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한수호는 진입차단벽 안에서 30분이 넘도록 홀로 시간을 보냈다.
10분만에 인벤토리 확장을 끝마친 다음, 그가 처리한 건 발자크의 파편을 처리하고 얻은 NP와 초감각 포인트였다.
우선 848까지 차오른 NP에서 700을 떼어내 능력치에 공평하게 배분함으로써, 신체 능력치의 평균을 1,600까지 높였다.
그 다음은 초감각 포인트.
[정신+30][감지+20][면역+15][초감각+20]
이런 상태였던 초감각 항목들에 50포인트를 적당히 배분하고 나니,
[정신+40][감지+30][면역+25][초감각+40]
이렇게 훌륭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궁급 마공사의 초감각 수치가 10 이하인 걸 감안했을 때, 지금 한수호의 수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한수호는 자신의 초감각 수치를 바라보며 또 한 번 크게 만족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마나회복과 상처회복 특성의 진화였다.
발자크의 파편을 처리하고 얻은 두 가지 아티팩트.
바로 마나의 건틀릿과 재생의 건틀릿이 진화의 밑거름이었다.
두 아티팩트의 가치가 상당히 높아서일까?
특성에 건틀릿을 흡수시키자 두 특성 모두 최종 상태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특성: 마나회복(최종)]
-정신력을 소모하여 10초간 마나 회복력을 극도로 높여준다.
-효과: 마나 회복력 2000/정신력 1 소모
-쿨타임: 10분
[특성: 상처회복(최종)]
-면역력을 소모하여 5초간 상처 재생력을 극도로 높여준다.
-효과: 찰과상 회복, 타박상 회복, 자상 회복, 절상 회복, 화상 회복, 절단 재생
-쿨타임: 5분
아깝긴 해도 건틀릿을 소모해서 두 가지 특성을 진화시킨 것이 정답이었다.
이제 한수호는 마나 소모를 걱정하면서 싸우지 않아도 되고, 절단에 이르는 상처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재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세계수 아티팩트뿐인가?’
한수호는 손톱 크기인 세계수의 씨앗과 푸른 빛을 내는 세계수의 잎을 한 손에 하나씩 쥐었다.
하나는 결계를 형성시키거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여는 아티팩트였고, 다른 하나는 흡수를 통해 능력을 높이거나 씨앗의 힘을 강화시키는 아티팩트다.
‘아무래도 이 씨앗이 봉인구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아스루나의 대영웅 아스와 루나가 발자크를 봉인할 때 사용한 게 이 세계수의 씨앗이 아닌가 싶었다.
세계수의 잎은 씨앗만으로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조 역할로 사용한 것일 테고.
‘꽃잎 한 장만 흡수해도 능력을 두 배로 높일 수 있다는 건, 세 장을 다 먹으면 6배로 높아진다는 말인가? 아니지. 하나씩 따로 먹으면 8배까지 높일 수 있다는 거잖아?’
한수호가 그런 계산을 하며 일단 한 장만 먹어볼까?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띠링
카페 입구에 달린 종소리 같은 울림이 일더니,
>>세계수의 잎이 당신의 바람을 읽고 더 나은 사용법을 제안합니다.
-세계수의 잎 세 장을 한 번에 흡수하면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종의 진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최종 진화를 이루게 되면 발자크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구를 소환시켜 벌어진 틈새를 완벽하게 닫을 수 있습니다.
>>세계수의 잎을 한꺼번에 흡수하여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하세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더불어 그 무엇보다도 바라 마지 않고 있었던 내용이 한수호의 눈앞에 덜컥 떠올라 버렸다.
메시지가 전하는 말대로 발자크의 봉인구를 이곳으로 소환시켜 벌어진 틈새를 꽉 닫을 수만 있다면, 걱정하고 있던 모든 것을 한 번에 끝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쉽잖아?’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그 고생을 해 왔다고 생각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수호는 메시지를 차분하게 다시 읽어봤다.
‘….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종의 진화라.’
이 문구에서 뭔가가 굉장히 불편해지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이 시스템이라는 존재는 한수호가 처한 상황이나, 어떤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까지 대부분을 알고 그에 맞는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즉, 이미 초인화를 이룬 한수호에게 최종 진화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시스템이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이상하다. 게다가,
‘왜 굳이 세 장을 한꺼번에 먹으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 거지?’
한수호가 아는 시스템은 불필요한 반복을 좋아하지 않는다.
메시지를 읽는 사람에게 강조해 주기 위해 특정 단어나 문구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여주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확실히 수상해.’
한수호는 눈을 얇게 뜬 채로 한가지 특성을 발휘시켰다.
특성의 이름은 ‘심리분석’.
이 특성은 스승 구천승의 명경지수 특성을 인챈트 하여 얻어낸 열화판이었다.
하루 전 한수호는 특수 치료실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 구천승에게 ‘쇄혼’과 ‘내가중수’, 그리고 ‘상처회복’ 특성을 인챈트 스톤에 새겨 건네줬었다.
그걸 받은 구천승은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결국 자신의 특성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스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한수호는 ‘심리분석’이라는 보조 특성을 하나 더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특성: 심리분석]
-상대가 만들어 내는 소리, 문자, 생각에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경우, 떨림 현상이 발생합니다.
-마나력 1천을 소모하면 좀 더 자세한 파악이 가능합니다.
어찌 보면 한수호에게 안성맞춤인 특성.
한수호는 시스템을 상대로 이 심리분석 특성을 처음으로 사용해 보기로 했다.
눈앞에 떠 있는 메시지를 응시한 채, 심리분석 특성을 발동시키자,
지직. 지지직-
메시지들이 뭔가에 방해전파를 받은 것처럼 노이즈 현상을 일으켰다.
‘이거 떨림 현상인데?’
예상대로 메시지에 뭔가가 있었다.
한수호는 바로 마나력 1천을 소모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분석시켰다.
115그 결과, 메시지에 숨겨진 놀라운 내용이 드러났다.
-히든피스: 발자크가 봉인 해제를 위해 파 놓은 함정입니다.
히든피스.
어처구니없게도 방금 한수호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는 시스템이 띄운 것이 아니라 발자크가 심어 놓은 의도된 메시지였던 것.
‘와, 소름. 발자크, 이 자식 이딴 짓도 할 수 있었어?’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건, 얼마든지 이프리트와 손을 잡아 원하는 것을 이룰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이 가짜 메시지가 의도한대로 한수호가 세 장의 잎을 한꺼번에 먹었다면?
한수호의 몸이 크게 잘못되었거나, 발자크의 봉인을 오히려 해제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한수호는 여전히 눈앞에 떠있는 메시지 창을 향해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힘껏 찔러 넣었다.
양손으로 빅엿을 먹여 메시지를 사라지게 한 한수호.
기분이 잡친 그는 세계수의 씨앗과 잎에 대한 분석은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 *
땅끝마을 게이트 폐쇄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세상은 그 어느때 보다도 시끌벅적 해졌다.
대한맹, 특무부, 정의국이 힘을 합쳐 비밀리에 이프리트와 황도13궁을 색출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이프리트는 몰라도, 황도13궁의 경우 극우파와 극좌파로 갈라져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다 똑같은 악적일 뿐이었기에 차별 대우는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땅끝마을 게이트 폐쇄 이후, 한수호는 구천승과 함께 대한민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게이트를 수거했다.
그동안 수거한 게이트와 던전을 모두 합하면 무려 47개가 된다.
대한민국은 한수호 덕분에 게이트 청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소문은 세계로 뻗어 나갔고,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찾아와 ‘게이트 소멸자’의 협조를 요청했다.
게이트 소멸자.
이는 손을 대는 것만으로 게이트를 사라지게 만드는 한수호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대한맹, 특무부, 정의국, 그리고 국수대의 몇 명만이 게이트 소멸자가 누구라는 사실을 알 뿐,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 정보를 아는 사람들은 한수호에 대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다른 나라의 요청에 제대로 된 답변을 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한수호는 국수대를 통해 정부에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 덕에 대한민국 정부는 도움을 요청한 국가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게이트 소멸자는 지금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게이트와 던전을 처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부족하니,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꼭 힘을 빌려줄 것이다.]
이 공문을 받은 국가들은 서둘러 대한민국에 줄을 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아티팩트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A급 이상의 마나코어도 싼값에 대량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게이트 소멸자가 게이트를 처리해 주는 대가로 받을 금액은 개당 최소 50억이라는 거액으로 책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수호 덕분에 신바람이 났다.
게이트 소멸자를 보유했다는 이유 하나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드높아졌으며, 세계 강대국들이 머리를 숙이고 모든 조건을 맞춰주기로 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로 인해 국수대가 지니는 힘은 대통령 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현재, 외부에 알려진 게이트 소멸자와의 유일한 연락책이 국수대의 특수 작전팀이었다.
이윤철 요원이 팀장으로 있는 4인 작전팀은 한수호 덕분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지원을 마음껏 누리는 중이었다.
아주 가끔씩, 정말 급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만 진무현이 한수호에게 연락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때마다 한수호는 적극적으로 국수대에게 도움을 주었다.
한수호 입장에선 건당 50억이라는 엄청난 이득이 있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수호는 외국에 있는 게이트를 처리할 때에만 50억을 받았고, 국내 게이트 처리는 20억이라는 다소 낮은 비용을 받았다.
원래는 무료로 처리해 주다가, 정부가 알아서 비용을 치르겠다고 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2051년 12월 26일.
한수호는 구천승을 통해 자신을 찾아온 방태식을 만나는 중이었다.
현재 한수호가 머물고 있는 곳은 부산.
며칠 전 새로 발생한 3급 게이트를 처리하기 위해 국수대와 함께 부산에 방문했다가, 방태식과 연락이 닿은 것이다.
마침 한수호 역시 방태식을 찾고 있던 터라 잘됐다 싶어 흔쾌히 만남을 허락했다.
부산의 한 카페.
국수대의 도움으로 외부의 접근이 차단된 카페 안에서 한수호는 구천승과 함께 방태식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네.”
방태식은 전에 비해 꽤나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개월간 방태식은 대한맹과 특무부의 집요한 추격을 받느라 제대로 먹지도, 휴식을 취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방태식이 황도13궁의 인마궁 궁주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십 년이 넘도록 그가 비윤리적인 인간실험을 해왔다는 사실 때문 때문에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었다.
방태식은 자신이 지금껏 해온 실험에 비윤리적인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줄 리 없었다.
결국, 더 버티기 힘들 지경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구천승을 찾았고 한수호와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허…. 몸이 힘든 거야 어찌저찌 버텨낼 수 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질 않으니 마음이 너무 괴롭더군. 이 무거운 마음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찾아오게 되었네.”
방태식은 구천승을 힐금 돌아봤다가 한수호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흘려보냈다.
“인마궁은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방태식이 지금은 이렇게 초라해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황도13궁의 인마궁 궁주로서 휘하에 수백명의 수하를 두고 있던 인물이다.
그 인마궁이 대체로 인체실험을 하는 기괴한 인물들로 가득하다는 점만 아니었어도 세상은 그의 말을 믿어 줬을지 모른다.
“인마궁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네. 내 손으로 직접 공중분해 시켰지.”
“실험체들은요?”
“안타깝게도 실험체들은 모두 이프리트에서 수거해 간 모양이더군. 내가 한발 늦었네.”
“그럼 수백의 키이라가 이프리트에 넘어갔다는 거군요?”
한수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키이라라는 변종 생명체를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새한교다.
하지만 새한교에 그 키이라의 원형이 되는 실험체를 대주고 있던 곳이 바로 인마궁이었기에 방태식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인마궁에서 보유하고 있던 실험체들은 모두 특급 이하라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네. 게다가 새한교가 박살이 났으니 키이라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연구자료도 많이 부족할 게야.”
“그건 그쪽 생각이고요.”
한수호는 새한교를 뒤에서 조종한 것이 이프리트라는 걸 잘 알기에 키이라 제조법도 이프리트에서 모두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실험은 모두 병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서였네. 황가련의 오빠 황윤성을 봤으니 자네도 알지 않나?”
“죽어가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놓는게 과연 잘한 일일까요?”
“적어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럼 황윤성한테도 기회를 줬습니까?”
“그, 그건….”
방태식이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한수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앞으로 똑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신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수호는 방태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았고, 그걸 해결해 줄 방법이 있었다.
“정말인가? 나한테 내려진 수배만 풀어준다면 뭐든 할 수 있다네!”
“좋습니다. 그럼 그 말을 믿고 수배를 풀어드리죠. 대신 두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하게.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한수호는 반색하는 방태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리 생각해 둔 내용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제가 알려드리는 장소로 가서 그곳에 있는 분과 협력하여 키이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세요. 기한은 반 년입니다.”
“그거야 아무 문제가 없네. 나도 뭔가를 분석하고 파고드는 걸 즐기는 연구원이나 마찬가질세. 반 년 안에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내지.”
한수호가 말한 장소는 다름아닌 특무부 산하에 있는 마공연구소였고, 그곳에 있는 분은 다름아닌 사기환이었다.
사기환과 방태식 조합이면, 키이라를 되돌릴 방법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게 한수호의 생각이었다.
“다음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겁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방태식이 ‘응?’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른 척하신다면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하지요.”
“아니, 그게 무슨? 일단 제대로 설명부터 해 주게. 자네가 말한 두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방태식이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한수호는 싸늘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씹어 먹듯 말했다.
“10년 전. 지리산. 한성찬. 한설아.”
한수호가 말한 몇 개의 단어들.
그걸 들은 방태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