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34호 게이트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라북도 계화도에 흉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무려 3급 게이트.
5년 전에 갑자기 발생한 이 게이트는, 계화도를 유령도시로 만들 정도의 큰 인명 피해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특무부와 정의국에선 이 게이트를 폐쇄하려고 정예 요원들을 투입시켰지만, 끝내 게이트를 폐쇄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작전 실패의 원인은 다른 게 아니다.
계화도 게이트를 통해 이동하게 되는 곳은 ‘티탄’이라는 거인족이 서식하는 산맥이었는데, 그 거인족의 부락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
요원들은 이 첫 번째 폐쇄 작전에서 티탄의 부락을 찾아냈고, 엄청난 양의 황금과 다양한 아티팩트, 그리고 특성석까지 발견했다.
그들은 이런 보물들을 숨기고 있는 티탄족 부락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에, 폐쇄 작전을 멈추고 귀환했던 것.
그 이후로 이 게이트는 폐쇄 대신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티탄들이 사는 산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반경 5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 정도 하는 다른 게이트들과는 다르게, 이 계화도 게이트의 결계는 반경 100킬로미터가 넘었다.
그래서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티탄족 부락도 수십 개가 넘었다.
게이트가 발생한 지가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모든 티탄족 부락을 찾아내지 못했을 정도.
폐쇄가 유지로 바뀌면서 발생한 피해는 계화도와 인근 주민들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게이트 발생 시에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로 계화도의 마을은 거의 초토화 되었으며, 게이트가 계속 유지되게 됨으로써 마을 재건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게이트 주변엔 연대 병력이 배치되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계화도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상황이 5년 내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 항의가 힘을 갖게 된 건 얼마 전 이 게이트에 대한맹이 관여하면서부터였다.
땅끝마을 게이트가 폐쇄에 성공하게 되면서 위신이 높아진 대한맹.
그 대한맹은 정부에 계화도 게이트의 폐쇄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대한맹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정부는 특무부와 정의국에 게이트를 폐쇄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한맹과 정의국은 게이트를 폐쇄하는 대신 게이트 소멸자의 힘을 빌려 게이트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다.
한수호가 게이트를 옮기는데 받기로 한 금액은 30억.
하지만 한수호는 역으로 제안을 하나 했다.
게이트를 옮기면 다시 그 지역에 군부대를 배치해야 하고, 부대 유지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니 게이트를 이동하지 않고 차라리 자신이 보관함으로써 그 비용을 최소화시켜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또한 정부의 허락을 받은 마공 요원들이 정기적으로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니 정부로서는 크게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한수호가 게이트를 가져가고 보관해 주는 대가로 받은 금액은 무려 60억이었다.
그렇게 해서 계화도 게이트는 지금 한수호의 보관 창고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었다.
한수호는 계화도 게이트, 여기서는 34호로 불리는 게이트 앞에 섰다.
살이가 말한 이상 현상에 대해 파악해 보기 위해서였다.
[주인. 보다시피 게이트 표면의 빛이 전보다 크게 옅어졌습니다.]
과연 게이트 표면에서 일렁이는 푸른빛이 굉장히 약해졌다.
이 푸른빛이 강할수록 급이 높은 게이트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빛이 강해지면서 게이트 등급이 올라가는 건 본 적이 있어도, 지금처럼 반대로 빛이 약해지는 건 처음이었다.
‘뭐야, 등급이 정말 낮아졌네?’
한수호는 34호 게이트의 정보창을 눈앞에 띄워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6급 게이트 ‘티탄 마운틴’]
-보유 포인트: 800,000LP
-위험도: ★★★★☆☆☆☆☆☆
-아스루나 대륙의 거인족 티탄들이 부락 단위로 서식하는 커다란 산맥입니다.
-티탄족의 부락을 찾는다면 상당한 보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발자크는 이곳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포인트를 흡수하면 던전의 위험도가 상승하여 보상 수준이 상승합니다. 포인트를 흡수하겠습니까? YES/NO
원래 34호 게이트는 3급에 위험도는 8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6급에 4성으로 크게 하락했다.
‘뭔가 이상한데?’
등급은 떨어졌지만 보유 포인트는 80만으로 전과 동일하다.
마치 게이트를 관장하는 누군가가 지금 한수호에게 포인트가 필요한 걸 알고 딱 맞춰서 게이트 등급만을 낮춰준 것 같은 상황.
‘나보고 마음 놓고 포인트 흡수하라고 꼬시는 거 같은데?’
위험도가 4성이니 5성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이 상황이 짜인 각본 같다는 점.
한수호는 바로 심리분석 특성을 사용했다.
지난번에도 세계수의 잎을 얻은 이후 이상한 메시지를 띄워 한수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적이 있었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심리분석 특성을 사용하자, 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게이트 정보창에 노이즈가 생기며 글자들이 찰나적으로 일그러졌다.
‘또냐? 대체 누가 날 상대로 자꾸 이런 장난질을 치는 거지?’
처음엔 발자크가 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리 발자크가 대단한 마왕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시스템 메시지까지 마음대로 조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발자크는 아니지만, 시스템을 다룰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건 분명해.’
한수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1천의 마나를 소모해 자세한 분석을 시도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스템 에러로 세부 사항을 볼 수 없습니다.
처음 보는 에러 메시지.
어이없게도 이번엔 세부 사항을 분석해 낼 수 없었다.
‘뭐야, 이거?’
한수호는 혹시 다른 문제가 있나 싶어 한 번 더 마나를 소모해 세부 사항을 분석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스템 에러로 세부 사항을 볼 수 없습니다.
나타난 메시지는 동일했다.
한수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34호 게이트의 등급이 낮아진 건, 분명 누군가의 함정이다.
다만 그 함정을 판 주체가 적어도 발자크는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시스템을 조종할 수 있는 누군가가 일부러 한수호가 이 게이트의 포인트를 흡수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건데, 그 의도가 무엇이냐가 관건이었다.
게이트 앞에서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한수호.
‘뭐, 좋아. 이게 날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라면, 시원하게 함정에 빠져주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누군가가 준비한 함정이라는 건 알지만, 그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은 그 누군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또한 한수호는 그 어떤 함정이 준비되어 있어도 충분히 헤쳐나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한테 해를 입히기 위해서였다면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준비하진 않았겠지.’
한수호는 눈앞에 떠 있는 게이트 정보창을 바라보다가 포인트를 흡수하기 위해 YES를 선택했다. 순간,
>>포인트 흡수 시, 게이트의 등급 및 위험도가 상승합니다.
>>예상 등급: 5급
>>예상 위험도: ★★★★★☆☆☆☆☆
>>게이트 내에서 획득 가능한 보물 수준이 상승합니다.
>>위험도가 상승해도 발자크의 관심을 끌지 않습니다.
>>포인트 흡수를 실행하겠습니까? YES/NO
메시지 내용만 봐서는 발자크가 파놓은 함정은 아닌 듯했다.
한수호는 연이어 YES를 선택했고, 또 다른 메시지가 등장했다.
>>포인트를 흡수하였습니다.
>>획득 포인트: 800,000LP
>>위험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게이트에 포인트가 축적되기 시작합니다. [00:00:00:05]
>>포인트 축적이 끝나면 포인트 재흡수가 가능합니다.
‘어라?’
한수호는 포인트 축적 시간을 보고 크게 놀랐다.
불과 5초.
보통의 게이트나 던전은 한 번 포인트를 흡수하면 재흡수를 위한 포인트 축적 시간이 거의 30일이나 걸린다.
그런데 이 게이트는 5초 만에 재흡수가 가능했다.
5초가 순식간에 지났을 때, 한수호는 게이트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5급 게이트 ‘티탄 마운틴’]
-보유 포인트: 2,000,000LP
-위험도: ★★★★★☆☆☆☆☆
….
>>포인트를 흡수하면 던전의 위험도가 상승하여 보상 수준이 상승합니다. 포인트를 흡수하겠습니까? YES/NO
정말로 포인트 재흡수가 가능해졌다. 그것도 2백만이나 되는 높은 수치로.
‘2백만 포인트면 3천만 LP 가볍게 넘기겠는데….’
현재 한수호의 LP는 2천9백만을 살짝 넘긴 상태.
5급 게이트가 된 ‘티탄 마운틴’의 포인트를 흡수하면 3천만을 넘기게 되면서 체질 개선 최종 단계를 실행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내 사정을 완전히 읽고 있어.’
한수호가 쉽게 거부하지 못하게 필요한 걸 딱 맞게 띄워준다는 건 그만큼 한수호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
‘어디 끝까지 해 보자고.’
한수호는 이번에도 다시 YES를 선택했다.
좀 전과 동일한 메시지가 떠올랐고, 한수호는 포인트 흡수를 위한 마지막 선택까지 마쳤다. 그때 등장한 또 다른 메시지들.
>>포인트를 흡수하였습니다.
>>획득 포인트: 2,000,000LP
>>위험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게이트가 최종 진화에 돌입합니다.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게이트 최종 진화는 또 뭔데?’
의구심이 든 한수호는 변경되었을 게이트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정보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헬급 게이트 ‘드래곤 마운틴’]
-위험도: ★★★★★★★★★★
-아스루나 대륙의 대적룡 볼케스가 잠자고 있는 드래곤 산맥입니다.
-볼케스의 레어를 찾는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든피스: ‘널 위해 준비했어’
>>‘헬급’으로 상승하여 아스루나에 존재하는 결계가 사라집니다. [09:23:59:57]
>>결계가 완전히 풀리면 암흑섬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집니다.
헬급 게이트.
거기다 위험도 10성.
사실 이 정도는 대충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 34호 게이트는 3급에 위험도 8성짜리였으니까.
그런데 거인족 티탄이 드래곤 볼케스로 바뀌었다.
거기다 아스루나의 결계가 사라지고, 암흑섬으로 이동까지 가능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더 중요한 건,
-히든피스: ‘널 위해 준비했어’
딱히 심리분석 특성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자랑하듯 히든피스를 떡 하니 띄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누가 이걸….’
한수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있자, 월이 다가와 물었다.
“주인, 문제라도 생긴 건가?”
“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월 덕분에 정신을 차린 한수호는 다시 한번 게이트 정보창을 자세히 훑었다.
‘헬급 게이트에 드래곤 볼케스라…. 이놈을 잡고 보상을 취한 뒤 암흑섬으로 이동해서 발자크와 마지막 결전을 벌여라, 뭐 이런 건가?’
누군지 모를 시스템의 존재는 한수호에게 발자크를 조우할 수 있는 지름길을 마련해 준 것이다.
분명 이 존재는 한수호에 대한 걸 무척이나 잘 안다.
한수호가 개조 특성으로 시스템 정보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이프리트가 악몽급 게이트를 발생시킬 모든 준비를 끝내기 전에 놈들을 공중분해 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2058년에 대재앙이 오기 전, 발자크를 일찌감치 처리하길 원한다는 것도…
‘앞으로 10일 남았군.’
메시지엔 아스루나의 결계가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이 10일로 표시되어 있었다.
게이트를 보니 푸른빛이 회색으로 변해 아무런 빛도 없이 표면의 일렁임 마저 멈춰져 있었다.
‘게이트가 비활성화된 건가?’
이 상태에선 게이트에 진입이 불가능했다.
즉, 정해진 10일이 지나야 게이트 진입이 가능하다는 뜻.
‘설마 폰노이만 박사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문뜩 떠오른 인물은 폰노이만 박사.
이미 오래전에 아스루나에서 영면에 들었을 그가 이 시스템의 주인이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
하지만 말 그대로 설마일 뿐,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따라 주인, 많이 이상하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한수호에게 월이 다시 말을 걸었다.
뚱한 얼굴로 한수호를 바라보는 고블린 봇, 월.
이제는 인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성장한 AI였다.
‘어쩌면….’
어쩌면 이 월도 누군가의 안배에 따라 탄생한 시스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몬스터 봇으로 만들어진 고블린이 이처럼 엄청난 AI로 진화해 인간처럼 대화하고, 궁급 마공사를 능가하는 능력을 지니게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처음 월을 만들어낸 사기환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전투 영역을 사용할 수 있는 몬스터 봇을 자신의 힘만으로 만들어 냈다는 사기환의 이야기는 정말 사실이 맞을까?
온갖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고니, 이 녀석도 월만큼이나 뛰어난 AI를 지녔잖아?’
월 옆에 쪼그려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고 있는 고니.
월과는 달리, 고니는 아스루나 세상에서 폰노이만의 손에 만들어진 몬스터 봇이다.
그런데 고니와 월의 AI 능력이나 전투 기능은 사실 큰 차이가 없었다.
AI적인 면에서는 월이 크게 앞서고, 전투 능력은 고가 훨씬 높긴 해도 한수호가 보기엔 갖추고 있는 시스템이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고니와 월을 번갈아 바라보던 한수호.
결국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가 택한 건.
‘아, 복잡해. 관두자, 관둬. 이러고 시간 낭비하느니 가서 체질 개선이나 끝마치는 게 낫겠다.’
한수호는 휘적휘적 걸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