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일단, 접근하지 말고 모두 물러서. 봉인구가 하나가 아닌 것 같다!”
한수호는 동료들에게 경고한 뒤, 자신도 뒷걸음질 쳤다.
한수호의 감각으로 전해지는 봉인구의 힘은 절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았는 데도 이 정도라면, 봉인이 풀린 상태에서는 얼마나 더 강력한 힘을 뿜어낼까?
한수호에겐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봉인구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이 한수호 앞쪽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선명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형태는 한수호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만나본 적이 있는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발자크의 파편.
대마왕 발자크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진 형상이 한수호의 앞에 서서 싸늘한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수호의 눈앞에, 그리고 서은채의 눈앞에도 동일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후의 가디언 ‘스톰버’가 등장하였습니다.
>>스톰버를 쓰러뜨려 ‘바람의 핵’을 얻으세요.
>>눈앞에 보이는 석상에 핵을 삽입하면, 봉인구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습니다.
>>틈새 간격: 98.6%
메시지를 본 한수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그때, 서은채가 물었다.
“이거…. 나한테만 보이는 거 아니죠?”
서은채는 방금의 메시지가 두 사람 모두에게 등장한 것임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치이이이익
-이거 뭐야? 앞에 이상하게 생긴 놈이 나타나더니 이름이 프리즈너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얼음의 핵을 얻어서 봉인구를 파괴하라건 또 뭔 소리야?
-내 앞에 나타난 건, 블레이져다.
-저희 앞에 있는 건 썬더불스라는데요? 벼락의 핵 어쩌고 하는데, 이거 싸워도 되는 거예요?
네 곳의 봉인구가 있는 곳에서 서로 다른 가디언들이 나타났다.
이제 보니 방금 본 메시지는 봉인구를 마주한 모두의 눈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네 개의 봉인구에서 나타난 네 마리 가디언.
그리고 그 네 가디언이 지닌 네 종류 속성의 핵.
그것들을 모두 얻어서 손 모양의 동상에 박아 넣으면 봉인구를 파괴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왜 이 가디언이라는 놈들의 모습이 발자크의 파편과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최후의 가디언이라면서 지니고 있는 마나력은 신전에서 본 발록보다도 약한 것일까?
[가디언 스톰버]
-발자크를 지키는 바람 속성의 가디언입니다.
-마나: 28,000
마나력 2만8천.
물론 그 수치만 봤을 땐, 멸급 마공사라도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존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이곳에 온 동료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한수호는 이상한 느낌에 점점 다가서는 스톰버를 향해 심리분석 특성을 사용했다.
그러나 스톰버의 정보에는 아무런 조작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흔들림이 없다는 건 정보가 모두 정상적이며, 사실 그대로라는 의미.
그럼에도 한수호는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었다.
네 곳으로 나눠진 봉인구와 네 개의 속성의 핵.
이 핵을 이용하면 봉인구를 파괴해서 발자크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럼 왜 애초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걸까?
‘아스는 차마 자신의 손으로 발자크를 소멸시킬 수는 없었던 건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발자크를 소멸시키려고 이렇게나 복잡한 준비를 한 거고?’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까지 발자크를 봉인구에 가둬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찜찜함 속에서 어떡하든 정확한 판단을 하려고 뒤로 계속 물러나던 한수호.
그러다 결국 동굴 입구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데, 동굴 입구의 빈 허공에서 뭔가가 등에 닿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투명한 막에 막혀버린 듯 딱딱한 벽이 몸을 가로막은 것이다.
‘결계?’
안 좋은 예감이 스친 그 순간,
>>스톰버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습니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세요.
>>틈새 간격: 98.7%
외통수에 걸렸다.
시스템은 이곳에 온 사람으로 하여금 강제로 가디언을 쓰러뜨리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틈새 간격이 벌어지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줌으로써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틈새가 또 벌어졌어요. 얼른 저 가디언을 없애고 바람의 핵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은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건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들의 음성엔 다급함이 가득했다.
‘일단은 메시지를 믿고 가디언을 해치워야 하나?’
심리분석 특성에도 이상한 점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적어도 함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만치 않은 적이니까 방심하지 말고,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한수호는 무전기를 통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말이 전해지자마자 동료들은 가디언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그건 한수호 쪽도 마찬가지.
하지만 한수호는 서은채로 하여금 가디언 스톰버를 상대하게 했고, 그 자신은 옆으로 돌아 손 모양의 동상 쪽으로 다가섰다.
서은채와 스톰버의 전투는 위험한 듯 보이면서도, 생각보다는 위험하지 않았다.
스톰버는 바람 속성의 가디언이라 당연히 바람의 힘을 사용했는데, 서은채는 ‘가속’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바람의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한수호가 지닌 소닉붐 특성과 유사한 면이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마나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은채는 스톰버의 공격을 모두 피해낼 수 있었다.
‘아직은 괜찮겠어.’
한수호는 일단 안심한 상태로 손 모양 동상에 바짝 붙어섰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새하얀 빛의 구체를 비롯해 동상까지도 자세히 살폈다.
일단 동상의 손바닥 정중앙에는 동그란 홈이 하나 있었는데, 모양이나 위치로 보아하니 스톰버를 쓰러뜨리고 얻게 될 바람의 핵을 넣는 구멍으로 생각됐다.
손 동상에는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이번엔 흰색 구체를 살폈다.
딱 축구공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정보를 스캔해 봐도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보 검색 실패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냐!’
한수호는 이 구체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력을 소모하면서까지 정보 검색에 열을 올렸지만, 끝내 추가 정보를 알아내는 건 실패였다.
한수호가 그러고 있을 때, 케이시 쪽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블레이져는 잡았다. 붉은색 보석 같은 게 나왔는데, 무슨 열매라는군.
“열매? 정확히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고?”
-내가 볼 수 있는 정보에는 그 이상의 내용이 없다.
케이시와의 무전으로 대화를 하는 도중, 백윤후의 연락도 이어졌다.
-프리즈너 처치 완료. 푸른 보석이 나왔다. 이게 물의 핵인가?
차례 차례 가디언들이 쓰러졌다.
확실히 한수호의 동료들 수준은 엄청났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이제 5분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벌써 가디언 두 마리를 잡다니.
세 번째는 서은채였다.
한수호가 힘을 보태주지도 않았건만, 서은채 혼자 마나력 2만8천짜리 가디언을 잡아버렸다.
물론, 그게 가능했던 건 서은채의 오른팔에 장착된 암즈와 그녀의 무기인 델링그 덕분이었다.
서은채는 가속으로 스톰버의 모든 공격을 피해내며 놈의 패턴을 분석했고, 반복되는 패턴이 나오자 그에 맞춰 델링그로 머리를 날려버린 것.
푸스슥 소리를 내며 부서진 스톰버.
놈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그 자리엔 새하얀 빛을 내는 보석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한수호는 재빨리 다가가 보석을 주워들었다.
[세계수의 열매(바람)]
-코스트: 150
-모든 생명체를 사랑과 축복으로 보듬어 주는 세계수의 본질입니다.
-열매를 먹고 바람의 화신이 되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를 소멸시킬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세계수의 열매가 지닌 힘이 하나로 합쳐질 때, 신마저 거역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한수호는 바람의 핵이 지닌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열매? 그럼 이것도 세계수의 조각 중 하나라는 거잖아?’
한수호의 손에 있는 보석이 바람 속성을 지닌 열매라면, 케이시 쪽에 있는 건 불의 속성을 지닌 열매이고, 백윤후 쪽에는 물의 열매, 마지막 라라 쪽에서 나올 열매는 벼락의 열매인 셈이다.
세계수의 열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합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네 개의 속성으로 나뉜 열매들.
한수호는 이제야 아스가 말한 ‘세계수의 조각은 네 개이면서 일곱 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수호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수의 조각은 세 개.
이제 한 개의 조각이 추가되었지만, 다른 장소에 세 개의 조각이 더 존재하고 있으니 총개수는 일곱 개가 맞다.
‘이 열매를 내가 먹으면 더 강한 힘을 얻게 되는 건가?’
하나만으로도 큰 힘을 얻을 수 있는데, 만약 네 개 속성을 다 먹는다면?
어쩌면 정보창에 나온 것처럼 신마저 거역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네 개의 핵을 사용하면 봉인구 자체를 파괴해 발자크를 영원히 소멸시키는 게 가능했다.
‘내 힘이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발자크를 소멸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그걸 택하는 게 맞겠지.’
한수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때, 라라 쪽에서 마지막 벼락의 핵을 획득했다는 연락이 왔다.
아무런 희생도 없이 모든 핵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한수호는 하늘이 자신들을 돕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모두에게 연락을 취했다.
“손 동상 중심부에 구멍이 있어. 거기에 핵을 끼워.”
-오케이.
-알았다.
-그냥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죠?
모두 군말 없이 한수호의 말에 따라줬다.
동료들이 핵을 끼워 넣는 타이밍에 맞춰 한수호도 손 동상 중심에 하얀 보석을 끼웠다.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릉
손 모양의 동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바닥 중앙에 두둥실 떠 있는 구체를 움켜쥐듯 손을 오므린 동상.
처음엔 구체가 동상의 손아귀 힘을 거부하는 듯했으나, 그건 잠시뿐이었다.
콰지직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구체가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구체는 순식간에 우그러졌고, 손바닥 틈으로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때, 서늘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닥치더니 가루를 허공으로 흩뿌렸다.
이런 현상은 다른 네 곳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흩어진 가루들이 허공에서 완전히 흩어졌을 때, 어둡기만 하던 공간에 갑자기 환한 빛이 비춰졌다.
한수호는 그제야 주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이곳은 정사각형으로 된 커다란 방이었다.
말이 방이지 대공동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컸다.
한쪽 면만 해도 100미터가 넘는 데다가, 높이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높다.
마치 내부가 텅 빈 사각형의 거대한 기둥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그 거대한 공간에 동료 모두가 함께 있었다.
네 개의 귀퉁이에 네 개의 땅이 반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귀퉁이에서 케이시 팀과 백윤후 팀, 그리고 라라 팀 모두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방금 전까지, 이 공간 안에는 한수호의 초감각마저 먹통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결계가 처져 있었던 것.
그래서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으면서도 동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고.
“오빠! 저거…. 좀 이상하지 않나요?”
서은채가 중앙 쪽을 유심히 살피며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가운데로 몰렸다.
그곳에선 방금 구체가 부서지며 흘러나온 가루들이 뭉쳐지고 있었다.
가루는 무섭게 회오리치며 뭔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두터운 갑주를 걸치고, 코끼리만큼이나 커다란 말을 탄 기사의 형상.
그 형상이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을 때, 왼편 구석에 있던 케이시가 경악성을 터트렸다.
“모두 물러서! 저놈은…. 저 빌어먹을 놈은 발자크다!”
그 말에 가장 놀란 건 한수호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한수호.
그는 눈을 똑바로 뜨고 공간 중앙에서 완전하게 형상을 갖춘 존재의 정보를 훑었다.
[대마왕 발자크]
-아스루나를 멸망으로 이끌고, 세계수를 불태워 없앤 최강의 존재입니다.
-이로써 발자크의 일곱 파편이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일곱 파편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봉인 또한 해금됩니다.
-세상은 이제 발자크의 손 아래에 다시 철저히 무너질 것입니다.
[신체외적능력] : 30,000/99,999
[신체내적능력] : 1,000/9,999
[마나] : 500,000/999,999
주르륵 떠오르는 발자크의 정보.
이를 본 한수호는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큰 실수를 해 왔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발자크의 일곱 파편…. 그걸 해방한 게 바로 나였어!’
지금까지 한수호가 해치운 발자크의 파편들.
그건 한수호가 해치운 것이 아니라, 파편들이 본체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해방을 도와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