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그로부터 5시간 하고도 50분 정도가 흘렀을 때,
“여기가 네가 말한 게이트 보관 창고로구나.”
혈마 신유가 한수호의 전투 영역 내에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을 바라보며 크게 놀라워했다.
그 또한 제로 영역이라는 개인 아공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이거나 건물을 짓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신유의 제로 영역은 오직 그만의 공간이었고, 그가 휴식을 취하거나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 주로 사용할 뿐이었다.
그 외에의 용도라고 해봐야 공간을 찢어 다른 장소로 포탈처럼 이동할 수 있는 통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 능력만으로도 제로 영역은 신유에게 엄청난 능력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한수호의 아공간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다른 사람을 끌고 들어와 마음껏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전투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 연결된 통로 끝에는 엄청난 숫자의 게이트가 보관된 거대한 창고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곳을 벗어나면 웬만한 테마파크 뺨치는 크기의 수련장과 멋지고 아늑한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컨테이너 하우스도 무척이나 아담해서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매우 적합해 보였다.
“이 영역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측정해 본 적은 있느냐?”
신유는 한수호의 전투 영역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인지 알고 싶었다.
그의 제로 영역이 가지는 한계는 약 1킬로미터 정도.
그에 반해 한수호의 전투 영역은 건물이 세워진 규모만으로도 벌써 1킬로미터를 훌쩍 넘는 듯했다.
“최소 5킬로미터는 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가보질 않았거든요.”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
신유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은 얼굴로 한수호를 바라봤다.
그러다 한수호의 뒤에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는 라라와 네 마리의 몬스터 봇을 가만히 응시했다.
“세이렌을 하인처럼 부리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공지능 몬스터 봇 네 마리라…. 그리고 저 녀석은 또 뭐야? 백진성의 아들놈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신유는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는 백윤후를 노려봤다.
“아스루나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니까요.”
“저 녀석이?”
신유가 못 미더워 하자, 한수호는 귓속말하듯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게이트를 수없이 들락거렸더라고요. 자기 아버지 빽 믿고.”
“아무리 그래도 이 게이트에 들어가기엔 좀 위험해 보이는데?”
신유는 게이트가 지닌 위험성을 감으로 느끼고 있었고, 그 위험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백윤후가 지닌 마나가 이제 갓 궁급에 오른 수준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보기보단 쓸모가 많을 겁니다. 위험 감지 능력도 있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수호의 말은 사실이다.
백윤후가 지닌 진짜 마나력은 본인이 아닌, 한수호의 가슴팍에 박힌 생명코어에 담겨 있었으니까.
[신체외적능력] : 342/999
[신체내적능력] : 8/99
[마나] : 1,850(+3,230)/9999
백윤후의 능력치 정보를 보고 있자면, 한수호는 괜히 부러워졌다.
정작 백윤후의 생명코어를 성장시켜주는 일은 한수호 본인이 하고, 그 혜택은 놀고먹는 백윤후가 가져가고 있었으니까.
이젠 3천이 넘어가고 있는 생명코어의 마나력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더니….’
한수호의 이런 속마음을 아는지, 백윤후가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방긋 웃음을 그려 보였다.
“아무튼, 이제 5분 남았으니까 준비하시죠. 너희들도 준비하고.”
한수호의 말에 라라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사툴란은 안 데려가나요?”
“녀석은 게이트 넘어간 다음에 소환할 거야. 그 큰 덩치로 게이트 넘어가다가 끼이면 어쩌려고.”
“아, 그렇구나. 역시, 오빠는 다 계획이 있었네요.”
세이렌의 여왕인 라라가 오빠라고 부르는 모습에 신유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한수호를 바라봤다.
그가 본 한수호는 정말 신기하고, 독특하며,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에겐 선배라고 볼 수 있는 구천승에게 들어서 한수호가 회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볼수록 놀랍기만 하다.
신유의 시스템 도우미인 제론도 이제는 한수호가 지닌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버렸다.
그건 신유 본인도 비슷했다.
처음엔 단순히 운 좋게 아공간 능력을 손에 넣은 열아홉 살짜리 학생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놀라운 일을 맞닥뜨리고도 놀라는 일이 없고, 늘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가장 효과적인 판단을 내린다.
또한 사람을 부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언지도 매우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 부족함을 애써 자신이 채우려 하지 않고 친구나 수하로 하여금 채우게 하는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녀석이 소이를 지켜주면 걱정할 게 없겠는데 말이야….’
신유는 딸 신소이에 대한 사랑이 무척이나 깊었다.
매번 딸과 싸우고 화난 척 연락을 안 한다고 선언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신소이를 돌보며 위험이 없도록 조치해 왔다.
그래서 자격이 없는 녀석들이 딸 주변에 나타나면 겁을 줘서라도 떼어놨던 것이고.
그런 신유가 봤을 때, 한수호는 신소이와 가까이 지낼 자격이 충분했다.
아니,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다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 혼자만의 바람이었다.
‘하필이면, 저런 비리비리한 놈을 마음에 들어 하다니.’
신유의 날카로운 시선이 백윤후에게 꽂혔다.
알고 보니 딸 신소이가 마음에 두고 있는 녀석은 한수호가 아니라 백윤후였다.
악의 축이나 다름없는 아버지 아래에서,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과오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모습이 자신과 너무 닮았다나 뭐라나.
신소이는 그런 백윤후 곁에서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릴 해댔다.
그 말을 하는 신소이가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던 신유.
‘어디, 게이트 너머에서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하는지 지켜봐 주마.’
신유는 이번 일을 통해 백윤후에 대한 걸 더욱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저도 가요.”
게이트 보관 창고 입구로 서은채가 나타났다.
이미 그녀가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한수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없으면 별이가 서운해할 텐데?”
서은채는 막내 한별이와 각별한 사이였다.
10년 내내 한별이가 만나본 사람은 서은채가 거의 유일했고, 서은채 또한 한별이에게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했으니까.
그래서 이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서은채를 전투 영역에 데려와 한별이와 같이 있게 했던 것이다.
“별이한테는 이미 말 해뒀어요. 세상을 위해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걱정 말고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요.”
“별이가 그걸 듣고 그냥 내버려 뒀다고?”
“살짝 보여줬거든요.”
“뭘?”
“제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서은채가 초승달처럼 환하게 웃었다.
한수호는 그런 서은채를 말없이 바라봤다.
[신체외적능력] : 401/999
[신체내적능력] : 10/99
[마나] : 4,230/9999
[육체한계치] : 1/2
이것이 현재 서은채가 지닌 능력치였다.
서은채는 얼마 전 한수호에게 받은 ‘던전 생성기’를 사용했고, 시험을 통과했다.
그런데, 8단계가 최대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서은채는 10단계를 모두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결과, 엄청난 보상을 받았고, 더불어 한수호가 가진 꽃잎 열두 개가 그려진 가면도 얻었다.
서은채가 받은 보상은 굉장했다.
신체 능력치와 마력이 전보다 세 배나 높아졌으며, 그녀가 지닌 특성 가속과 투마 특성을 모두 최종 단계까지 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더불어 ‘무효화’라는 새로운 특성까지 손에 넣었다.
이 특성은 한수호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침묵의 협곡 10단계를 모두 통과하고 나온 보상 목록.
그 목록은 10개의 0티어 특성이었고, 그 특성 중에 ‘무효화’가 존재했다.
서은채는 그 무효화 특성의 정보를 마지막 보상으로 얻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 그 특성을 획득했다.
이로써 서은채는 서한광에 버금가는 강력한 마공사로 재탄생했다.
아직까지 그 사실은 한수호만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서은채가 이 파티에 끼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서은채는 전설적인 저격 무기, 델링그의 주인이지 않은가.
한수호는 잠시 고민했다.
과연 15살의 여중생을 위험도 10성짜리 게이트에 데려가는 게 맞을지, 아니면 이 어린 소녀가 지닌 엄청난 무력을 여기서 썩게 만들지를.
답은 쉽게 나왔다.
‘아무리 손이 아쉬워도 이렇게나 어린 녀석을 위험 속에 데려가는 건 아니야.’
한수호는 서은채의 합류를 거부하려고 했다.
옆에 있던 백윤후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까지는.
“이 꼬맹이,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뭐?”
“이 녀석이 지닌 델링그말이야. 그거 아직 최종 진화가 끝나지 않은 거거든? 대적룡 볼케스를 물리치면, 놈의 레어 안에서 델링그를 진화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백윤후는 지금 지구인이 아닌, 도플갱어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고 있었다.
“델링그도 진화가 가능하다고?”
“물론이지. 그게 어디 보통 물건이냐? 그건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백윤후는 한수호가 지닌 라그나로크의 존재도 잘 알고 있었다.
라그나로크는 대영웅 아스의 무기였고, 델링그는 또 다른 대영웅 루나의 무기였다.
한수호는 라그나로크가 진화하는 무기라는 걸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백윤후의 이 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냐?”
“물론이지. 대적룡 볼케스에 대해서는 나보다 여기 이 라라가 더 잘 알 거야.”
백윤후가 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라라가 다소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후 오빠 말대로예요. 이 게이트 안에 있는 게 대적룡 볼케스라면, 델링그를 진화시킬 방법을 분명 알고 있어요.”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그걸 볼케스가 알려줄까?”
“대적룡 볼케스는 발자크가 발호하기 전부터 아스루나에서 군림해 온 노룡이에요. 긴 세월을 살아오며 많은 것을 탐구했고, 수많은 아티팩트를 직접 만들어 내기도 했죠. 그리고….”
라라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서은채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그 팔은 한수호가 서은채에게 준 아티팩트인 암즈였다.
“그리고, 수천 년 전 타이탄이 아스루나에 남긴 유물을 더욱 발전시킨 대현자 이자투스가 바로 볼케스니까요.”
“대현자 이자투스…?”
한수호도 이 이름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신관 아캄.
대마법사 엘로이.
그리고 대현자 이자투스.
이 세 명에 대한 이야기는 아캄 본인이 직접 남긴 서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아캄이 폰노이만 박사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대현자 이자투스가 대적룡 볼케스라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대현자 이자투스는 아캄이나 엘로이보다 수백 년 이상을 앞선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늘 아스루나를 떠돌아다니며 타이탄의 유물들을 찾아 연구하고, 더욱 발전시켰다.
그래서 이자투스의 손을 거친 유물들의 값어치는 그 어떤 아티팩트보다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자투스가 아스루나에서 전설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시험을 이겨내는 자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들어준다는 것.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들어주기에 그를 만나 시험을 받겠다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루나의 역사상, 이자투스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단둘에 불과했다.
그 두 명이 바로 아스와 루나였고.
그런 이자투스가 사실 대적룡 볼케스였다고 하니 한수호로서는 크게 놀랄 수밖에.
“그래서, 볼케스한테 델링그를 진화시킬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고, 시험을 통과하면 그 방법을 얻을 수 있다 이거군. 그런데, 라라. 모든 걸 알고도 이제야 말하는 건 무슨 심보냐?”
한수호가 눈을 얇게 뜨며 따지듯 묻자 라라는 배시시 웃으며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이자투스의 시험은 굉장히 위험하거든요. 시험에 도전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대영웅 아스와 루나, 딱 그 둘만 살아남았죠. 게다가 시험은 반드시 혼자서 치러야 해서 파티를 맺더라도 힘을 합칠 수가 없죠. 그러니 차라리 이자투스의 시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하…. 뭐, 그건 그렇다 치자고.”
한수호는 라라가 자신을 생각해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걱정거리가 늘었다.
원래 계획은 아무 생각 없이 볼케스의 레어로 쳐들어가 놈을 쓰러뜨리고 보상을 얻은 뒤, 암흑섬으로 이동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볼케스가 이자투스이고 그의 시험을 통과하면 서은채가 지닌 델링그를 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때,
“저, 해볼래요.”
서은채가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너도 들었지? 죽을 수도 있다.”
“어차피 발자크를 막아내지 못하면 다 같이 죽는 거라면서요? 발자크를 물리칠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목숨도 걸 만하지 않을까요?”
서은채는 15살의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내보였다.
이건 아무리 한수호라고 해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
한수호는 서은채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좋아. 너도 함께 간다. 대신….”
“대신 볼케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괜히 나대지 말라는 거죠? 네. 그럴게요. 조용히 오빠 뒤만 따르겠습니다!”
한수호의 말을 가로챈 서은채.
입술을 내밀고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한수호는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 됐네요.”
어느새 게이트는 활성화 되어 푸른 물결을 출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