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신유는 공격 대신 대화를 시도했다.
“방금 그 기술, 이름이 뭐지?”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고 편안한 얼굴로 질문을 던지는 신유.
지금 모습만 봐서는 정말 조카를 대하는 삼촌과 다를 바 없었다.
“마나압축법을 이용한 정권 지르기요.”
한수호가 대충 지어 만든 이름을 알려줬지만, 신유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역시 특성이 아니었군.”
“아직은 특성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신유를 완전 무시하는 말.
하지만 신유는 발끈하지 않았다.
“특성도 여러 개에, 특성에 맞먹는 기술도 여러 개라…. 복이 많은 녀석이로구나.”
신유는 한수호가 여러 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수차례 목숨을 건 대가죠.”
“살기위해 목숨을 걸었다?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라….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놈이로구나. 나처럼 말이지. 후후후.”
신유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자 한수호는 슬며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흠…. 저기요. 아무래도 계속 하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은데…. 여기서 끝낼까요?”
이 말에 신유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럴 리가.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그만둘 수야 없지.”
신유는 한수호에 대한 판단을 상향 조정하고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특성을 발동시켰다.
지징-
신유의 머리 위로 동그란 빛의 고리가 나타났다.
그 고리는 빠르게 신유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고, 고리가 지나간 부위는 푸른 갑주로 뒤덮여 있었다.
푸른 빛의 전신 갑주.
예전에 한수호가 얻은 혼마흑갑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의 갑주였다.
“네 녀석의 본색을 드러나게 하려면, 나도 진심으로 해야 할 것 같구나.”
신유는 한수호가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진심으로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한수호는 그런 신유의 진심을 바로 알아봤다.
[신체외적능력] : 810(+189)/999
[신체내적능력] : 12(+8)/99
[마나] : 9,300(+9,000)/99999
[육체한계치] : 1/3
처음 봤을 때보다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크게 상승했다.
게다가 육체한계치는 아직도 1의 수준.
앞으로도 더욱 능력치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이제는 한수호도 더 이상 가볍게 대할 수가 없었다.
현 상태만으로도 이미 발자크의 파편에 가까운 능력치를 보이고 있는 신유.
그가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라면 한수호도 긴장해야만 했다.
“그럼 저도 약간의 진심을 담겠습니다.”
다소 건방진 말이었지만 신유는 화를 내지 않았다.
힘이 없는 자가 건방을 떤다면 참교육을 시전하겠지만, 힘이 있는 자가 건방을 떠는 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오냐. 오늘 한번 끝장을 보자꾸나.”
두 사람이 마주 선 상태로 각자의 마나를 서서히 끌어올리기 시작할 때였다.
우웅-
게이트 바로 옆에 축구공만 한 검은 공간이 열리더니,
툭
돌하르방처럼 생긴 손바닥 크기의 돌멩이가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돌멩이는 곧바로 바닥을 파고들었고, 머리 부분이 만개한 꽃처럼 확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푸른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파아아아아앗
돌하르방 머리 위로 포털이 열렸다.
이건 두고 볼 것도 없는 점프포털이었다.
포털은 한 사람을 밖으로 토해냈다.
다소 왜소한 체구에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음침한 분위기의 여자.
한수호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소이?”
포털에서 나온 여자는 다름아닌 신소이였으니까.
* * *
“이제 그만 좀 해요!”
신소이는 등장과 동시에 신유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의 등장에도 자세를 풀지 않고 한수호를 노려보는 신유.
그가 푸른빛의 투구 속에서 굵은 음성으로 신소이를 나무랐다.
“왔으면 조용히 지켜보기나 해라. 아공간 능력에 매몰된 인간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아빠! 이러려고 한국에 왔어요? 장태산, 저 녀석은 내 친구라고 했잖아요!”
신소이가 신유를 향해 아빠라고 불렀다.
그제야 한수호는 신소이와 신유,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장태산이라고? 크하하하! 세상천지에 그 어떤 친구가 가짜 이름을 알려줄까? 저 녀석은 널 친구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만.”
“저에게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아요. 저를 대하는 마음이 중요할 뿐이죠. 제가 아리 드레이크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신소이라는 가짜 이름을 쓰는 것처럼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나는 해도 되고, 다른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잖아요. 혼자만의 세상에서 허우적대는 건 그만 좀 하시라고요!”
신소이는 신유를 향해 거침없이 일침을 날렸다.
그녀의 말이 충격이었을까?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던 신유가 돌연 자세를 풀었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갑주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평범한 중년 사내였다.
“소이야.”
“아빠에겐 소이라는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빠가 그랬죠. 엄마가 돌아가신 이유가 아공간 능력 때문이라고. 아공간 능력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고, 살인 충동을 느끼게 만들어 함부로 사람을 죽이게 한다고요.”
신유의 아내이자 신소이의 어머니인 안소이는 18년 전, 아공간 능력에 잠식된 신유의 동생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신유는 아공간 능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임의대로 처단해 왔고, 그로 인해 혈마라는 별명까지 얻은 것이다.
“내 말은 사실이다. 정신력이 낮은 인간에게 아공간 능력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악마의 속삭임일 뿐이니까.”
“아니요. 틀렸어요. 아빠는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속이고 계시는군요.”
“내가 날 속인다니?”
“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 아공간 능력자가 능력에 잠식되어 변질되는 게 아니라, 약물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해 절제력을 잃고 미쳐버리는 것이라는 걸요.”
신소이의 지적에 신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라셨나요? 제가 왜 아빠 곁을 떠나서 한국으로 들어왔는지, 왜 한국의 마공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 아직도 모르시나요?”
“설마…. 너, 제인을 약물에 중독시킨 조직을 쫓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냐?”
제인 드레이크.
그녀는 신유의 진짜 이름인 카뮤 드레이크의 여동생이었다.
제인은 카뮤와 비슷한 아공간 특성을 지녔고,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져 신유의 아내 안소이를 죽이고 말았다.
신유는 제인의 정신이 미쳐버린 이유가 특정 약물에 의한 중독에 있음을 알았고, 그 약물을 제조한 조직이 이프리트라는 곳임을 밝혀냈다.
당시, 미국 유명 마공 길드 소속이었던 신유는 그 길로 이프리트의 흔적을 쫓아 한국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이프리트의 행적은 너무도 비밀스러웠다.
수년간 이프리트를 찾아다녔지만, 늘 그들의 손에 농락당하기만 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분노를 풀어야 했던 신유는 이프리트를 찾지 못하자 아공간 능력자에게 화살을 돌렸다.
모든 건 아공간 능력을 제어하지 못한 각성자 탓이다.
동생 제인이 아공간 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다면, 이프리트의 약물에 중독되어 미쳐버리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신유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이프리트의 약물은 쏙 빼고, 오로지 아공간 능력자만 표적으로 삼았던 것.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킨 신유.
그는 딸 신소이를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이프리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죠? 분노를 풀어야 할 대상이 없어서 지금껏 아공간 능력자들에게 그 화를 풀었던 거잖아요!”
“내가 처단한 아공간 능력자들은 모두 악인이었다.”
“그게 변명인가요? 그럼 장태산은요? 아니, 제 친구 한수호는 무슨 죄를 졌기에 여기까지 쫓아와 이러시는 건데요?”
“그, 그건….”
신유가 할 말을 잃고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자 신소이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질끈 묶어버렸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신소이의 얼굴을 보게된 한수호.
이제야 신소이가 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혈아.
드러난 신소이의 용모는 서양인에 가까운 용모를 지닌 혼혈아의 것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신유의 눈과 닮았고, 오똑하게 솟은 코와 또렷한 오관도 동양인의 것과 확실히 달라 보였다.
“아빠가 바라시는 대로, 더는 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않겠어요. 그러니 아빠도 절 위해 더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 주세요.”
너무도 예쁜 맨얼굴을 내보이며 신유를 설득하는 신소이.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날카롭게만 보이던 신유의 얼굴에 부드러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제야 네가 이 애비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쳇. 아빠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친구를 위해서라고요.”
신소이는 토라진 듯 입을 삐죽거렸다.
신소이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 건 5년이 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혈마 신유의 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
그녀의 얼굴을 보면 바로 신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그녀가 신유의 딸이라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신유는 아공간 능력자라면 무조건 손부터 쓰고 보는 성격인 데다가 손속이 무척이나 잔인했다.
또한 한 번 목표로 삼은 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고야 마는지라 세상의 그에 대한 평가는 좋을 수가 없었다.
신소이는 그런 아버지를 창피해했고, 아내의 복수를 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어머니의 복수를 행하고자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 마공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신소이를 따라 신유까지 한국으로 들어왔다.
신소이가 제대로 된 친구들을 사귀길 바랐던 신유였기에 그녀에게 친구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던 것.
하지만 친구들 중에 아공간 능력을 지닌 한수호가 있었고 수개월 전부터 줄곧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기회를 잡아 게이트 안으로 직접 공간을 찢고 나타난 것이고.
한수호는 신유와 신소이의 나름 감격적인 화해 장면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그러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슬쩍 끼어들었다.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이제 제가 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수호의 말에 신유가 괜히 인상을 긁으며 화난 듯 한마디 했다.
“부녀만의 정다운 시간에 방해를 놔? 아까 하던 거 마저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빠! 자꾸 그러면 저 다시 머리 풀어요?”
“크흠. 그래, 뭐가 그리 궁금한지 들어나 볼까?”
신소이가 버럭 화를 내자 바로 꼬리를 내리는 신유.
한수호는 참 재미있는 부녀라고 생각하며 생각해둔 질문을 스스럼없이 던졌다.
“소이, 넌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고. 우선, 카뮤 아저씨한테 묻죠.”
“아저씨 말고, 삼촌.”
“호칭은 나중에 따지시고요. 아저씨도 아공간 능력자라고 하셨는데, 그 능력이 아까처럼 공간을 찢는 건가요?”
“네 녀석이 소이 친구라서 대답해 주마. 내 특성은 제로 영역이라고 부르지. 공간을 찢는 건 그 특성의 능력 중 하나일 뿐이다.”
제로 영역.
한수호의 전투 영역과 무척이나 비슷한 어감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제로 영역 특성으로 현실과 전혀 다른 제삼의 아공간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합니까?”
“물론이지. 너도 그런 아공간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전에 백진성을 해치울 때도 그 능력을 썼다는 걸 잘 알지.”
한수호는 흠칫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오래전, 황도13궁의 궁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혹시 사견궁의 궁주가 누군지도 알고 계십니까?”
한수호는 황도13궁의 궁주 중, 사견궁의 궁주가 누구인지만 모른다.
추측이긴 하지만, 그 사견궁의 궁주가 노희경의 기억 속에서 나온 꽃잎 열다섯 장짜리 가면의 주인일 듯했다.
“그건 나도 모른다. 사견궁이 생긴 건, 내가 황도의 일에서 손을 뗀 이후의 일이니까. 그리고, 넌 한 가지를 크게 잘못 알고 있구나.”
“제가요?”
“내가 황도13궁의 궁주였냐고 물었지?”
“네. 천칭궁의 궁주가 아저씨 맞지 않습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 네?”
뭔가 애매한 말에 한수호도 헷갈릴 때, 신유가 음흉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황도13궁을 최초로 일으켜 세운 것이 나다. 천칭궁의 궁주를 맡은 건 훨씬 후의 일이지.”
“황도를 세웠다고요?”
이건 회귀 전에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한수호가 특무부 요원으로서 처리한 황도의 잔당들이 이제 보니 빙산의 일각이었던 모양.
황도13궁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고, 복잡했다.
“사실 내가 만든 건, 황도12궁이었지. 당시의 황도는 악의 소굴이 아니라 악을 처단하는 정의의 집단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합리함을 직접 고쳐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황도였으니까.”
한수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
신유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난, 황도12궁의 힘으로 이프리트를 처단하고, 아공간 능력자들이 약물에 미쳐가는 걸 막아내고 싶었지. 하지만, 세상이 날 그냥 두지 않더구나. 10년 전, 난 믿었던 친구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친구를 함정에 빠뜨려 죽인 악질적인 놈이 되었고, 그 순간 난 황도를 버렸다.”
여기까지는 구천승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동일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보니 훨씬 현실감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프리트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였더구나. 내가 황도를 버리고 한국을 떠나길 바라고 모든 걸 꾸민 거였어. 내가 황도를 버리자마자 사견궁이 생겨났고, 황도가 변질되기 시작했으니까.”
“그런데도 사견궁의 궁주가 누군지 모른다는 겁니까?”
“모른다. 10년이나 되는 세월을 이프리트의 정체를 밝히는 데 허비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정체를 밝혀낼 수는 없었지. 하지만, 사견궁의 궁주가 나와 가까운 인물 중 하나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지.”
신유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한철형이 만들어낸 함정을 역으로 이용해 그를 고립시켜 죽이고, 친구들 사이를 갈라놓아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신유로 하여금 황도를 버리고 한국을 떠나게 만든 자.
그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