그들은 더 이상 악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인재로 여겨 요원으로 거두어들인 대한맹이 칭찬을 들을 정도로 이미지가 달라졌다.
그런데 이 소문에서 네 가지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감쪽같이 지워졌다.
첫째, 이 폐쇄 작전을 실질적으로 성공시킨 것이 한수호라는 열아홉 살의 학생이라는 사실.
둘째, 한수호를 돕기 위해 사왕오패 중 하나인 한울뇌왕 구천승이 발 벗고 나섰다는 사실.
셋째, 한수호를 따르는 강력한 존재들이 있어 그들 덕분에 수천의 몬스터 군단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불어 한수호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국가수호대의 4인 요원에 대한 사실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마지막 넷째.
아카데미 학생 중, 우태범이 네크로맨서였으며, 그가 함정을 파놓고 뱀파이어 좀비를 게이트 안으로 점핑 시켰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우태범은 한수호의 강력한 무력에 겁을 먹고 점프석을 이용해 도망쳤지만, 세상에는 단순히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건 한수호가 원한 내용이었다.
자신에 대한 것이 알려져 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에 사실을 숨겨 주길 강력하게 원했다.
한수호는 게이트가 폐쇄된 지 만 하루가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대한맹과 국수대의 철저한 보호 아래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몸을 회복할 수 있었던 한수호.
그가 정신을 차리자 많은 인물이 면회를 요구했다.
대한맹의 서한광과 이자웅을 시작으로, 지평학 교수와 국수대 남산 본부장, 그리고 특무부의 유대룡까지 비밀 보호시설을 찾아왔다.
한수호는 그들을 모두 만나 암흑섬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알파 몬스터를 어떻게 처치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더불어 현 대한민국의 마공사들을 아우를 수 있는 그들에게 한 사람을 꼭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한수호가 찾으려는 사람은 다름아닌 김유란이었다.
김유란은 회귀자였으나 이프리트의 손에 붙잡혀 고역을 치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이었다.
그녀를 찾아낸다면 이프리트의 아지트도 찾아낼 수 있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국수대의 남산 본부장인 안인범에겐 노희경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희경 또한 회귀자다.
하지만 구천승이 강지훈과의 대화에서 유추해 낸 바에 의하면, 그녀도 이프리트에 회유되었거나 강지훈에게 속아 정보를 넘겨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노희경이 국수대에서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과장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바쁜 하루가 지나가고 한수호는 본래의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때쯤, 비돈귀살은 대한맹의 맹주 서한광의 초대를 받아 어룡도로 향했다.
어룡도에 있는 태극서가의 별장에서 대한민국을 떠받들고 있는 중요 마공 조직의 수장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향후 이프리트와 황도13궁을 어떻게 상대할지를 논의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서한광과 비돈귀살은 한수호도 그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수호는 정중히 거절했고, 자신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홀로 땅끝마을을 떠났다.
물론 그 전에 친구들과도 따로 만나 짧게나마 회포를 풀었다.
특히 장한설과 권열에겐 조만간 서울에서 따로 만나고 싶다며 시간을 내달라고 조용히 부탁도 했다.
두 사람은 한수호가 이처럼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이유를 몰라 의아해했지만, 언제든 연락하면 시간을 내겠다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혼자가 될 수 있었던 한수호.
우선 가까운 도심지를 찾아간 한수호는 그곳에 숙소 하나를 잡아 놓고 전투영역으로 들어갔다.
암흑섬에서 얻은 것들을 정리하고,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한수호는 진입차단벽에 들어오자마자 인벤토리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놓았고, 아공간 복주머니도 꺼내 그 안의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놨다.
‘그런데, 자룡은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냥 게이트를 나와 버려서 소환마인 자룡이 어디로 간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게이트가 폐쇄되었으니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지?’
아무리 소환마라고 해도 회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연이 끊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푸르륵!
갑작스러운 투레질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몸을 홱 돌리자 2미터 크기의 거대한 흑마가 ‘나 불렀어?’ 하는 표정으로 한수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너 정말 소환마가 맞구나?”
자룡은 소환마답게 한수호의 생각만으로 얼마든지 소환 및 역소환이 가능했던 것.
“다음에 또 부를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있어. 곧 친구들도 소개시켜 줄게.”
한수호가 말한 친구들은 라라를 비롯해 월과 살이, 범이였다.
사툴란과 고니도 절대 빠질 수 없었고.
자룡이 조용히 어딘가로 사라지자 한수호는 한결 가뿐한 마음이 되어 눈앞의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 인벤토리 크기부터 확장시켜 봐야겠지?’
무려 1천이나 되는 코스트를 가진 인벤토리였지만, 세계수의 씨앗과 세계수의 잎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가 등장하게 되면서 코스트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한수호는 인벤토리를 더 이상 진화시킬 수는 없지만, 코스트 확장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 보자….’
곧바로 인벤토리의 마나회로를 분석하기 시작한 한수호.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마나회로가 훤히 머릿속에 그려졌고, 그곳의 어디를 건드려야 코스트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한수호가 마나회로의 몇 군데를 수정시키자, 예상대로 수정된 사항을 저장하겠냐고 묻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인벤토리의 코스트를 1 확장하는데 100,000LP가 필요합니다.
코스트 1 확장에 10만 LP.
엄청난 포인트였지만 그렇다고 확장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포인트야 언제든 또 벌면 되는 거니까.’
한수호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10만 LP를 과감히 투자했다.
>>인벤토리의 코스트가 1001로 확장되었습니다.
‘좋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나머지 포인트는 한 번에 태우는 거다!’
한수호는 코스트 확장에 성공하자마자 4990만 LP를 한꺼번에 사용해 코스트 499를 한꺼번에 확장했다.
>>인벤토리의 코스트가 1,500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코스트 500을 확장하는 데 소모된 포인트는 5천만.
포인트를 조금 과하게 낭비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나중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니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여기서 끝내면 아쉽잖아?’
한수호는 코스트 1,500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엔 포인트가 아닌, 다른 방법을 써서 코스트를 더욱 높일 생각이었다.
그 방법은 상처회복 특성이 회복류 아티팩트를 흡수함으로써 진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코스트 200짜리 아공간 복주머니를 손에 든 한수호.
주머니 안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마나회로를 이렇게 수정하면….’
좀 전에 인벤토리 특성을 분석하면서 이미 마나회로를 철저히 파악해 두었기에 수정은 어렵지 않았다.
7만의 LP를 소모하는 것으로 마나회로 수정을 마칠 수 있었던 한수호는 손에 쥔 아공간 복주머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순간,
>>인벤토리로 ’특별한 복주머니’를 흡수하여 코스트를 확장시키겠습니까? YES/NO
‘바로 이거지!’
한수호가 원하는 메시지가 그대로 떠올랐다.
한수호는 고민할 것도 없이 YES를 선택했고,
>>고급의 아공간류 아티팩트를 흡수하여 인벤토리의 코스트가 2000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복주머니 하나를 흡수시킨 결과로 코스트가 무려 500이나 늘어버렸다.
‘처음부터 이 방법으로 할걸.’
이 순간만큼은 5천만 포인트가 괜히 아까워졌다.
그래도 코스트가 2천으로 크게 늘어난 인벤토리를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럼 다음 코스로 가 볼까나?’
한수호는 룰루랄라 콧소리까지 흘리며 앞에 잔뜩 쌓인 무기와 아티팩트들을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넣어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