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슈아아아아아악-
대형 포탈을 통해 도착한 곳은 한수호나 백윤후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섬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하고,
중앙에 수 킬로미터 크기의 대평원이 존재하며,
그 외의 장소는 모두 정글로 이루어진 끈적이는 기운으로 가득한 섬.
바로 암흑섬이었다.
“여길 또 오게 되네.”
백윤후가 암흑섬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 한수호가 한마디 곁들였다.
“오늘은 저번처럼 좀비 떼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얼씨구? 이거 웃기는 놈이네? 단 한 방에 그 많은 좀비 떼를 몰살시켰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백윤후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한수호를 바라봤다.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아서 그런다. 그 기술 쓰려면 마나 소모가 장난이 아니라서 말이지.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아, 그래서 그때도 단 몇 초만에 뚝딱 해치워 버리고도 전혀 지치지 않으셨구나. 그걸 몰랐네, 젠장.”
백윤후가 툴툴거리자 한수호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한수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백윤후가 가장 잘 안다.
한수호의 가슴팍에 박혀 있는 백윤후의 생명 코어.
그 코어가 지닌 마나력이 지금은 3,500에 달하고 있었으니까.
백윤후 본인이 지닌 마나만 해도 이미 2천에 가깝다.
생명코어에 담긴 마나까지 합치면 5천이 넘기 때문에, 백윤후 역시 멸급에 이른 마공사나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한수호 덕분에 가장 빠른 성장을 한 사람이 바로 백윤후였다.
한수호가 강해질수록 백윤후의 생명코어 역시 함께 강해지기 때문.
그래서 백윤후는 지금의 한수호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발자크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구는 아마 저곳에 있을 거다.”
케이시는 볼케스로서의 자신이 아스에게 준 봉인구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단번에 찾아냈다.
그곳은 이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화산 지대였다.
암흑섬은 총 다섯 개나 되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그중 네 개는 휴화산이었고, 단 한 개만 여전히 활화산인 상태였다.
그 활화산의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발자크의 봉인구가 잠들어 있었다.
한수호는 케이시가 가리킨 방향으로 비행선을 움직이게 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화산 지대를 응시하던 한수호는 마나 파장을 이용해 주변을 살핀 뒤, 신유에게 말했다.
“근처에 엄청난 놈들이 가득하네요. 아저씨가 좀 막아주셔야 겠습니다.”
“나보고 잡몹이나 때려잡고 있으라고?”
“보통 잡몹이 아니니까요. 한 놈 한 놈이 보스급 이상입니다.”
한수호는 화산 지대 근처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몬스터들이 궁급 마공사에 준하고 있다는 걸 이미 확인한 뒤였다.
발자크가 이 섬에 봉인된 이후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발자크가 가진 마족의 기운은 수많은 몬스터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곳에 모여든 몬스터들은 발자크의 기운에 자극을 받아 빠르게 강력해질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궁급 마공사들이 잔뜩 몰려와도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해진 상태였다.
지난번에 왔을 땐, 화산 지대보다 아래에 위치한 대평원까지만 진입했던 거라 암흑섬의 진짜 무서움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것.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발자크의 봉인이 풀리기 전이라도, 봉인구를 지키는 가디언들이 잔뜩일 텐데, 혼자서 되겠느냐?”
“그래서 퇴로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아저씨가 지켜준 퇴로만이 살길이니까요.”
한수호의 말에는 신유를 향한 믿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신유는 말로만 듣던 발자크가 대체 어떤 놈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건 여기, 백가 녀석하고 네 졸따구들만으로도 충분할 거다.”
“아니요. 이들은 모두 저하고 함께 봉인구를 찾으러 갈 겁니다.”
“뭐? 날 빼고 저놈들만 데려간다고?”
한수호는 신유가 생각한 바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찌 됐건, 한수호를 제외한다면 이 일행 중 가장 강한 인물이 신유다.
그런데 신유에게 퇴로를 맡기고 그보다 약한 자들을 위험 속으로 끌고 들어가겠다니.
신유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아저씨에겐 광마의 창이 있잖아요. 그걸 지닌 사람은 모든 종류의 봉인을 파괴할 수 있지만, 반대로 해제할 수도 있다는 거….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한수호는 아스루나의 7대 마화기 중, 광마의 창을 신유가 지니고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역시나 시스템이 알려준 정보 덕분이었다.
얼마 전, 오늘 신유를 다시 마주했을 때, 한층 업그레이드된 시스템은 한수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여줬었다.
>>용마검이 또 다른 마화기를 발견했습니다.
>>발견된 마화기에게 부여된 이름은 ‘광마의 창’입니다.
>>광마의 창은 격이 더욱 높아진 용마검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정보 시스템의 진화로 더욱 자세한 정보 열람이 가능해졌습니다.
>>광마의 창에 대한 세부 정보를 보려면 마나력 5,000이 소모됩니다. 정보를 보시겠습니까? YES/NO
이젠 명확하게 시스템이 진화되었다는 표현까지 나왔기 때문에 한수호는 시스템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했던 것이다.
아무튼, 한수호는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YES를 선택했고 광마의 창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살펴볼 수 있었다.
[광마의 창]
-코스트: 102
-발자크가 아스루나에 뿌린 7대 마화기 중 하나입니다.
-광마의 창은 모든 것을 꿰뚫어 파괴하는 관통의 힘을 지녔지만, 잘못 사용될 경우 봉인된 모든 존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해금의 힘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주의: 봉인된 존재보다 정신력이 낮을 경우, 몸을 지배당해 광마의 창을 의지와 무관하게 사용하게 될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한수호가 본 광마의 창에 대한 정보였다.
그리고 설명에도 나와 있듯, 광마의 창이 지닌 힘은 봉인을 파괴할 수도, 오히려 봉인을 풀어버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수호가 신유를 이곳에 함께 데리고 온 이유는 하나였다.
만약 한수호가 발자크가 봉인을 풀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할 경우, 신유가 최후의 저지선이 되어 발자크를 꿰뚫어 소멸시키길 바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유는 봉인구가 숨겨진 화산지대 깊숙한 곳까지 함께 갈 수 없었다.
“네 녀석은 이제 내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가 보구나. 내가 광마의 창을 가지고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거늘….”
“시스템이 알려줬습니다. 아저씨의 아공간 능력에 딸려 있는 A.I하고는 좀 다르지만요.”
“그럼 이것도 알겠구나. 광마의 창은 소유자의 정신력이 높을 경우,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신유는 자신의 정신력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높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발자크에게 정신을 지배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수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저씨 생각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뭣이?”
“만약, 라라의 정신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버텨내신다면, 함께 발자크의 봉인구가 있는 곳까지 가는 걸로 하겠습니다.”
“하! 네 녀석이 지금, 세이렌의 정신 공격 따위로 날 시험해 보겠다 이거냐?”
“아저씨의 정신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한수호는 진지했다.
신유의 힘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일 뿐.
발자크의 봉인구가 있는 곳에 신유를 데려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만약 신유가 세이렌의 여왕인 라라의 노래소리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믿고 함께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라라의 노래에도 휘둘릴 정도라면 절대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었다.
“좋다. 지금 당장 시험해 보려므나.”
신유는 얼마든지 해보라며 라라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라라가 한수호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신유의 정신을 흩트려야 할지, 아니면 대충 하는 척만으로 끝낼지를 묻는 것이다.
[라라. 만약 아저씨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하면, 너도 여기에 남겨 놓고 갈 거다.]
한수호는 라라와의 정신감응 능력을 이용해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라라의 눈에 투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라라가 약속합니다. 자신이 이번에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라라는 전보다 크게 상승한 매혹 능력을 이용해 신유의 정신을 최대한 흔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읽어낸 한수호는 모두에게 주의를 줬다.
“혹시 모르니 정신들 바짝 차려. 라라의 노래에 혹하는 녀석이 있으면 파티에서 뺄 테니까.”
한수호의 한마디에 서은채와 백윤후를 비롯해 몬스터 봇들까지도 모두 후다닥 물러섰다.
한수호는 신유를 제외한 모두의 귓가에 마나를 사용한 차단막을 쳐 놓고는 일부러 경고를 날렸다.
라라의 노래가 그만큼이나 강력하다는 걸 신유에게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신유는 가볍게 생각했다가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때, 라라의 노래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오페라 가수의 노래를 듣는 듯한 우아한 목소리.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한수호와 케이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눈에서 총기가 훅 사라졌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한수호가 마나 장막으로 소리에 담긴 마나력을 대부분 차단해 줬기에 이 정도였지, 그게 아니었다면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풀썩 주저앉았을 상황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신유였다.
그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정신을 집중해 라라의 노랫소리에 전력으로 대항하고 있었음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는 너무도 놀라고 말았다.
그의 정신력 수치는 이젠 거의 20에 가까울 정도로 상승한 상태다.
그런데, 라라의 노래는 그 수치를 우습게 뒤흔들고 있었다.
지금 신유는 점점 하늘을 나는 것처럼 들뜬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너무 기분이 좋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절대 그럴 순 없지!’
신유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고양되어 가는 기분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바로 그 순간,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라라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처량하게 변했다.
한순간의 감정변화.
미처 이에 대한 대처를 하지 못했던 신유는 뒤집힌 노래 분위기에 그대로 휘말렸다.
아내를 잃어야 했던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고, 신유는 급속도로 분노했다가 금방 슬픔에 잠겼다.
얼굴 전체로 핏줄이 돋아난 신유.
주르륵.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한수호는 라라에게 손을 들어 그만하라고 지시했다.
노래를 멈춘 라라.
그녀는 신유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모두 신유가 감정을 추스르기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후우….”
신유는 불끈 쥐고 있는 자신의 손 등에 떨어진 눈물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자신만만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만약 상대가 악의를 품고 신유를 해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방금 전 그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당해버렸을 터.
신유는 자신의 정신력이 결코 대단한 게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난 바깥쪽에 남아 있겠다. 내가 같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 좋은 결정인 것 같구다.”
“안 좋은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수호는 신유의 가장 슬픈 기억을 건드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라라가 신유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게끔 유도한 것이 한수호였으니까.
“아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을 수 있었으니 고마워해야지. 고맙구나, 라라. 널 세이렌 따위라고 무시한 날 용서해 다오.”
신유는 반대로 라라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는 지금껏 아내를 잃었던 과거를 어떡하든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젠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무리 슬픈 과거라도 억지로 묻어버리는 것보다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뿐인 딸 신소이를 위해서도 좋은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용서라니요. 제가 세이렌인 것도 사실이고, 제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무리하게 아픈 과거를 끄집어 낸 것도 제 잘못인데요. 죄송해요.”
라라도 얼른 신유에게 사과했다. 그때, 한수호가 라라에게 한마디 했다.
“그럼 사과의 의미로, 라라 너도 밖에 남아서 아저씨 말동무라도 해 주는 게 맞지 않으려나?”
“네? 마, 말동무요? 히잉….”
라라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어버렸다.
“농담이다. 내 지시를 아주 잘 따라 주었으니 함께 갈 자격은 충분하다. 고생했다, 라라.”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다소 가볍게 풀어낸 한수호.
그는 고개를 돌려 코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활화산을 바라봤다.
해발 2천미터 정도의 높은 활화산.
마그마가 분출되지는 않고 있지만, 언제 화산이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는 활발히 활동 중인 화산이었다.
그 안에 발자크의 봉인구가 숨겨져 있었다.
“다 왔네요. 이제 내려갑니다.”
한수호가 말하자 비행선이 빠르게 하강했다.
봉인구가 화산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이 화산의 입구는 중간지점에 존재했고, 그 주변엔 1급 몬스터를 거뜬히 뛰어넘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커다란 비행선이 하늘에서부터 날아들자, 아래에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20미터 이상의 초대형 몬스터부터 5미터 정도의 그나마 작은 몬스터들까지.
대략 200여 마리의 몬스터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신기한 장면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한수호와 일행들은 모두 전투를 위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여기선 대적룡 볼케스를 만났을 때처럼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을 침입하려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이려는 악의로 가득 찬 몬스터들뿐이었으니, 이쪽에서도 그에 맞춰주면 되는 것.
한수호는 몬스터들이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지하세계로 향하는 검은 입구를 뚫어져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