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귀환, 그 후의 이야기 7화
쿠화아아아아악-
공간이 갈라지며 커다란 게이트가 나타났다.
게이트는 훗카이도의 중심도시이자 약 5백만 명의 시민이 살아가는 대도시 삿포로의 한 숲속에 열렸다.
게이트가 열린 시간은 단 1분.
그 짧은 시간에 게이트 안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사내 하나와 마찬가지로 수수한 모습의 젊은 여인 하나, 그리고 눈에 확 띄는 붉은 옷을 걸친 적발의 여인까지.
바로 한수호와 서은채, 케이시였다.
“여기가 삿포로의 마루야마?”
한수호는 주변 숲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왜? 내가 엉뚱한 곳으로 데리고 왔을까 봐?”
“이미 전적이 있으니까 그러지. 날 수백 년 전의 아스루나로 날려버린 게 누구였더라?”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니까? 네가 게이트를 넘어가는 순간, 드래곤이나 인간을 뛰어넘는 신 같은 존재가 개입했던 게 분명하다고!”
케이시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한수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은채의 손을 잡고는 마루야마의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
산 정상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었다.
꼭대기에 오르자 삿포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화롭군.”
삿포로는 10여 년 전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해 지금은 일본 제2의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그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이트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한민국만큼이나 커다란 크기인 홋카이도에서는 게이트 발생률이 무척이나 낮았다.
보름이 멀다고 게이트가 발생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홋카이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게이트 소동이 일어났다.
또한 특이하게도 게이트 발생률에 비해 홋카이도에서 각성한 마공사들은 유난히 강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홋카이도를 찾아 대이동을 시작했던 것.
한수호는 그런 홋카이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삿포로를 마루야마 정상에서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수호. 너 여길 폭격이라도 할 생각이냐?”
케이시는 한수호가 갑자기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대한민국에 핵무기를 쏜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함이라는 걸 잘 안다.
보기엔 쉽게 흥분하지 않고, 차분한 성격의 한수호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치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번 일로 수천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핵 미사일 20여 기가 쏟아진 결과에 비해서는 아주 미미한 희생이었지만, 그렇다고 수천 명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한수호가 아니었다.
“폭격이라…. 뭐 비슷하긴 하지만, 진짜로 폭격하는 건 아니야.”
“그럼 대체 어쩌려고? 수백만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라도 하려고?”
“대적룡 볼케스가 너무 인간적인 거 아니야? 예전의 너였으면 인간들이 얼마나 죽던 아무 상관 안 했을 텐데.”
“인간적 인게 아니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대량 학살은 답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화? 네 눈에는 내가 화난 걸로 보이나 보지?”
“…. 뭐? 화 난 게 아니면 여긴 왜….?”
케이시는 한수호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주 가깝진 않아도 조금씩은 인연이 있었던 마공사들이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거기다 아무 죄도 없는 국민의 수천 명이 희생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화가 나서 복수하러 온 게 아니라니?
“말했잖아. 본보기를 보여준다고.”
“그러니까. 화가 나서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소리잖아?”
“아니. 달라.”
한수호는 피식 쓴웃음을 흘리며 서은채를 돌아봤다.
“이건 응징이야.”
“응징?”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우치지 못하면 더욱 거대한 처벌이 있을 거라는 일종의 경고지.”
케이시는 한수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응징과 처벌.
얼핏 보면 같은 뜻이었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응징에는 갱생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처벌은 지은 죗값을 치른다는 의미밖에 없다.
한수호는 삿포로에 응징함으로써 일본이 과연 어떤 대응을 하는지 지켜보고 그에 따라 처벌의 수위를 정하겠다는 뜻이었다.
한수호의 속뜻을 이해한 케이시는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럼 왜 하필 삿포로지? 누가 봐도 도쿄가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클 텐데?”
“과연 그럴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지켜봐. 일본에 있어 상징적인 의미를 따져보면 도쿄보다 삿포로가 더욱 크다는 걸 곧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한 한수호는 왼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쪽으로 손을 쭉 뻗어냈다.
“소환.”
그의 말에 바위 위로 작달만 한 몬스터 하나가 나타났다.
1.5미터의 작은 키에 뾰족한 귀를 지닌 검은 피부의 몬스터.
바로 월이었다.
월은 밭일이라도 하다 온 건지 손에 삽을 들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월은 한수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전투 영역에 들어오지도 않고 곧바로 소환부터 하나?”
“내가 좀 급해서 말이지.”
“지구로의 귀환은 성공적이었나 보군. 그런데 여긴 서울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여긴 일본의 삿포로다.”
“삿포로? 여긴 왜 온 거지? 날 급하게 소환한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세계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인 것 같군.”
월은 한수호가 왜 자신을 급히 소환시켰는지를 알아챘다.
그러자 한수호는 월에게 자신이 귀환한 직후 어떤 광경을 목격했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무엇을 할 생각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상황은 알겠다. 삿포로에 살고 있는 인간들 모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일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
“일루젼도 부탁한다.”
“그것도 문제없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한수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더니 마나력을 끌어올렸다.
“준비됐으니 시작해도 된다.”
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수호의 앞쪽에 반투명한 형태의 마이크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건 월이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마이크가 등장하자 한수호는 주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커다란 목소리로 호통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삿포로에 사는 모든 일본인에게 경고한다. 너희 일본은 오랜 세월 타국을 무단으로 침략하여 약탈을 일삼아 왔음에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죄한 적이 없었다. 지배욕과 정복욕밖에 없는 너희 일본은 이제라도 과거의 잘못을 인지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첫발을 내딛게 해주기 위해 우리 러시아가 너희 일본인들을 응징하노라.”
한수호는 일본 전체를 강하게 꾸짖으며 맨 마지막에 러시아를 언급했다.
이것이 바로 도쿄가 아닌 삿포로를 응징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였다.
일본은 긴 세월 동안 홋카이도 동쪽에 자리한 쿠릴 제도를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영토전쟁을 이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쿠릴 제도는 러시아의 소유였고, 일본은 지금도 이 쿠릴 제도를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삿포로에 끔찍한 응징을 가하고, 그 주체를 러시아로 둔갑시키면 어떻게 될까?
일본이 응징의 진짜 의미를 깨닫고 자숙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러시아에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수호가 말한 처벌은 바로 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한수호의 외침은 월이 만들어낸 마이크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세계수의 힘에 의해 사포로 전체에 널리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삿포로에 사는 모든 시민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게이트가 사라진 지 1년.
그동안 몬스터의 위협이 없었던 덕분에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모두의 머릿속을 파고든 음성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로 된 미지의 음성은 모든 삿포로 시민들의 머릿속으로 동시에 파고들었다.
파괴와 살육으로 점철된 일본의 과거를 언급하며 이제는 일본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책임론에 시민들 모두가 분개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매스컴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며 머릿속에 들려온 음성의 말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세계는 흥분했다.
드디어 러시아가 미쳐버렸다고.
대한미국에 핵 미사일을 쏘아 보낸 것도 모자라 이젠 일본의 삿포로에까지 폭격할 의지를 밝혔으니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 사건은 러시아가 벌인 것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계속해서 성명을 내보내며, 삿포로에 울려 퍼진 의문의 목소린 결코 러시아가 아니며 일본과의 전쟁을 바라는 세력의 음모라고 반론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삿포로 시민들의 눈앞으로 놀라운 영상이 동시에 보여졌다.
쿠릴 제도의 한 화산섬에서 거대한 미사일이 쏘아지는 영상.
미사일에는 러시아어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그 미사일이 향하는 곳은 바로 삿포로였다.
영상에 이어 의문의 음성이 다시 시민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이것이 우리 러시아가 너희 일본인에게 내리는 응징이다. 너희가 대한민국을 향해 핵 미사일을 거침없이 쏘아 올렸듯, 우리 러시아도 일본의 과오를 응징하기로 뜻을 하나로 뭉쳤다. 속죄하고 사과하라. 너희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더러운 군국주의 사상을 내버린다면 응징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조금의 반성조차 없다면 이 응징은 두 배, 네 배의 쓰나미가 되어 일본 전역을 뒤덮을 것이다.]
삿포로의 시민들은 겁에 질렸다.
티비나 인터넷이 아닌, 눈앞으로 떠오른 영상과 머릿속을 직접 파고드는 음성은 그들에게 진짜라는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매스컴을 통해 삿포로의 시민들에게 나타난 현상이 단순한 환상일 뿐이며, 러시아와 일본을 이간질하게 하기 위해 고위급 마공사가 특성을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삿포로의 마공사들이 직접 나서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마공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오히려 비판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삿포로의 인구는 5백만이 넘는다.
그 엄청난 숫자를 동시에 컨트롤할 수 있으려면 보통 마나력으로는 아예 불가능하다.
1년 전, 대한민국에 등장했던 대마왕 발자크나 그를 쓰러뜨린 한수호라는 절대의 마공사가 정도면 모를까, 그 외의 마공사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마공사들의 이러한 발표로 삿포로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은 쿠릴 제도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15분 뒤면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 미사일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일본이 저지른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정확히 골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파장을 뿜어낼 거라고 했다.
도시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도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과 이게 다 정부 탓이라며 시위에 나선 사람들로 온통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14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삿포로의 상공에 정말로 미사일 한 기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보여준 환상 같은 영상에서 본 것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의 미사일.
미사일의 등장에 삿포로의 시민들은 ‘오, 하느님!’을 외치며 주저앉았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며 자신은 일본의 과오를 인정한다며 발작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시로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삿포로.
그곳의 시민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미사일은 상공 1킬로미터에서 화려하게 폭발하며 무지갯빛 파장을 온 도시로 퍼뜨리기 시작했다.
* * *
“영역 전개.”
한수호가 작게 중얼거린 순간, 그의 몸에서 시작된 마나의 파장이 삿포로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지금 삿포로 상공에서 폭발한 미사일은 월과 세계수의 힘이 만들어낸 사실 같은 일루젼일 뿐, 진짜는 따로 있었다.
한수호의 영역 전개는 무한에 가까운 그의 마나력의 힘으로 삿포로 전역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게 펼쳐졌다.
마나의 파장에 스친 사람들은 모두 한수호의 타겟이 되어 머리 위로 마름모꼴의 표식이 떠올랐다.
그 숫자는 정확히 5,137,241명.
“월. 타겟팅 된 일본인 중에서 일본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지?”
눈을 감은 채 전개된 마나력을 컨트롤 중이던 한수호의 질문.
이에 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3백만 정도다.”
“그럼 2백만 이상이 일본은 아무런 과오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건가…. 역시나 어처구니없는 국민성이로군.”
“그중 약 백만 정도는 대한민국에 핵이 떨어진 걸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다.”
“아직도 너무 많아…. 후….”
한수호는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지금 그는 영역 전개를 이용해 응징할 대상을 선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백만 명 모두를 응징하기엔 너무나 숫자가 많았다.
“월. 그들 중에서 이번 일로 목숨을 잃은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을 가진 사람을 제외해봐.”
“그래도 12만 명이 남는다.”
“거기서 일본이 또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극우사상을 지닌 자들만 추린다면?”
한수호의 주문이 조금 복잡해졌지만, 월은 아무렇지 않게 주문에 맞는 인원을 단숨에 추려냈다.
“3만 6천 명이다.”
“하…. 일본이란 나라는 정말 징글징글하구나.”
“더 추려낼 생각인가, 주인?”
월의 질문에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선별 기준을 내밀었다.
“20세 이하는 제외해 줘.”
“2만 3천 명.”
“이미 다른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하는 자들도 제외.”
“2만 명.”
“단 한 번이라도 대한민국에 호의를 품은 적이 있었다면 그 사람들도 제외.”
“흐음…. 그래도 1만 3천 명이다.”
추리고 추려도 1만 명이 넘는다.
한수호는 여기서도 더 줄여보려고 고민했다. 바로 그때, 그저 한수호가 하는 일을 지켜만 보던 서은채가 한수호의 뒤에서 그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흠칫 놀란 한수호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서은채를 바라봤다.
허공에서 얽혀드는 두 사람의 시선.
“오빠…. 가혹하고 잔인한 말이지만.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또 다른 서은채를 생각해 주길 바랄게. 만약 그렇게 소멸된 사람이 나였어도 오빠가 이렇게 고민했을까?”
서은채의 말에 한수호는 흔들리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너무 많은 걸 용서해 주고 있었어.”
한수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월에게 지시했다.
“타겟은 20세 이하를 제외한 상태로 고정한다.”
“정확히 23,047명. 타겟 고정을 완료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한수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순간,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벙-
머리 위에 마름모꼴 표식이 있는 23,047명의 머리가 일제히 터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