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유대룡이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사람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더 기다리다간 발자크가 아크로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해서 그 어떤 힘으로도 상대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아크로의 에너지 잔량이 20%도 남지 않았다.
이 정도면 10분도 되지 않아 에너지 흡수가 끝나고 말리라.
“모두 동시에 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럼 저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으면 어쩌라는 거요?”
구천승과 한 팀을 이루고 있던 방태식이 수많은 시민을 가리키며 한 말에 유대룡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닙니다. 차라리 M 바이러스를 투약하기 전에 끝내주는 것이 낫습니다. 끔찍한 키이라가 되어 살육에 미쳐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말이죠.”
“저 많은 시민을 다 죽여서라도요?”
“지금 당장 발자크와 이프리트 무리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어쩌면 인류가 종말을 고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용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더 머뭇거리다가는 선택권조차 없어질 겁니다.”
유대룡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이는 강대한 적들로부터 더 많은 시민을 지켜야 하는 특무부 본부장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 소(小)의 규모가 3만이 넘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대한민국의 7천만 인구의 목숨에 비한다면 작은 희생이었다.
적어도 유대룡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로군.”
“유 본부장의 말이 맞습니다.”
유대룡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도왕 송혁도.
이패궁 박윤주도.
그리고 한울뇌왕 구천승도.
이곳에서 가장 명망 높은 그들이 인정하니 다른 사람들 또한 더 이상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그럼 준비하시죠. 최대한 넓게 퍼져서 적들의 힘을 분산시킨 다음,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분들이 한쪽으로 파고들어 단숨에 적들의 방어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앞장서지.”
구천승의 말에 국가수호대 특별팀과 강우진이 전면으로 나섰다.
“우리도 돕겠소.”
이번엔 이산과 김명중, 그리고 박철민이라는 마지막 회귀자도 합류했다.
“저흰 특수1과 요원들과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김재우와 윤재희 또한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이동했고, 방태식도 자신의 안드로이드들을 소환해 전투에 대비했다.
“그럼 제 신호에 맞춰 일제히 공격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알았네.”
“그럴게요.”
유대룡은 이프리트의 수뇌부가 자리하고 있는 건물 옥상을 노려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때, 구천승은 이상하게 조용한 한수호를 슬쩍 돌아보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데 이리 조용하지?’
한수호가 잘난 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도, 이런 중요한 작전에 자신의 의견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 건 꽤나 드문 일이었다.
구천승은 이 자리에 있는 마공사들 중, 한수호가 가장 강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 역시 한수호를 따를 자가 없다는 것도.
그런데 한수호는 지금 뒤쪽으로 빠져서 사기환, 나스타샤와 함께 대화를 나누기에 바빴다.
구천승의 시선을 느낀 한수호는 이제야 대화를 끝내고 담담한 표정으로 구천승을 바라봤다.
[등 뒤를 조심하세요.]
한수호가 구천승을 향해 마나전음을 흘려보냈다.
너무도 뜬금없는 소리.
최선을 다해 앞만 보며 치고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뒤를 조심하라니.
구천승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기도 전에 유대룡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전원, 공격!”
그 외침이 신호가 되어 인류의 생존을 건 사투가 시작되었다.
구천승과 송혁, 박윤주를 비롯한 수많은 마공사들이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며 수많은 인간 방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건물 옥상에 있던 강지훈이 손을 앞으로 쭉 뻗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시작하라.”
그 한마디가 거대한 울림이 되어 특무부 본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즉시 변화가 생겼다.
푸욱! 푸부부북! 푹푹!
3만에 달하는 시민들 모두가 손에 쥔 주사기를 팔뚝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우두두둑. 콰지직.
쿠워어어어어!
일제히 신체가 부풀어 오르며 기괴한 형태로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작아 봐야 3미터.
큰 놈은 무려 5미터가 넘어간다.
단순히 덩치만 커진 게 아니다.
어깨 위로 포문 같은 게 생겨난 자도 있었고, 머리 하나가 더 생긴 괴물도 있다.
팔이 네 개로 늘어난 자.
등 뒤로 8개의 뾰족하고 기다란 거미 다리 같은 것들이 튀어나온 자.
날개가 생기거나 두 팔만 기형적으로 커진 괴물도 수두룩했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기괴한 몬스터의 모습을 닮은 존재들.
키이라였다.
M바이러스에 의해 몇 배나 강력한 힘과 육체를 가지게 된, 그리고 마법적인 능력까지 생긴 인간변이체들.
그들은 변화를 마치자마자 마공사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꽈과과과광!
캬오오오오!
폭음과 폭발, 그리고 괴성이 터져 나왔다.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적들과 조우한 구천승.
그는 일말의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뇌전을 한 번에 뿜어냈다.
꽈지지지지지지지직-
그의 몸에서 방전되듯 뿜어진 뇌전은 수십 줄기로 나눠져 키이라들 몸 위에 작렬했다.
퍼엉!
퍼버버벙!
뇌전에 닿은 키이라들은 단 1초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허공엔 키이라들의 살점과 핏물이 비산했다.
마공사들의 공격은 강력했다.
이곳에 있는 마공사들 대부분이 궁급을 가뿐하게 넘어가는지라 아무리 키이라들이 강력하다 해도 제대로 된 싸움이 되지 못했다.
마공사들은 키이라들이 만들어낸 장벽을 거침없이 뚫어내기 시작했다.
우수수 짚단처럼 쓰러지고,
풍선처럼 폭발해 버리는 키이라들의 시체가 특무부 본부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쓰러지는 키이라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키이라들 중 약 3천의 숫자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마공사였다.
그들이 변해 만들어진 키이라는 다른 것들과 차원이 달랐다.
콰과과과과광!
“커억!”
“크윽!”
특무부 요원들이 키이라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어떤 키이라들은 셋 정도가 모여 궁급 마공사 하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6백의 마공사들과 3만 키이라들의 전투.
시작부터 이들의 전투는 피와 비명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여전히 옥상에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던 강지훈이 옆에 선 최부선에게 뭔가 신호를 줬다. 그러자, 최부선이 옥상의 난간 위로 뛰어오르더니 양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렸다.
쿠오오오오오오
하늘 위로 새로운 태양 하나가 떠올랐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특무부 해외본부장인 최부선의 특성이 ‘태양광선’이라는 끔찍한 능력이라는 것을.
최부선의 태양광선은 엄청난 마나력을 소모하긴 하지만 한 번 펼쳐지면 주변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킬 수 있는 최종병기에 가까운 특성이었다.
지금 모두의 머리 위에는 그 태양광선이 뿜어지기 직전의 태양구가 떠오른 상태였다.
“모두 조심하시오!”
“태양광선에 닿으면 끝장입니다!”
“막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위험을 알리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때,
즈아아아아아아아앙!
건물 꼭대기에 떠오른 태양구에서 새빨간 레이져가 세 개나 뿜어져 나왔다.
레이져는 정확히 마공사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타격했고,
꽈아아아아아앙-
가공할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그 폭발에 휘말린 아군은 거의 없었다.
바로 그때,
“아악!”
국수대 정보 과장 노희경이 뭔가에 가슴을 꿰뚫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구천승부터 송혁, 박윤주, 이산 등 모든 마공사들이 정체불명의 존재의 손에 암습을 당했다.
그중에서도 김재우와 윤재희가 가장 끔찍하게 당했다.
그들은 믿고 있던 동료들의 손에 아무 반항도 못 한 채 목이 댕겅 잘려 나가고 말았으니까.
놀랍게도 그들을 암습한 존재는 모두 특수1과의 요원들이었다.
노희경과 김재우, 윤재희는 즉사했지만, 다른 마공사들은 그나마 즉사를 피했다.
철저히 계획된, 그리고 너무도 은밀한 암습이었기에 구천승 조차도 부상을 피하지 못했다.
가장 경악스러운 건 한수호를 암습한 인물이 다름 아닌 유대룡이었다는 것.
한수호는 건물 옥상으로 뛰쳐 올라갈 기회를 보고 있다가 몇몇 마공사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라진 마공사들은 모두 특수1과의 요원들이었고, 이를 이상히 여긴 그는 급히 유대룡을 찾았다.
하지만 유대룡은 이미 태양구가 뿜어내는 빛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한수호의 팔 하나를 잘라낸 뒤였다.
주르륵. 뚝…. 뚝.
한수호의 잘려 나간 왼팔에선 끊임없이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방심을 한 것도 아니고, 예상외의 암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왼팔을 잃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유대룡의 암습은 빠르고 강력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였습니까?”
한수호는 신음 소리 하나 없이 눈을 부릅뜬 채로 유대룡에게 묻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을 아버지처럼 여겨왔던 자, 유대룡.
그런데 지금 그는 한수호의 팔을 잘라낸 대검을 들고 서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놀랍군, 놀라워. 그 와중에도 목숨만은 부지하다니. 하지만 너무 아쉬워 하진 마라. 너도 곧 저들과 같은 신세가 될 테니까. 그동안 넌 내 일을 너무나도 방해해 왔거든. 후후후.”
유대룡은 빠르게 쓰러져 가는 마공사들을 훑어보며 품에서 가면 하나를 꺼내 얼굴에 썼다.
눈구멍만 뚫려있는 새하얀 가면.
그 가면의 이마 부분에는 선명하게 열다섯 개의 꽃잎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야 모든 비밀이 밝혀졌다.
그동안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이프리트의 진짜 수장의 정체.
그 정체는 바로 유대룡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것도. 아카데미 역사관에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도. 그리고 남산에 폭발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장본인도 모두 당신이냔 말입니다!”
“알면서 더 물어봐야 뭘 하겠느냐? 이제 네 운명을 받아들이거라.”
유대룡은 길게 말하지 않고 한수호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섰다.
그런 유대룡을 바라보던 한수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내 아버지를 죽인 자의 손에 키워졌다는 것도 모르고 그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니…. 내 어리석음이 화를 키웠구나. 크크큭.”
한수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정도가 아니었다.
유대룡은 한수호에게 있어 제2의 아버지나 마찬가지.
그의 손에 돌봐졌던 17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나 이프리트의 일에 훼방을 놓더니 그래도 끝엔 날 위해 발자크를 해방시켜 주었구나. 그 점을 감안해 깔끔한 죽음을 선물로 주마. 잘 가라, 한수호.”
유대룡이 대검을 번쩍 치켜든 그 순간이었다.
아무 의욕도 없이 축 늘어져 있던 한수호가 돌연 눈을 또렷하게 뜨더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나스타샤.”
그 목소리에 나스타샤가 곧장 반응했다.
“시간을 거스르는 힘 앞에, 그 무엇도 반항할 수 없으리. 회귀 발동.”
주문처럼 읊어진 말들.
그 말이 끝난 직후였다.
키이이이이이이잉-
나스타샤의 온몸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가 싶더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떨어져 나갔던 한수호의 팔이 다시 붙고, 노희경의 가슴을 꿰뚫었던 검도 사라졌다.
김재우와 윤재희의 머리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으며,
사방을 적시던 시체와 핏물들도 깔끔하게 사라지더니 키이라들과의 치열했던 접전의 흔적들도 깨끗하게 지워졌다.
모든 것이 뒤로 되돌려졌다.
되돌려짐이 멈춰진 시점은 정확히 10분 전.
한수호가 막 이곳에 도착해 상황을 분석하다가 사기환과 나스타샤를 따로 불러 이야기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모두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유대룡도, 구천승도, 이산도.
심지어 건물 옥상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던 강지훈과 황도13궁의 궁주들마저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시간은 되돌려졌지만, 모두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방금 전, 유대룡과 그의 특수1과 요원들이 인류를 배신하고 모두를 암습했다는 사실까지도.
“이, 이게 뭔….!”
유대룡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스타샤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가 아는 나스타샤의 특성은 투시와 염동능력.
그녀가 이런 시간 회귀 능력을 지녔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치명적인 실수.
게다가 상황으로 보건데, 한수호는 이미 유대룡이 배신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팔까지 내어주며 유대룡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길 기다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나스타샤가 한수호의 신호에 딱 맞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영역 전개.”
한수호가 작게 중얼거리자,
후웅
그의 몸에서 뿜어진 마나 장막이 사방을 확 휩쓸고 지나갔다.
그 장막에 스친 사람들 중 약 오십여 명의 머리 위로 마름모 꼴의 표식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표식이 떠오른 사람들은 모두 방금 전 마공사들을 암습에 가담했던 특수1과의 요원들이었다.
표식이 끝나자 한수호는 유대룡의 머리 위에도 떠올라 있는 표식을 힐끔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용서는 없습니다.”
그가 짧게 말하며 앞으로 크게 한발 내디딘 순간,
콰지지지직!
그의 온몸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