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강우진과 정체불명의 외국인 사내.
두 사람의 전투는 단 3분 만에 막이 내려졌다.
강우진이 펼쳐낸 모든 공격은 사내의 방어를 단 한 번도 뚫어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강우진의 공격이 죄다 빗나가고 말았다.
사내의 몸에 기름칠이라도 되어 있는지, 강우진이 그 어떤 공격을 펼쳐도 사내의 몸에 닿는 순간 각도가 꺾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
그렇게 2분여간 강우진의 폭풍 같은 공격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순간에 사내가 두 번째로 크게 한 발 내디뎠다.
그리고 쭉 펼친 두 손으로 힘차게 손뼉을 친 순간,
꽈앙!
묵직한 충격파가 터지며 강우진이 그대로 튕기고 말았다.
강우진은 이번에도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전처럼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무릎을 두 손으로 짚고 선 상태로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장발 사내는 그런 강우진을 거만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내가 본 젊은 놈 중에서는 가장 오래 버텼다. 아직까지는.”
사내의 시선이 천천히 한수호 쪽으로 옮겨졌다.
그 시선엔 강우진보다 오래 버틸 자신이 있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그에 대한 한수호의 대답은 엉뚱했다.
“얼굴을 가리는 장발. 파란 눈에 검게 염색한 머리. 핏빛처럼 붉은 가죽 재킷. 그리고 궁급에 이른 마공사를 장난하듯 상대하는 미친 피지컬의 소유자. 이 네 가지를 종합해 보니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는군요.”
한수호는 마치 장발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장발 사내가 살짝 놀란 얼굴로 ‘오’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네 생각엔 내가 누구인 것 같으냐?”
사내도 한수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한수호는 한 박자 쉬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사대광마 중 최강자로 일컬어지는 대마인. 혈마 신유.”
또박또박 이어진 말에 사내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구 선배가 후계자 하나는 확실히 잘 고르셨구만. 소문엔 강지훈, 그 자식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다고 해서 여러모로 실망했었는데….”
사내는 자신이 신유임을 인정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강우진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높은 강우진이었지만, 한수호와 비교한다면 자신이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혈마 신유 어르신.”
한수호도 신유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르신은 빼라. 네 애비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거 무슨 늙은이 같은 호칭이냐?”
“그럼 뭐, 삼촌이라고 불러드립니까?”
“삼촌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군.”
혈마 신유는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라는 호칭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
“10년 전, 모든 걸 버리고 한국을 떠나신 게 아니었습니까?”
구천승에게 듣기로, 신유는 친구였던 한철형을 배신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일궈놓은 자신의 세력을 모두 버리고 한국을 떠났다.
그런 신유가 10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온 이유가 뭘지, 한수호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 그 이유를 묻다니. 끝까지 모른 척하려는 것이냐?”
이번엔 신유가 오히려 되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한수호.
구천승에게 들었던 혈마 신유에 대한 사실을 떠올리던 한수호는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였네요. 제가 가진 아공간 능력. 그로 인해 제가 능력에 잠식되어 제정신이 아닐 거라 생각해서 찾아온 건가요?”
“알면 됐다. 네가 아무리 한철형의 아들이라고 해도, 아공간 능력에 잠식된 이상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
“제가 아공간 능력에 잠식됐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하실 거죠?”
한수호는 그런 일 없다고 변명하지 않았다.
혈마 신유는 자신이 본 것만 믿고, 자신이 직접 판단한 사실만을 신뢰한다.
그러니 한수호가 자기변호를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야 매우 간단하지. 아무리 정상인 것처럼 연기를 해 보여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말거든.”
“그래서 절 한계까지 몰아붙이시려고요?”
“나한테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뭐, 그러시겠죠. 수십 년간 쭉 해오신 일이지 않습니까?”
한수호는 신유가 아공간 능력자만 찾아내서 그들을 철저하게 때려 부숴왔다는 걸 잘 안다.
심할 때는 아공간 능력자의 목숨을 취하고, 그게 아니어도 두 번 다시는 아공간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병신을 만들어 왔으니까.
“부디 네 목숨까지 취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마.”
“그런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가 말이냐?”
신유가 되묻자 한수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알기로, 혈마 어르신도, 아니 삼촌께서도 아공간 능력자 아닌가요? 본인은 아공간 능력을 사용해도 괜찮고, 다른 사람은 안된다? 이건 너무 전형적인 내로남불 아닙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신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난 괜찮거든. 하지만 다른 놈은 괜찮지가 않지.”
“억지네요.”
“내가 억지 좀 부린다고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군지 그새 잊었나 보구나.”
신유의 말에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 신유.
그 이름의 주인공은 진실도 거짓으로 만들고,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럼 한번…. 해보시죠.”
한수호는 손바닥을 뒤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도전적인 자세.
이에 신유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딱 3분이다. 3분 내에 네 녀석의 본색을 드러나게 해주마.”
“얼마든지요.”
한수호는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가 길게 이어지던 어느 순간,
꽝
신유가 오른발로 바닥을 때렸고,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한수호를 향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강우진을 상대할 때보다 배는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었다.
콰과과과과과
사방을 짓이기듯 밀려든 마나의 파동.
한수호는 그 공격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막아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꽈앙!
똑같은 방법으로 땅을 발로 찍어내 맞불 작전을 펼쳐냈다.
콰아아악
한수호가 만들어낸 마나의 파동은 쐐기처럼 뻗어나갔다.
그리고,
촤아아아악!
신유가 만들어낸 마나의 파동을 단숨에 반으로 갈라버렸다.
자신의 공격이 너무도 쉽게 파훼 되자 신유가 눈을 부릅떴다.
“이놈 봐라?”
신유는 마나의 파동을 가르며 나는 듯이 달려드는 한수호를 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신유가 아니었으면 달려드는 모습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한수호의 움직임은 섬전처럼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유의 코앞으로 날아든 한수호.
그의 주먹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주먹은 은은한 빛의 마나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안에 담긴 힘은 신유의 상상을 초월했다.
상대를 쉽게 생각했던 신유는 크게 놀라며 단숨에 7할의 마나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한수호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때려 박았다.
꽈아아아아앙!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사방으로 후끈한 열기가 확 퍼져나갔다.
두 주먹의 충돌지점은 움푹 꺼져 들었고, 흙과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드러난 놀라운 결과.
신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반면, 한수호는 10여 미터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는데도 의외의 결과가 나오자 한수호도 조금 놀란 듯했다.
‘공격이 빗나갔어?’
방금 전의 충돌에서 손해를 본 건 자신이었다.
그 이유는 한수호가 뻗어낸 주먹이 신유의 주먹에 닿는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방향이 틀어졌기 때문.
한수호는 이것이 신유의 특성이라는 걸 간파했다.
‘어디 한 번 더.’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다시 뛰쳐나간 한수호.
그는 주먹에 마나압축법을 사용해 1천의 마나로 4천의 파괴력을 실었다.
이에 대한 신유의 대응도 비슷했다.
그 또한 좀 전과 같이 7할의 마나력을 주먹에 담아 한수호를 향해 힘차게 뻗어냈다.
또다시 허공에서 마주친 두 개의 주먹.
콰아아아아아앙-
좀 전보다 더욱 커다란 폭발이 터지며 강력한 충격파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촤르르르르륵
이번에도 한수호가 뒤로 한참을 튕겨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한수호도 분명히 봤다.
자신의 주먹이 미끄러지듯 방향이 틀어졌고, 그 틈으로 신유의 주먹이 파고드는 장면을.
‘이거였군.’
한수호는 이번 공격으로 신유가 지닌 특성의 비밀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신유가 지닌 특성은 일종의 굴절 효과를 지녔다.
상대의 공격이 날아드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그 타격점에 굴절의 힘이 발동되고, 그 힘은 상대의 공격 방향을 비틀어 버린다.
게다가 신유의 특성은 상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든 상관없이 거의 완벽하게 발동되는 모양.
상대가 강할수록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특성은 한수호로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습니다.’
한수호는 이미 이 특성의 약점을 알아챘다.
다시 한번 마나압축법으로 주먹에 힘을 응축시킨 한수호.
그가 사방에 가득한 흙먼지를 꿰뚫고 달려들자, 신유는 그 고집스러움에 기막혀했다.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이냐?”
이미 두 번이나 당해놓고도 변함없이 같은 공격을 해 오다니.
신유는 이번엔 완벽하게 한계까지 몰아붙이기 위해 8할의 마나력을 끌어올렸다.
서로를 향해 달려든 두 사람.
한수호의 주먹과 신유의 주먹이 똑같은 형태로 마주치는 그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이이이잉
한수호의 머릿속으로 고음의 초음파가 파고들었다.
그 즉시 세상의 시간이 10분의 1로 느려졌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지만 한수호 본인의 시간만 10배로 빨라졌다.
초감각을 사용한 한수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신유의 주먹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리고 주먹과 주먹이 닿는 순간, 신유의 눈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그의 주먹에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거다!’
이미 두 번이나 한수호의 주먹을 빗겨나가게 만든 것의 정체.
그 굴절의 힘을 확인한 순간, 한수호는 주먹을 찰나적으로 멈춰 세웠다.
굴절이 발동되는 시간은 찰나였다.
정확한 타이밍에서만 완벽한 굴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유만의 특성.
때문에 타이밍을 잃은 순간 특성은 더 이상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한수호의 주먹이 다시 뻗어나갔을 때,
꽈아아아아아아앙!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다.
공간이 폭발하며 만들어 낸 후끈한 열기와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흩날리는 흙과 돌조각들.
“윽!”
콰드드드드드
이번에 튕겨 나간 건 바로 신유였다.
그것도 무려 20여 미터나 튕겨 나간 신유는 볼썽사납게 나뒹굴 뻔한 몸을 가까스로 멈춰 세웠다.
“…!”
신유는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껏 그의 특성 ‘굴절’을 단일 공격으로 파훼해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선 이 굴절이 큰 소용이 없지만, 일대일의 전투에서, 특히 단발성 공격으로는 그 누구도 뚫어내지 못했었다.
이 굴절의 핵심은 타이밍.
기계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능력이 발동되기 때문에 실패할 수가 없는 특성인 것이다.
굴절은 신유가 지닌 아공간 시스템의 A.I인 ‘제론’과 연계되어 있기에 타이밍이 잘못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한수호가 그 타이밍을 빼앗았다.
분명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굴절이 발동됐는데, 한수호는 그 타이밍을 역으로 이용해 시간차 공격을 펼쳤다.
타이밍과 타이밍의 싸움.
이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는 한수호였다.
“내 특성을 간파해 낸 것이냐?”
“대충은요.”
“손이 꽤 매섭구나.”
“이제 매움 단계 1인데, 벌써 긴장하시면 안 되지요.”
“하…. 그래, 네놈이 말한 그 매움의 단계는 몇까지 있느냐?”
“12까지요.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한수호의 말에 신유는 기가 막힌 듯 허허 웃고 말았다.
신유는 지금 한수호가 한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단 두 번 만에 굴절 특성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걸 파훼 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보다 파훼에 사용한 마나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게 더욱 놀랍다.
신유의 정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A.I 제론은 상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전달해 준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어도, 상대가 지닌 마나가 궁급인지, 파급인지, 멸급인지 정도는 사전에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수호와 일전을 벌이기 전, 제론은 이렇게 말했다.
한수호의 마나량은 최대 파급을 넘지 못한다고.
이미 파급을 넘어 멸급 끝자락에 올라 있었던 신유이기에 한수호가 아무리 발악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방금 전 한수호의 일격에 튕겨 나간 신유에게 제론이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파악한 능력 정보에 오류가 있었습니다. 현재로선 상대가 지닌 능력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멸급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합니다. 어쩌면, 이미 카뮤 님을 넘어섰을지도 모릅니다. 방금 펼친 마나는 청년이 지닌 진짜 마나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A.I 제론.
때문에 신유는 한수호가 지닌 마나가 자신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제론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녀석의 마나량이 날 넘어설 정도라니….’
신유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한수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럼…. 계속하실까요?”
한수호가 환하게 웃으며 신유를 향해 손을 펼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