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한수호는 국가수의 노희경을 통해 이 계획을 정부에도 알렸다.
2만 5천의 키이라들이 국가와 시민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자신이 아스루나로 이끌고 가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정부도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정부 입장에선 2만 5천이나 되는 키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도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에 한수호의 제안은 큰 짐을 덜어주는 일이었다.
대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기에, 이 일은 비밀리에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이 계획을 아는 인물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한수호가 생각한 귀환일은 한 달 뒤.
적어도 그 정도는 아스루나에 머물러야 키이라들의 정착을 돕고, 새로운 주인까지 선정할 수 있었다.
“라라. 케이시를 여기로 불러줘. 가능하지?”
한수호는 그나마 무너지지 않은 특무부 건물 안에 들어가 라라에게 케이시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라고 지시했다.
라라는 세이렌의 여왕이라 케이시 같은 드래곤 족과도 정신감응으로 대화가 가능했다.
잠시 후, 광화문으로 갔던 케이시가 포탈을 열고 한수호 앞에 나타났다.
“너, 그거 사실이야? 키이라들 데리고 아스루나로 가겠다고?”
라라는 케이시에게 그 계획까지도 다 말해준 모양이었다.
“맞아.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다.”
“나보고 게이트를 열라는 거냐?”
“다른 게이트를 이용하면 세상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될 테니까 비밀리에 하려면 어쩔 수 없잖냐.”
“내가 만든 게이트도 다른 게이트하고 다를 게 없을 텐데? 인간은 통과가 불가능…. 아, 넌 용마족이기도 하니 해당이 안 되겠군. 머리 좀 썼는데?”
케이시는 한수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 의미에서 발록하고, 가이도도 데려와 주라. 녀석들도 데리고 가야지.”
“하긴. 이제 지구로 몬스터들이 넘어올 길이 막혔으니 그 녀석들만 남겨둘 이유가 없겠지.”
“뭐, 그런 거지. 그나저나 너희들은 어쩔래?”
한수호는 발 앞에 쪼그려 앉은 작은 고니와 사툴란, 그리고 라라에게 물었다.
같이 가도 좋고, 이곳에 남아 있어도 좋으니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우린 오라버니의 전투 영역에 있으면 되는데, 무슨 선택이 필요할까요?”
라라는 월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굉장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게이트를 통과하면 한 달 동안은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니까 원한다면 여기 남아 있으라는 거야.”
한수호가 아스루나에 가면, 전투 영역에 있더라도 지구로는 갈 수 없게 된다.
그건 전투 영역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고.
그래서 한수호는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에 전투 영역에 들러, 어머니와 별이를 지구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그럼, 전…. 여기 남을래요. 한 달 동안이나 한국 음식을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영 내키지가 않네요. 게다가 한별이를 옆에서 지켜줄 사람도 필요하고요. 안 그래요?”
라라는 더 이상은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는 듯, 한별이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고니랑 사툴란, 너희는?”
캬르릉.
고니는 한수호의 발에 머리를 부비적 거리며 함께 가는 길을 택했고, 그건 사툴란도 마찬가지였다.
쿠워, 쿠워어어어!
사툴란은 제 가슴을 텅텅 두드리며 주인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좋아. 그럼 모두 결정됐네. 케이시는 게이트 준비해 주고. 난 잠시 전투 영역에 다녀올게.”
한수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전투 영역에 들어간 한수호.
그는 가장 먼저 게이트 보관 창고로 가서 그곳에 있는 게이트들도 똑 같은 상태인지를 확인했다.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몇 가지 물건들을 게이트로 던져 넣어보고, 그것이 모두 문제없이 통과한다는 걸 확인한 뒤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게이트로 진입해 보는 것이었다.
그 결과, 보관 창고에 있는 게이트들도 똑같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이트 상태를 확인한 한수호는 곧바로 어머니 이태희를 만나 지금의 상황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한수호가 꼭 아스루나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시킨 후, 한별이와 함께 지구로 귀환했다.
이태희는 처음엔 한수호를 뜯어말렸다.
모든 게 끝난 지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냐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이 일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키이라들이 자신을 주인으로 선택한 이상, 그걸 바꿀 방법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주인의 권한을 주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생각이었다.
한수호는 이태희와 한별이를 백윤후와 서은채에게 부탁했다.
백윤후는 자신도 함께 게이트를 넘어가겠다고 했지만, 한수호가 이를 거부했다.
만약 백윤후가 게이트를 통과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백윤후 또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인증하는 것이 되기에 서로를 위해 그건 피하자고 했다.
결국, 백윤후도 한수호의 말을 받아들였다.
서은채는 한수호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녀는 순수한 인간이었기에 게이트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만 동동 구르며 다른 방법이 없겠냐며 한수호를 닦달했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한수호가 서은채를 전투 영역으로 데리고 들어간 다음, 게이트를 통과한 뒤 다시 데리고 나오면 아스루나로 넘어가는 게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그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서은채가 아무리 함께 가길 원한다고 해도, 그곳에 가는 건 한수호 혼자여야 했다.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위험 속에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었다.
케이시는 특무부 건물 안에 자리한 커다란 수련장 안에 아스루나로 연결된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우우우우웅-
파란 빛을 흘리며 등장한 커다란 게이트.
게이트는 아무리 큰 대형 몬스터라고 해도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규모였다.
게이트가 생성되자 한수호는 슬쩍 손을 내밀어 통과가 가능한지를 확인해 봤다.
손가락은 게이트 표면에 부딪쳐 멈춰지고 말았다.
인간의 진입을 거부하는 상태는 동일했다.
“케이시. 이 게이트는 아스루나의 어디로 연결된 거지?”
“너희들이 자꾸 아스루나, 아스루나라고 불러서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긴 하다만, 아스루나는 대륙의 정식 명칭이 아니다. 아무튼, 저 게이트는 대륙 북서쪽 끝에 위치한 암흑섬과 이어져 있다.”
“암흑섬? 왜 하필 거기야?”
암흑섬은 발자크가 봉인되어 있던, 제주도보다도 커다란 섬이었다.
한수호가 묻자 케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위험할 게 전혀 없는 곳이니까. 아스루나 대륙에서 저만큼이나 많은 몬스터들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암흑섬밖에 없어. 다른 곳으로 갔다간 그 땅의 주인들한테 큰 반발을 살 거고.”
“인간은 없지만, 몬스터들이 땅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다. 뭐, 이런 건가?”
“가서 또 전쟁을 치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암흑섬에 정착하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좋아. 게다가 암흑섬은 원래 반마족이 살고 있던 곳이야. 반은 마족이긴 해도 무척이나 순하고, 전투 성향도 지극히 낮지. 오래전에 멸종해서 사라지긴 했다만, 저 많은 키이라들이 자급자족하며 살기엔 그만한 곳이 없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긴 해.”
케이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게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넌 또 뭐가 이상해?”
벌써 세 번째로 듣는 ‘이상해’라는 말에 한수호는 노이로제에 걸릴 판이었다.
“뭐, 다른 건 아니고. 게이트를 형성시킬 때, 나로서도 컨트롤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의 간섭이 잠깐 있었다.”
“힘의 간섭?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건…. 아니다. 게이트가 생성된 좌표는 정확해.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럼 됐네, 뭐.”
이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남은 건 한수호가 키이라들의 주인이 되어 그들을 이끌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 것.
한수호는 밖으로 나가 스승 구천승과 송혁, 그리고 회귀자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기환이나 김재우는 완전히 박살난 특무부를 다시 조직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따로 인사를 나누진 못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여긴 걱정 말고.”
구천승과 송혁의 인사를 뒤로한 한수호는 2만 5천의 키이라들 앞으로 당당하게 나섰다.
여전히 한수호의 눈앞에 떠 있는 메시지.
>>새로운 주인이 되어 이들을 이끌겠습니까? YES/NO
한수호는 머뭇거림 없이 YES를 선택했다.
그 순간 흐릿하던 키이라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키이라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담백하게 이어지는 메시지에 한수호는 키이라들에게 명령을 내려봤다.
“모두 손을 들어봐.”
한수호의 말에 2만 5천의 키이라들이 일제히 손을 번쩍 치켜든다.
2미터 크기의 비교적 작은 키이라부터, 5미터 이상되는 대형 키이라까지.
군무를 추는 댄서들처럼 오차 하나 없이 일사분란한 행동에 한수호는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날 따라오도록.”
한수호는 키이라들에게 간단한 명령을 내리고는 게이트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한수호를 따라 2만 5천의 엄청난 숫자의 키이라들이 줄지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수호는 케이시가 만들어 낸 게이트 앞에 섰다.
짙푸른 표면이 일렁거리며 사람을 유혹하는 것만 같은 게이트.
이젠 더 이상 인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게된 게이트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수호는 괴인혈을 발동시켰다.
콰드드드드득!
그의 몸이 순식간에 변화했다.
단숨에 3미터 이상으로 몸집이 커졌고, 몸의 모든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엄청나게 두꺼워졌다.
가슴팍과 등, 그리고 어깨부위까지 단단한 비늘로 뒤덮이며 얼굴은 늑대의 형상으로 변해버렸다.
변신을 마친 한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장소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네 사람.
케이시와 백윤후, 서은채, 그리고 라라까지.
한수호가 괴인혈로 수인화 된 모습을 처음 보는 그들은 크게 놀란 듯 보였지만, 금세 침착성을 되찾았다.
한수호는 그들을 가만히 괴인의 모습으로 피식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어 주었다.
케이시는 가장 마지막에 게이트를 넘어오겠지만, 백윤후나 서은채, 라라는 이곳에 남아 한수호의 귀환을 기다릴 예정이었다.
한 달 간 얼굴을 못본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들 한 달 뒤에 보자.
한수호는 마나전음으로 인사를 전한 뒤, 가장 먼저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수호가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자 그 뒤를 따라 키이라들이 줄지어 케이트에 진입했다.
2만 5천이나 되는 키이라들이 두 줄로 늘어서 차례대로 게이트에 들어서는 모습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흡사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 아픈 과거를 떠오르게 했다.
인원이 많아서인지 두 줄로 끊임없이 게이트에 진입하고 있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케이시가 입맛을 쩝 다시며 서은채를 돌아봤다.
“정말 할 생각이냐?”
“네, 언니. 아빠한테도 이미 말씀드렸어요.”
케이시와 서은채 사이에 뭔가 거래가 있었던 모양.
“한수호가 무단으로 전투 영역에 침입한거 알면 엄청 화낼텐데?”
“화는 내겠죠. 그렇다고 이 갸냘픈 몸을 두드려 패기야 하겠어요?”
“뭐, 그렇긴 하다만….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게 만들지만 마라.”
“걱정 마요. 언니한테는 절대로, 네버 아무 피해가 없을 거예요.”
서은채는 한수호 몰래 케이시에게 부탁을 했다.
같은 여자여서 그런지 서은채는 언니라고 부르며 케이시를 무척이나 따랐고, 케이시 역시 그게 싫지 않았는지 서은채를 동생처럼 돌봐주고 있었다.
그래서 서은채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케이시의 본체는 대적룡 볼케스였지만, 케이시의 모습을 한 상태에선 한없이 인간다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서은채의 부탁은 한수호의 전투 영역으로 이어지는 게이트를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서은채도 전투 영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곳을 통하면 한수호와 함께 게이트를 넘어갈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케이시의 도움을 받아 전투 영역으로 몰래 숨어들려는 것이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따라갈까나?”
백윤후도 이 판에 슬쩍 끼어들 의사를 비췄다. 하지만,
“나야 욕만 좀 얻어먹고 끝나겠지만, 오빠는 말로만 끝나지 않을 걸요?”
서은채의 지적에 백윤후는 찔끔했는지 더는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아무튼, 뒷일은 나도 책임 못 진다.”
“네. 언니. 걱정마세요.”
“후우….”
케이시는 앞으로 몇 발자국 나서더니 두 손으로 기이한 형태의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그녀의 앞 5미터 지점에 2미터 크기의 작은 게이트가 불쑥 생겨났다.
“갈거면 서둘러. 개인의 아공간으로 연결된 거라 이 게이트는 1분이면 사라진다.”
“네!”
서은채는 미리 준비해 놓은 배낭 하나를 들쳐 매고는 게이트 앞에 섰다. 그리고 백윤후와 라라를 향해 방긋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럼 다시 볼 때까지 바이바이요!”
서은채는 마치 여행을 가듯 즐거운 얼굴로 손을 흔들어 댔다.
백윤후와 라라는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서은채는 마지막으로 브이자를 그려보이고는 게이트 안으로 점프했다.
슈욱-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형 게이트 또한 모습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약 20분 뒤.
2만 5천의 키이라들도 모두 게이트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케이시는 마지막으로 게이트 앞에 선 다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라라가 살짝 긴장한 얼굴로 케이시에게 한마디 했다.
“언젠가 다시 뵐 날이 있겠죠?”
라라는 케이시가 아스루나의 마지막 인류가 아니라 대적룡 볼케스 본인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챘다.
그래서 케이시를 대할 때 한없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
라라로서는 가급적 케이시와 한 장소에 있고 싶지 않았기에 핑계를 대며 한수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에 큰 용기를 내어 인사를 하려고 했다.
“뭐, 한수호가 전투 영역에 내 자리를 만들어 준다면, 나도 서은채처럼 다시 지구로 올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지.”
케이시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라라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 그럼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으시다는…”
라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말하던 그때였다.
케이시 앞에 있던 커다란 게이트가 갑자기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슈아아아아아. 팟!
그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막 게이트 안에 진입하려던 케이시는 이 갑작스러운 현상에 놀라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