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2052년 1월 19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간에 악몽급 게이트가 세 개나 세상에 등장했다.
악몽급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강력한 몬스터들을 토해내는 헬급 게이트도 7개나 나타났다.
그리고 시작된 끔찍한 몬스터 웨이브.
헬급 게이트 안에서는 특급 마공사에 버금가는 몬스터들이 수백, 수천이나 쏟아져 나왔고, 악몽급 게이트에서는 진급 마공사도 혼자서는 상대가 힘든 고위 몬스터들이 개미 떼처럼 밀려 나왔다.
악몽급 게이트가 나타난 국가는 세 곳.
대한민국의 서울과 프랑스 파리, 그리고 미국의 워싱턴이었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경우, 어떻게 알았는지 사전에 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시민의 희생은 크지 않았다.
광화문에 열린 악몽급 게이트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최정예 마공 요원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엔, 이 악몽급 게이트에 대한 대처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게이트 주변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마공사들이 투입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시민들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미 정부에 의해 컨트롤 되고 있던 일반 게이트들에서도 몬스터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저급 게이트에서는 저급 몬스터가, 상위급 게이트에서는 상위급 몬스터가 뛰쳐나와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부대와 대규모 전투가 시작된 것.
이로 인해 세계가 절망에 빠졌다.
그동안 게이트를 단순히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라 생각하고, 거길 통해 넘어가 이세계의 자원을 채취한다거나 몬스터를 잡아 연구하여 인간의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생각만 했지 이렇게 한날한시에 웨이브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 안일했던 생각이 참사를 불러냈다.
그래도 가장 피해가 적은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게이트 소멸자’라는 존재가 등장해 나라 곳곳에 존재하는 게이트 상당수들을 소멸시켰기에 남아있는 게이트가 많지가 않았다.
고위급 게이트는 거의 없었고, 있어봐야 대부분 8급, 9급 게이트여서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추가로 등장한 건, 악몽급 게이트 한 개와 헬급 게이트 두 개였다.
때문에 이 세 개의 게이트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시민들의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수호와 일행이 귀환했을 때, 마주한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부산과 제주도에 발생한 헬급 게이트 상황은요?”
한수호는 임시로 차려진 막사 안에서 사람들과 연락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네가 미리 언질을 해 준 덕분에 대비가 가능했다. 군과 마공사들의 희생은 좀 있지만, 어떡하든 두 곳 모두 방어는 가능할 것 같구나.”
서한광의 대답에 한수호는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서령그룹이 적극적으로 돕고 있어서 최악의 상황만은 피했다.”
서한광은 막사 저 멀리 보이는 광화문 광장을 응시했다.
지금 그곳에서는 너무도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연대급 군 부대가 사방을 철저히 봉쇄한 상태에서 대한맹의 정예 마공요원들과 서령그룹이 개인적으로 키운 특수 마공사들이 몬슽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워싱턴과 파리도 머지않아 웨이브가 수습될 거예요. 그래도 혹 모르니 그쪽과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상황을 파악해 주시고요.”
한수호는 악몽급 게이트가 발발한 미국과 프랑스 두 곳에 지원 병력을 보냈다.
그 지원 병력은 다름 아닌 발록과 가이도.
암흑섬에서 두 가디언을 함께 데리고 나온 한수호는 그들에게 지구의 인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그 두 가디언은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되자마자 발록은 미국 워싱턴으로 보냈고, 가이도는 프랑스 파리로 보내놨던 것.
그들이 단숨에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건 바로 케이시였다.
“암흑섬에 갔던 일은 잘된 거냐?”
서한광이 근심 섞인 얼굴로 묻자 한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큰 실수를 하는 바람에 발자크가 완전하게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놈을 쓰러뜨릴 겁니다. 그러니 맹주께서는 이곳을 방어해 내는 일에만 집중해 주세요!”
“흐음. 알았다. 은채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난 네게 감사해하고 있다. 그러니 너도 너무 상심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한수호는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주는 서한광이 너무도 고마웠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되었죠?”
“뇌왕이 이끄는 팀은 황도13궁의 흔적을 쫓아 이동 중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고 하는 구나. 황도의 잔당들이 일제히 향하고 있는 곳이 특무부 본부라는데?”
“특무부 본부요? 지금 그곳의 상황은 어떤데요?”
“그것도 의문이다. 특무부 모두가 마치 한순간에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조용하다. 특무부 내의 그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되고 있어.”
서한광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황도13궁의 잔당들이 특무부 본부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데, 정작 특무부는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연락이 안 된다니.
“특무부 주변에 재밍이 걸린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니야. 이미 그 근처까지 가 있는 뇌왕과는 연락이 잘되고 있으니까.”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한수호는 바로 공법폰을 꺼내 구천승에게 연락을 취했다.
벨이 두 번 정도 울렸을 때, 구천승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마침 전화 잘했다.
구천승도 한수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특무부 본부에 도착하셨습니까?”
-아직이다. 차를 타고 이동 중인데, 한 10분쯤 후면 도착할 거 같다. 광화문 쪽은 어떠냐?
“여긴 서 맹주님께서 잘 수습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특무부 내부와 아무 연락이 안 된다는 건 사실인가요?”
-그래. 김재우 요원이 이미 수차례나 연락을 취해 봤지만, 아무하고도 연락이 닿질 않는다는구나.
“설마, 이프리트가 먼저 선수를 친 거 아닐까요? 가장 방해가 될 만한 특무부를 쳐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한수호는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무부 국내본부장인 유대룡과 그가 직접 키운 특수1과 요원들은 이프리트의 위치만 특정되면 단숨에 타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특무부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티팩트들과 기술력, 그리고 강력한 무기들이 있는 한은 아무리 이프리트라 해도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 특무부가 첫 번째 타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김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특무부가 벌써 당했을 리는 없다. 분명 다른 문제가 있는 거야. 곧 본부에 도착하니까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너에게 알려주겠다.
김재우는 특무부에 많은 동료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수호도 그러길 바랐지만, 현실은 다를 수 있었기에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일단,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하죠.”
그렇게 통화를 끊은 한수호는 바로 이산에게 연락을 취했다.
-발자크는 처치했느냐?
이산은 한수호의 전화를 받자마자 발자크가 어떻게 됐는지부터 확인했다.
“실패했어요. 놈은 이미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끄응. 내 그럴 줄 알았다. 그 괴물이 그리 쉽게 당할 놈이 아니지. 이제 어쩔 것이냐? 발자크의 발호가 예정보다 무려 6년이나 빨라졌어. 악몽급 게이트도 벌써 열려버렸고.
“게이트는 너무 걱정 마세요. 곧 수습될 테니까요. 그보다, 김유란 씨는요? 그녀를 구출하는 건 성공했습니까?”
이산과 김명중, 나스타샤와 박철민이라는 회귀자들로만 이루어진 이들 팀의 목표는 같은 회귀자인 김유란의 구출이었다.
-아직이다. 하지만 김유란의 위치가 어딘지는 특정해 냈다.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고.
“그게 어딥니까?”
-특무부 본사.
“…. 네?”
한수호도 놀라고 말았다.
또다시 특무부 본사다.
황도13궁의 무리들이 향한 곳도 특무부였고, 김유란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는 장소도 특무부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교롭다.
-아무래도 이프리트에서 김유란을 데리고 특무부 쪽으로 이동 중인 것 같구나. 거기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야.
“특무부에서 무슨 일을요?”
-그야 나도 모르지. 그곳에 있는 수많은 아티팩트라던가 마나코어 같은 걸 노리고 있을 걸 수도 있고.
“…!”
이산의 중얼거림에 한수호는 한 가지 확연히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 한수호는 사기환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었다.
사기환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된 연구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그 프로젝트의 목표는 바로 인류의 힘으로 게이트를 직접 여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수십 년 전, 폰노이만 박사가 포탈 연구를 했던 것처럼 특무부에서도 똑같은 연구를 해왔다는 것.
놀랍게도 그 프로젝트는 이미 성과를 보였고, 초정밀 대형 아크로까지 제작하여 지구상의 다른 지역으로는 어디든지 포탈을 열어 이동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게 사기환의 설명이었다.
특무부는 포탈의 성공 사실을 아직 공표하지 않았지만, 이미 임무에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개발이 끝나 있었다.
한수호는 이프리트가 바로 그 포탈 기술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황도의 잔당들도, 이프리트도 모두 특무부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일단 알겠습니다. 저도 금방 특무부로 가겠습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 같다. 지금 방금 엄청난 일이 터진 것 같구나. 티비부터 틀어 보거라.
이산의 말에 한수호는 막사에 준비된 대형 스크린을 틀었다.
스크린에 티비 채널을 연결하자 바로 속보가 떴다.
-….. 상황입니다. 한순간에 사라진 인원수만 거의 3만에 가깝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진명운 기자를 연결해 보겠습니다. 진명운 기자?
-네. 진명운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백랑신가에 나와 있습니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이 가문의 인원 중 3명이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입니다. 가주 신형준 씨는 집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사라졌고, 그의 아들 신경호와 딸 신미진까지 모두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머리 위로 동그란 원형의 빛이 나타나더니 그 빛이 세 사람을 삼켰다고 합니다. 이 현상에 대해 전문가에게 문의해 본 결과, 누군가 빛에 관련된 특성을 가지고 그 특성을 이용해 인간의 몸을 분자 단위로 분해한 것 같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다.
동그란 빛이 등장해 사람을 삼켰다? 그것도 3만 명이나 되는 숫자를?
그런 일이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일어난 건지 정말 의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사라진 사람이 3만 명이 넘습니다. 그중 약 10%가 마공사이고, 나머지 90%는 일반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날한시에 일제히 사라진 3만여 명의 시민들.
이 사건은 오로지 대한민국에서만 발생한 일이었고, 원인도, 목적도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산은 이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한수호에게 서두르라고 말한 걸까?
“제가 특무부에 급히 가야 할 이유가 이일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있지. 지금 막 특무부 본부에 도착했거든. 그런데, 여기에 다 있구나.
“네? 다 있다니 뭐가요?”
-방금 뉴스에 나온 사라졌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특무부 본부 건물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한수호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산은 폰을 영상으로 돌려 그가 보고 있는 장면을 고스란히 한수호에게 보여주었다.
영상은 이산의 말 그대로였다.
특무부 본사 건물 앞을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바리케이트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대충 보이는 수만 해도 만 단위는 훌쩍 넘어 보인다.
그것만이 아니다.
군데군데 새한교 교인복을 입고 있는 자들도 보였고, 황도13궁의 인물들도 섞여 있었다.
가장 놀라운 건, 특무부 본부 건물의 위쪽이었다.
특무부는 총 다섯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건물들 사이의 허공에 눈부신 존재 하나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했지만, 한수호는 초감각의 힘으로 빛을 투과해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발자크!”
그건 다름 아닌 발자크였다.
놈은 암흑섬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 갑주를 걸친 채 거대한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발자크의 몸에서는 눈부신 뇌전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 뇌전들은 특무부 본사 건물 곳곳에 발자크를 향해 쏘아지고 있는 상황.
딱 봐도 발자크는 지금 뇌전을 통해 어떤 힘을 마구잡이로 흡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놈이 발자크라고?”
옆에서 함께 실시간 영상을 보고 있는 서한광도 크게 놀라 했다.
-잘 보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상한 주사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 아무래도 저건 인간을 키이라로 변이시키는 M바이러스인 것 같다. 저들은 이프리트나 황도13궁에 의해 강제로 선택된 실험체들인 모양이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모두 한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고.
이산은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분석해냈다.
그건 한수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특무부로 연락이 안 되는 이유가 저거였군요.”
-보다시피 특무부 요원들은 전부 저들을 막아내기 위해 현장에 투입된 상황이구나.
영상 속에서는 수만의 인파에 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특무부 요원들의 모습도 비추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갈게요. 아, 그리고 잠시 후면 스승님 팀도 현장에 도착할 겁니다. 제가 가기 전까지는 일단 기다려 주세요.”
-알았다. 기다리도록 하마.
한수호는 급히 전화를 끊고 서한광에게 특무부 본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서한광은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뭔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발자크가 저곳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갑자기 저 많은 사람을 저곳으로 불러들여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해. 아무 대비도 없이 가도 괜찮겠느냐?”
“저도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함정이겠죠. 이프리트는 발자크에 대항하는 세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상대하기가 싫은 겁니다. 이 기회를 빌려 모두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정면으로 승부하자는 거죠.”
“정면 승부라….”
“말이 정면 승부이지 분명 함정을 준비해 놨을 겁니다.”
한수호는 이미 이프리트의 함정을 충분히 경험해 봤기에 이젠 조금도 그들을 경시하는 마음이 없었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가겠다고?”
“이대로 두면, 저 많은 사람이 모두 희생되고 말겁니다.”
“키이라 실험체가 되었다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텐데?”
“돌이킬 수 없어도 방법을 찾아봐야죠. 그렇다고 3만이 넘는 인명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한수호의 의지는 분명했다.
함정인 줄 뻔히 알지만 3만여 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갈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라. 여긴 나에게 맡기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딸도 잘 부탁하마.”
서한광은 지금까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서은채의 등을 툭 하고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