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꽈앙!
느려졌던 세상이 깨지자마자 발자크가 휘두른 공격이 한수호의 머리 위에 작렬했다.
하지만 한수호가 이걸 그냥 맞아줄 리가 없었다.
곧바로 천왕검을 사용해 발자크의 모닝스타를 가볍게 올려 쳤다.
불시에 휘두른 공격을 한수호가 너무도 쉽게 막아내자 발자크의 붉은 더욱 붉은 빛을 뿌렸다.
“싸울수록 강해지고 있는 것이냐!”
발자크도 느낀 것이다.
자신이 모든 걸 사용해 능력치를 폭증시켰듯, 한수호 또한 그만의 방법으로 엄청난 능력치 상승을 이루어 내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발자크는 자신이 밀릴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초월한 신에 가까운 존재였고, 한수호는 아직 인간의 껍질을 벗어내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했으니까.
발자크는 더욱 한수호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꽈앙!
꽈광! 꽝꽝!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여기엔 어떤 기술도, 어떤 마법도 가미되지 않았다.
오직 강력한 힘 하나로 한수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발자크의 무식한 공격을 한수호는 하나하나 맞받아쳤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초감각에 의한 느려진 세상은 사용할 수 없게 됐지만, 그렇다고 발자크의 공격이 어디로 날아들지 모르지 않았다.
한수호는 발자크와 대등한, 아니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조금씩 반격까지 가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특성을 분해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전투에 몰입하지 않고 신경을 분산하는 위험을 감수한 탓에 아슬아슬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펼쳐졌다.
스카각!
파캉!
빗겨 맞은 모닝스타가 살짝 스쳤을 뿐인데 어깨의 갑주가 푹 찌그러졌다.
충격으로 어깨뼈가 탈골됐지만 빠르게 상처 회복을 사용해 부상을 치료했다.
황금의 갑주도 자체 재생 능력이 있어 찌그러진 부분은 금방 복구되었다.
계속해서 위험한 순간이 반복되었다.
때로는 가슴팍이, 때로는 허리가, 때로는 허벅지가 발자크가 휘두른 모닝스타에 맞아 퍽퍽 우그러졌다.
그 정도로 발자크의 공격에 담긴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허공에서 벌어지는 두 존재의 치열한 전투.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빛이 번쩍거리고, 충격파가 펑펑 터지는 광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이 자리에 온 사람들도, 세상을 좀먹으려는 이프리트의 악적들도 모두 싸움을 멈추고 두 존재가 벌이는 경이로운 전투에 집중했다.
그들의 전투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유성들이 춤을 추는 모습과 같았다.
서로를 향해 돌진하고, 흩어졌다가 다시 부딪치며 온 하늘을 누비고 다니는 살아있는 유성.
두 유성이 충돌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충격파는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머릿속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게 유성의 춤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날 때까지도 두 존재의 전투는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자크는 그렇다 쳐도, 인간인 한수호가 이렇게나 강력한 힘을 지녔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모두 경악하고 있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전투.
하지만 1시간이 지나갈 무렵, 전투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수호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모든 능력치가 최대 한계치까지 높아진 상태였지만, 발자크의 초재생의 힘은 그 어떤 공격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한수호가 지닌 상처 회복 특성은 쿨타임이 존재했고, 반복적인 사용으로 인해 회복 속도가 점점 더뎌지고 있었다.
반면에 발자크의 초재생은 쿨타임도 없이 즉시로 발휘되었으며, 여전히 엄청난 재생력을 보였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점점 누적되다 보니 한수호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꽈앙!
엄청난 충격에 한수호의 상체가 뒤로 확 젖혀졌다.
그만큼 지쳤다는 증거.
이를 눈치챈 발자크는 싸늘한 미소를 그리며 한수호를 더욱더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파캉!
“크윽!”
한수호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30여 미터 물러났다.
더 이상 허공을 날아다닐 힘도 없는지 바닥에 내려서서 여전히 허공 위에 떠있는 발자크를 무섭게 노려봤다.
“하…. 하아….”
지칠 대로 지친 듯 숨이 거칠다.
그런 한수호의 모습에서 승리를 확신한 발자크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모닝스타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인간의 몸으로 지금까지 버텨낸 것에 경의를 표하마.”
발자크는 이제 끝낼 때가 왔음을 느끼고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오늘을 위해 준비한 내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날 너무도 기쁘게 만드는구나! 크하하하하!”
콰직
발자크가 광소를 터트리자 그가 선 자리가 푹 꺼져 들었다.
“인간들이여! 이제부터 나 발자크를 경외하고, 두려워하라. 그동안 너희 인간들이 행해온 모든 과오를 정화시키기 위해 내 손으로 직접 너희에게 파멸이라는 천벌을 내리노라.”
발자크는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외침을 터뜨리며 한수호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바닥을 콱 찍어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20미터 높이로 날아오른 발자크.
그는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는 한수호를 가소로운 듯 노려봤다.
그리고 입가에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모닝스타를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파멸.”
츄아아아아아앙
마치 공간을 가르는 것 같은 거대한 빛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담아 한수호를 향해 날아갔다.
그 빛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한수호.
그의 거칠었던 호흡이 갑자기 진정되었다. 그리고,
번쩍!
한수호가 눈을 번쩍 뜨며 왼손을 활짝 펼쳐서 앞으로 쭉 뻗어냈다.
‘쇼크이터!’
순간, 그의 손에서 뿜어진 기운이 반경 2미터를 둥그렇게 휘감으며 커다란 장막을 만들어 냈다.
발자크가 쏘아낸 파멸의 빛은 그 장막 위에 작렬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핵폭탄급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슈아아아아아악-
주변 수 킬로미터를 완전히 초토화시킬 정도의 폭발력이 한수호의 손바닥으로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드
한수호가 서 있는 대지가 미친 듯이 뒤흔들렸다.
쭉 뻗어낸 팔은 충격을 억지로 버티듯 마구 흔들렸다.
“크으으윽!”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성.
한수호가 상정한 것보다 두 배는 강력한 힘이었다.
0티어 특성인 쇼크이터로도 그 모든 힘을 흡수해 내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까지인가….’
한수호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한다면 몸도, 마음도 너무나 편해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인류의 생존을 책임지겠다며 아등바등 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밀고 있는 손만 내린다면.
쇼크이터 특성으로 전해지고 있는 마나만 끊는다면 모든 걸 잊고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웅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닥치더니, 누군가가 한수호의 옆으로 달려들어 손목을 꽉 붙잡았다.
조금은 차갑고, 둔탁하며, 비교적 작은 체구를 가진 인간이 아닌 누군가의 손.
그 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월이었다.
월은 마치 한수호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에 나타났다.
한수호의 손을 꽉 쥔 고블린 워리어 월.
월의 손을 통해서 뜨겁고 강력한 ‘아크로’의 에너지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 힘은 거의 꺼져가고 있던 쇼크이터의 불씨를 다시 되살려 냈다.
하지만 불씨만 되살렸을 뿐, 발자크가 뿌려낸 파멸의 빛을 완전히 흡수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쇼크이터의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이 월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
콰직.
월의 몸통이 찌그러졌고,
퍼엉!
왼팔과 허리에 폭발이 일며 몸이 분리되었다.
‘그만해 월!’
한수호는 월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말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질 않았다.
그때, 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수호를 바라봤다.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표정.
월도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대신, 눈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주인. 포기하지 마라. 주인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월의 눈동자 위로 흘러가듯 지나가는 글자들.
글자의 맨 끝엔 방긋 웃는 이모티콘이 떠올라 있었다. 그 순간,
퍼어어어어어엉!
월의 머리가 터지고, 몸통이 폭발했다.
“크아아아아아!”
한수호의 분노가 폭발했다.
회귀한 이후, 가장 오래 한수호의 곁을 지켜준 동료이자 형제와도 같았던 월.
그 월이 한수호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
비록 A.I에 불과한 월이었지만 한수호에게 있어 월은 단순한 기계 따위가 아니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발자크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잠시나마 포기를 떠올렸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한수호는 월이 죽은 건 온전히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끼어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너무도 나약한 모습을 보였기에 발생한 월의 죽음.
스스로를 향한 분노는 한수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 잠재력은 육체의 한계마저 넘어서는 힘을 이끌어 냈다.
-육체한계치: 31/30
이미 육체한계치인 30까지 도달해 있었지만, 잠재력이 터져 나오자 그 한계마저 깨뜨려 버렸다.
푸화아아아아악!
폭발적인 힘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와 손바닥으로 밀려들었다.
후아아아아악
한수호의 제어를 벗어나 사방으로 폭발력을 뿜어내려던 파멸의 힘이 다시 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마치 블랙홀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이 놀라운 현상에 발자크도 크게 놀랐는지 한수호를 찍어 누르듯이 다가서며 더욱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한수호는 한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단숨에 발자크에게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둘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좁히는 것.
그래서 발자크의 몸통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 것이 한수호의 목표였다.
하지만 파멸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거리를 좁히는 건 생각도 못 한 채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었다.
만약 월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한수호는 이미 파멸의 힘에 잡아먹히고 말았으리라.
지금으로부터 약 15분 전,
한수호는 1시간이 다 되도록 발자크와 팽팽한 구도를 유지하면서 이미 8개의 특성을 모두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인트는 1억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보유 포인트: 341NP / 86,200,000LP
1억 LP가 되기까지 남은 포인트는 약 1천 4백만.
한수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다른 특성까지 추가로 분해하려 했다. 바로 그때, 한수호의 눈앞에 시스템의 경고가 떠올랐다.
>>더 이상의 분해는 불가능합니다.
놀랍게도 분해에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
1억 포인트를 만들어 천왕검의 마지막 기술인 ‘운명 가르기’를 사용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한수호는 허탈해졌다.
그 허탈함이 발자크가 뿜어낸 파멸의 힘과 겹치며 한수호로 하여금 포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
그 순간, 월이 한수호의 나약함에 일침을 가하듯 끼어들었고, 장렬한 죽음으로 한수호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파멸의 힘은 한수호의 손으로 끊임없이 빨려들었다.
조금만 더 견뎌낸다면 파멸의 힘은 사라질 터.
그때가 반격의 순간이 되리라.
바로 그때,
한수호의 눈앞에 또다시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이 어떻게 회귀하게 되었는지를 잊지 마세요.
무척이나 뜬금없는 내용.
하지만 그 메시지에 한수호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수호를 회귀하게 만든 원인.
그걸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2회 한정으로 상대방 스탯 조정이 가능합니다. 쿨타임 10년
개조 특성에는 상대 스탯을 조정하는 기능이 있었다.
쿨타임은 비록 10년이나 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쿨타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한수호는 상대 스탯 조정으로 이대경의 스탯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광폭화를 걸어 정신을 분열시켰었다.
그로 인해 시공간 게이트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17년 전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시스템이 잊지 말라는 건, 개조로 상대 스탯을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라는 의미.
한수호는 바로 개조 특성을 사용해 발자크의 스탯을 조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목표의 스탯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1,000NP가 필요합니다.
힘이 쫙 빠지는 메시지.
한수호가 지닌 NP는 341이었고, 1,000에서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한수호는 다른 사람과 전투를 벌일 때, 뇌전의 힘을 담은 주먹을 상대의 몸에 꽂아 넣음으로써 NP를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 한수호는 이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나를 흡수하는 흡정마로 오해받는 것도 싫었고, 이 기술에 중독되었다가는 손쉽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에 완전히 매료될 것 같았기 때문.
‘발자크를 상대로 이 기술을 쓴다면 얼마나 되는 NP를 흡수할 수 있을까?’
한수호는 발자크의 몸에 뇌전의 주먹을 박아 넣을 방법을 떠올렸다.
한수호는 발자크의 모든 것이 담긴 파멸의 힘만 막아낸다면 반격의 발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월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월의 말처럼 두 번 다시 포기를 떠올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파멸의 힘을 버텨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