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포탈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인물은 신유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약간의 흙먼지와 본인의 것이 아닌 다른 존재의 혈흔이 잔뜩 묻어 있을 뿐,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백윤후였다.
그는 입고 있던 옷 여기저기가 찢겨 있었지만, 상처 회복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 매우 멀쩡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나타난 서은채는 다소 낭패한 모습이었다.
이제 막 전투를 끝낸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몸 여러 곳에 상처도 보였다.
단발 머리는 크게 헝클어져 있어 어찌 보면 전투에 패하고 급하게 도망친 사람 같기도 했다.
그 뒤에 나타난 라라나 월, 살이, 범이도 상태가 꽤나 안 좋았다.
라라는 세이렌의 모습으로 포털에서 튕겨져 나왔는데, 꼬리 비늘 상당부분이 뜯겨져 나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월은 몸 곳곳이 찌그러져 있었고, 주요 관절 부위에서 흰 연기까지 흘러나왔다.
그래도 살이와 범이에 비해서는 나았다.
그 둘은 완전 만신창이였다.
둘 다 팔이 반쯤 잘려져 너덜거리고 다리는 박살이 나서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
몸통 부위에도 구멍이 나 있거나 뜯겨나간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살이와 범이는 한수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두 눈에 행복한 웃음을 그리는 이모티콘을 띄워 주었다.
사툴란은 워낙 몸이 단단해서 그런지 달라진 게 거의 없어 보였다.
다만 두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다른 몬스터들의 혈흔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은 고니였다.
녀석은 사자가 아닌 사막여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포탈 밖으로 튕겨진 고니는 바닥에 엎드린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수호는 설마 하는 마음에 고니의 상태를 살펴봤고, 다행히도 고니는 파손된 부분이 많아 재생을 위한 휴식에 들어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고니의 능력치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보유 마나량: 312/8000
고니의 마나량 최대치는 원래 4천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배인 8천.
시험을 거친 것만으로 두 배의 마나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나가 312까지 떨어져 있는 걸로 봐서는 시험의 포탈 속에서 얼마나 흉험한 전투를 벌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능력치가 달라진 건 고니뿐만이 아니었다.
포탈을 빠져나온 동료들 모두가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백윤후와 서은채, 그리고 라라는 고니처럼 두 배에 가깝게 성장했고, 신유는 신체 능력치의 한계가 9999로 증가하게 되면서 평균치 1,200이라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줬다.
월은 이들 중 가장 놀라운 성장을 보여줬는데, 1500정도였던 마나력이 단번에 5천을 넘기고 있었다.
사툴란은 마나력의 성장은 적었지만 신체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범이와 살이 또한 그에 만만치 않게 성장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게 성장한 동료들의 모습을 보니 한수호는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 시험을 통과했으며, 무사히 귀환했다는 점이 한수호를 기쁘게 했다.
“놀랍군. 단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귀환할 줄이야.”
볼케스가 동료들의 귀환을 확인하고 한 말이었다.
그는 한수호와 함께 동료들을 기다리면서 노출이 적은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오히려 맨살을 가리고 나니 미모가 훨씬 돋보이고 있었다.
“한수호!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포탈 속으로 떠민 것이냐? 내가 얼마나 힘들게 그 거지 같은 마족들을 때려잡았는지 알기나 하냔 말인다!”
신유는 귀환하자마자 한수호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럴 만도 한 게, 신유는 포탈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마족 생명체를 마주했고, 그 마족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적의 강함을 느끼고 진심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자신을 강제로 포탈 속에 떠밀어 버린 한수호가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
“무사히 돌아오셨잖아요. 그럼 된 거죠. 다 예상하고 그런 겁니다.”
한수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신유는 어이가 없는지 눈을 부릅뜨다가 그제야 볼케스의 존재를 인지했다.
그는 급히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포탈에 내던져지기 직전,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초거대 몬스터들과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볼케스가 안 보이는 것이 이상했던 것.
“볼케스는…. 저랑 이야기가 잘되서,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발자크와의 전쟁에 힘을 보태주겠다며 이렇게 새로운 동료도 하나 붙여줬네요. 다들 인사해. 여긴, 케이시라고 한다.”
한수호는 어린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볼케스를 케이시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이는 볼케스의 요구 사항이었다.
한수호의 편이 되어 주는 대신, 동료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대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한수호는 볼케스의 이름에서 앞 글자를 빼고, 살짝 변형을 가해 케이시라고 이름 붙였다.
“케이시? 빨간 머리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반갑습니다. 난 백윤후라고, 여기 이 녀석 친구죠. 앞으로 잘해 봅시다. 하하하!”
볼케스, 아니 이젠 케이시라고 불러야 할 빨간머리 여인이 마음에 드는지 백윤후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백윤후? 나도 반갑다. 난 케이시고, 오래 전 볼케스 님에게 거둬진 아스루나 대륙의 마지막 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
케이시는 방긋 웃으며 백윤후의 손을 맞잡았다. 순간,
화아아아아악!
백윤후는 자신의 손으로 엄청난 기운이 밀어닥치는 걸 느꼈고, 그 기운에서 전해지는 공포스러움에 기겁하고 말았다.
곧장 손을 놓아버린 백윤후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상태.
“윤후 오라버니, 왜 그래요?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어요?”
같은 몬스터 출신이라 그런지 라라가 백윤후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 아니다. 괜찮아. 휴식을 좀 취하면 될 것 같다.”
백윤후는 여전히 웃고 있는 케이시의 눈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백윤후의 정체는 도플갱어였기에 대적룡 볼케스의 진정한 힘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이 거대한 힘에 대해 함부로 나불거렸다가는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는 것도.
“백윤후. 네 녀석은 예쁜 여자만 보면 아주 눈이 돌아가는구나. 소이가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좋아라 하겠구나.”
신유가 백윤후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쓴소리를 했다.
자신의 딸이 마음에 들어 하는 백윤후가 다른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백윤후는 신유의 말에 그저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케이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 행동에 신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 들어했다.
그때, 낭패했던 몰골을 어느 정도 수습한 서은채가 한수호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냉큼 한수호의 팔 한쪽을 끌어안으며 발랄하게 물었다.
“와, 수호 오빠. 그럼 오빠는 우리가 포탈 안에서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예쁜 언니랑 노닥거리고 있었던 거네요?”
언행 불일치.
환하게 웃으면서 가시가 잔뜩 박힌 말을 하고 있으니, 왠지 스릴러물을 보는 듯했다.
한수호는 그런 서은채를 손으로 밀어내고는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 돌리지 말고 직접적으로 해. 그리고, 넌 이 녀석아. 엄한데 힘 빼지 말고 마나나 회복해. 곧바로 암흑섬으로 향할 거니까.”
한수호는 케이시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러자 케이시가 밝은 미소를 그리며 한수호에게 말했다.
“방금 아스루나와 연결된 모든 게이트에 적용되고 있던 결계가 해제됐다. 그러니 이제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거지.”
“다들 들었지? 고니가 몸을 회복하는 대로 떠날 테니까 준비해.”
한수호는 그렇게 말하며 웅크리고 있는 고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니의 작은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상처 회복 특성을 사용했다.
지이이이이잉
은은한 빛이 고니에게 스며들더니 축 쳐져 있던 털들이 다시 복슬복슬하게 일어섰다.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는지 한껏 기지개를 켜더니 한수호의 어깨 위로 올라가 볼을 혀로 핥기까지 했다.
마나 회복과 상처 회복 특성은 이제 타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직접 사용할 때보다 마나 소모량이 두 배나 높지만, 지금의 한수호에겐 큰 의미가 없는 수준이라 아무 영향이 없었다.
“고니야. 비행선 준비 가능할까?”
캬르릉!
한수호의 물음에 힘차게 대답한 고니.
녀석은 힘차게 뛰어나가더니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고,
파치이이이이잉-
눈부신 빛을 폭사시키며 빠르게 모습을 변형시켰다.
차르르르륵. 차악. 차칵!
고니는 단 몇 초만에 거대한 비행선으로 변신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케이시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한수호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라는 인간은 알면 알수록 점점 흥미로워지는군. 대신관 아캄의 기술이 너에게 전해졌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케이시는 이제야 고니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대신관 아캄.
원래는 지구에서 폰 노이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천재 과학자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포탈 기술로 이세계와 연결되는 문을 열었고, 그곳이 바로 이곳 아스루나였다.
그러나 대마왕 발자크의 발호로 아스루나의 세계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아캄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해도.
드래고니안과 같은 엄청난 초고도 문명의 A.I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해도.
결국, 발자크의 발호를 막지 못했고 끝내 아스루나의 인류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그 모든 걸 지켜봤던 케이시에게 아캄이 만든 드래고니안은 꽤나 반가운 존재였다.
“이제야 고니의 정체를 알아봐 놓고서 나보고 칭찬해 달라는 건가? 볼케스에게 키워진 아스루나의 마지막 인간 치고는 센스가 영 엉망이야.”
한수호는 케이시가 한 말에 맞춰서 그를 돌려 깠다.
대적룡 볼케스이자, 대현자 이자투스라고 불리면서 고니의 정체를 알아채는데 너무 올래 걸린 거 아니냐는 의미였다.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지구의 기술이 아캄의 기술과 비슷한 면이 너무 많다보니 나로서도 헷갈릴 수밖에 없다고.”
케이시가 나름 자기 변명을 하며 월과 범이, 살이를 바라봤다.
“저 녀석들만 해도 그래. 아캄이 만들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흡사하거든. 그래서 아까 그 작은 여우 녀석도 지구에서 아캄의 기술을 따라 만든 거라 생각했던 거다.”
“그 정도로 비슷하다고?”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똑같다.”
케이시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한수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니를 만든 건 아캄이지만 그 기술력은 아스루나의 것이었고, 월과 살이, 범이를 만든 건 현대의 사기환이었으니까.
‘아캄이 가진 특성하고 기환이 형의 특성이 아무리 유사하다고 해도 사용하는 사람이 다르고, 존재하는 세계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기술력을 보일 수가 있지?’
이건 한수호로서도 의문이었다.
한수호가 생각해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이 있긴 했다.
각성자들의 특성을 비롯해, 모든 마법적인 현상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존재하며 그 시스템이 아스루나와 지구를 똑같이 관리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고니를 만든 기술과 월을 만들어낸 기술이 흡사할 수 있었다.
‘게이트가 생기면서 지구에까지 그 시스템의 관리 영역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건가?’
점점 시스템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어떤 알 수 없는 존재가 만들어낸 마법적인 A.I 장치인 걸까?
하지만 어떻게 인간에게 특성을 부여하고, 말도 안 되는 마법적 능력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걸까?
케이시가 던진 한마디 말로 인해 한수호의 머리는 금방 복잡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일단은 암흑섬을 찾아가는 일에 집중하자.’
한수호는 당장 코앞에 닥친 현실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발자크가 봉인된 암흑섬으로 가려면.”
한수호가 화제를 돌리자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한쪽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 방향으로 대충 1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너무 먼데?”
한수호는 발자크가 봉인을 깨고 나오기 전에 암흑섬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싶었다.
하지만 1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면, 비행선의 최고 속력으로 날아간다고 해도 12시간은 걸린다.
그런 한수호의 걱정을 알아봤는지, 케이시가 씨익 웃음을 그렸다.
“넌 내가 누구의 손에서 성장했는지 그새 까먹은 모양이구나?”
“뭐? 아…. 그렇군.”
케이시가 볼케스에게 거둬진 마지막 인간으로 알려진 이상, 볼케스가 지닌 엄청난 마법적 능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모두 준비해. 지금 바로 공간이동용 포탈을 만들어 줄 테니까.”
케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붕 뛰어올랐다.
약 10여 미터 높이로 날아오른 그녀는 허공의 한 지점을 손으로 찔러 넣더니 그 상태로 세로 줄을 긋듯이 쭈욱 떨어져 내렸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케이시.
그녀는 곧바로 비행선 위로 올라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은채가 그녀를 따라 비행선에 올라타며 한수호에게 물었다.
“저 언니, 지금 뭐 한 거예요?”
“직접 눈으로 봐. 뭘 했는지 금방 알게 될 거다.”
한수호가 웃으며 대답하자 서은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행선 난간에 딱 붙어 섰다.
그리고 방금 케이시가 손으로 세로줄을 그어버린 허공을 바라봤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비행선에 올라탔을 때였다.
우웅
허공에서 기이한 울림이 흘러나오더니,
촤아아아아앙
눈부신 빛과 함께 허공이 쫙 갈라지며 거대한 크기의 포탈이 나타났다.
그 크기는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포탈이나 게이트보다 커다란 것이었다.
그걸 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신유는 훨씬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 또한 공간을 찢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가능한 포탈을 만들어 내는 ‘공간 연결’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공간 연결 특성은 2미터 크기가 최대였고, 통과가 가능한 인원도 본인을 포함해 딱 두 명뿐이었다.
그런데도 특성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마나력이 엄청났으며, 쿨타임도 이틀이나 되서 사용이 용이하지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동할 장소의 좌표를 미리 파악해 놓지 않으면 공간을 연결하는 포탈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
그런 면에서 볼 때, 케이시라는 여자가 만들어 낸 대형 포탈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