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난 아직 살아있는 건가?”
큰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김검천은 힘들게 일어서는 와중에도 먼저 주변을 살폈다.
심한 통증으로 제대로 서기에도 힘들었지만 괴물에게 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좁은 통로인 외벽 출구 쪽으로 이동하던 참이었지. 갑자기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큰 충격을 받은 거 같은데 그 때 잠깐 기절했었나. 그 사이 피에 굶주린 놈들이 습격을 안 하다니. 뭔가 이상해.’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자 주변을 더 자세히 살피며 김검천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김검천은 매번 사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지만 상황은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심지어 그가 처음으로 최후로 남은 적의 머리를 날려버릴 때도 그랬다.
그 순간 함선 내에서 죽었던 모든 자들이 되살아나 다시 김검천을 노렸다.
결국 힘이 다한 김검천은 죽을 수 밖에 없었고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게임이 끝나지 않은 걸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웜홀에 진입하기 전의 김검천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김검천이 낯설어 보일 것이다.
지금의 김검천의 육체와 정신은 무수한 죽음을 겪은 횟수 만큼이나 단련된 상태였으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끝나지 않는 살육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나 싶지만 지금은 그 살육 게임이 끝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괴물이든 사람이든 죽은 자는 말없이 바닥에 누워있어야 했다.
지금은 그런 모습 따위는 하나도 볼 수 없었으니 뭔가 상황이 달라진 걸로 보인 것이다.
‘게임이 끝났으니 이제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건지도. 그것들이 착용하던 장비들이 굴러다니고 있지 않았다면 단순히 상상이라고 생각할 정도군. 아무튼 지금은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군.’
김검천은 일단 널려있는 사병용 파워드슈츠 중에서 몸에 맞는 걸 찾아 착용했다.
머리 부위는 기동 시 방어막으로 보호 가능하기에 비어 있는 장비였다.
병사용 파워드슈츠였기에 성능이 별로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맨몸보다는 나았다.
사용하지 않는 파워드슈츠들에서는 동력원인 에너지 팩을 꺼냈다.
모두 파츠를 장착하니 180cm에 가까운 키가 2미터가 넘게 되었다.
원래 개인에게 지급된 병기라 본인 말고는 착용할 수 없는 방호벽이 걸려 있었다.
다만 김검천은 임시 함장 권한까지 획득한 상태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 것이라도 해도 접근 할 수 있는 것이다.
파워드슈츠를 입은채 작동을 확인하던 김검천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40킬로 장비를 옷처럼 편히 장착하다니? 내가 원래 이렇게 힘이 강했던가? 함선 내는 지구와 같은 중력을 유지하게 되어 있을텐데. 설마 중력 관제 시스템이 문제라도 생긴건가?’
김검천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외벽 출입문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외벽 출입문은 사람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문 너머로는 푸른 하늘이 보이고 있었고.
큰 충격이 있다 싶었더니 전함은 어느 행성에 불시착한 모양이었다.
김검천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코와 입을 틀어막으려다가 피식 웃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생겼을테니까.
천천히 손을 내린 김검천이 중얼거렸다.
“웜홀을 벗어나 이세계로 추락한 거였나. 함선에 문제가 생긴 상태니 중력 유지든 뭐든 못하는 상황이고. 인간에게 유독한 대기면 죽어도 이미 죽었을 테지. 외부 출입구까지 저렇게 활짝 열린 상황이니까.”
김검천은 먼저 함선 안으로 진입해 동력을 되살리기로 했다.
그러다 각 구역 및 블록 별로 차단문이 내려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김검천은 파워드슈츠를 이용해 함내 통신망에 접속을 시도했다.
“미리내.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가능할까?”
[…음성 인식. 김검천 중령 확인. 함장 반응 없음. 함장 대리를 함장으로 인식.]
[김검천 함장님. 반갑습니다.]
“나도 반가워. 그런데 목소리만 들리는 걸.”
[지금 모습을 만들 정도의 에너지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나쁜가. 그렇군. 동력이 없어 가수면 모드로 들어간 상태였어.”
[통신마저도 계속 유지할 힘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내부로 향하는 출입문도 못 여는 건가? 수동 조작 장치도 문 안쪽에 있는데.”
[비상시에 대비해 존재하는 부전원실 동력 주입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김검천은 손으로 열리지 않은 차단문을 만지작 거렸다.
평상시에는 든든한 아군이었지만 지금은 등을 돌린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이 병사용 파워드슈츠로는 차단문을 개방하거나 부술 능력이 없는데 큰 일이군.”
[내부 출입문을 열어야 동력실이나 무기고 같은 중요시설에도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고요.]
“안에서 해결 할 수 없다면 나가서 찾아봐야겠지. 일단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나서.”
[별다른 정보도 없이 말입니까?]
“앉아서 문만 바라보는 취미는 없거든.”
함선을 떠나기 전 얻은 건 1주일 분량의 식량과 식수, 사병용 표준형 생존 장비 정도였다.
식량과 식수는 누군가 간식거리로 가져다 둔 것 같은데 지금은 비상식량이 되었다.
생존장비 경우에는 원래 이런 장소에 있을 게 아니었는데 누가 임의로 반출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지 지금의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지. 안 그래? 미리내.”
[….]
에너지가 떨어진 미리내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대화를 재개하려면 에너지를 모을 시간이 필요할 정도니 확실히 문제가 심각했다.
파워드슈츠의 힘으로도 지나갈 공간을 확보할 수 있던 건 다행이었다.
외부 출입문이 거의 박살 난 상태라 가능한 일이었다.
밖을 빠져나간 김검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푸른 기운마저 서린 태양이 하늘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만 봐도 이 동네가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고 몸으로 알려주고 있는데.”
타고 온 함선은 누가 불시착이라도 시도한 듯이 거의 수평으로 추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1킬로미터가 넘는 함선이 100미터 높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전함은 추락 충격으로 생겨난 거대한 분화구 속 지면에 박혀있는 중이었다.
“저 분화구는 이세계에 있어서 작은 상처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새로운 역사의 흔적이 될테지.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시발.”
이런 상황에서 저절로 욕이 나오는 건 사람이라 그런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리에 힘을 줘서 함선 밖으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휙!
“엇?”
김검천은 깜짝 놀랐다.
평상시 한걸음에 1미터 정도 움직인다면 지금은 3미터는 움직인 것 같았다.
속도도 그만큼 빨라졌다.
그 바람에 조절이 실패해 정면에 있던 나무에 부딪혔다.
- 쿠쿵.
두께가 1미터는 될 것 같은 굵은 나무가 단번에 꺾여 나갔다.
3배 빠른 붉은색 지휘관용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함선 내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 행성의 중력 때문인가? 그래도 이상해. 몸이 가벼운 건 이해가 되는데 파워마저 오른 것 같으니까. 속도가 붙어서 그럴 걸까나? 어디 좀 더 살펴보자.’
김검천은 제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평상시에 2, 3미터 정도가 한계인 도약력이 5미터를 가볍게 넘어갔다.
김검천은 잠시 시간을 소비해 파워드슈츠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성능이 강화된 것 같아 기분은 좋지만 문제는 에너지인가. 일단 파워드슈츠 충전에 필요한 배터리를 다 챙겨오기는 했지만 몇 주나 갈지 모르겠군. 그 전에 식수나 식량을 못 찾으면 더 큰 일 나겠지만.’
김검천은 부딪힌 나무를 밀어 반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보니 꺾여 나간 나무에서부터 흐른 반투명한 붉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나무의 수액인가? 피처럼 붉은색의 수액은 처음 보는데. 역시 여기는 지구가 아니라 이세계로군. 어떻게든 이곳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야겠어. 미리내라도 제대로 동작했으면 좋겠는데.’
100미터 높이는 될만한 분화구의 언덕을 올라가 보니 현재 위치한 곳은 숲속 같아 보였다.
함선이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주변 나무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십여 미터 높이는 될 정도로 나무는 컸다.
‘사람의 손길이라고는 닿지 않은 어딘가의 오지인가. 불행 중 다행이군.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함선 추락으로 큰일이 났을테니까.’
김검천은 생존 장비에 있던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 후 남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사병용 장비의 나침반은 전원이 필요 없는 유형이었기에 사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단 이 행성에도 자기력은 존재하는 모양이니 다행인 것이다.
GPS처럼 위성을 이용하는 시스템뿐만 아니라 통신 장비도 현재로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일단 에너지가 있어야 뭘 동작시키든지 할테니까.
‘수천 년 전 별이나 태양, 나침반과 육분의 같은 걸로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 방향을 잡는 느낌이 이럴까.’
조난 당해 죽는 건 식수 등의 부족이나 저체온증 같은 사고로 죽는 일이 많았다.
위험한 동물에게 당해서 사망하는 것보다도.
그렇기에 식량과 식수를 가능한 많이 준비해서 출발한 것이고.
방한 대책은 파워드슈츠를 장착하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장비 자체가 에너지를 소모하니 이동 시 자연적으로 열이 발생하니까.
기동을 안 할 때는 주변에 넘치는 나무로 모닥불이라도 피우면 충분할 거 같았다.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어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뭔가의 충돌에 부셔진 것 같은 달의 개수는 3개였다.
그 3개가 합쳐지면 지구 것처럼 하나의 달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잘 곳을 찾자 주변의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생존 장비 팩에 있던 발화통을 이용해 모닥불을 피운 김검천은 파워드슈츠를 탈착했다.
“휴, 원래 몸에 장착하는 파워드슈츠라서 대인 병기 중에서는 가장 편안한 편인데도 하루 종일 장비하고 있자니 힘드네. 그런데 저게 뭐지?”
모닥불을 피우자 주변이 밝아져서 겨우 눈치챌 수 있던 게 있었다.
뭔가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말이다.
살펴보니 그것은 나무의 뿌리처럼 보였다.
지구에서 이렇게 움직이는 나무뿌리 따위는 본 적이 없지만.
어느새 김검천의 발밑까지 다가온 나무뿌리는 뾰족한 끝부분을 이용해 발등을 내려찍었다.
뿌리나 줄기로 생명체의 피를 흡수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흡혈 나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여기 나무는 광합성이나 수분을 즐기는 대신에 육식을 선호하는 거냐! 나무면 나무답게 채식이나 하라고! 파워드슈츠는… 장착할 시간이 없군.”
편하게 장착이 가능해졌다지만 공격을 받는 중에도 가능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김검천은 불이 붙은 나뭇조각을 모닥불에서 집어서 나무뿌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지금같은 상황을 겪은 것 같은 기시감과 함께 해결책이 떠오른 것이다.
“역사를 봐도 화공은 나무와 상성이 잘 맞지. 그러니 이 자리를 맞아 화끈하게 불꽃을 소개해 주는 걸 감사하게 여겨라! 흡혈 나무야!”
“키에엑!”
나무뿌리는 불이 붙은 나무 조각에서부터 불꽃이 튀자 좋아서인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예의바르게 비명도 지를 줄 아는 녀석이로군. 이런 뜨거운 불꽃 맛은 처음이지? 그렇다고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고.”
김검천은 사람이라면 화가 나 달려들 만한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적과의 싸움은 화를 내게 만들어 빈틈을 보이도록 만드는 게 유리했기에 붙은 버릇이었다.
이세계 나무도 이런 말로 화가 날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김검천은 나무뿌리가 고통으로 춤추는 틈을 타서 재빨리 파워드슈츠를 장착했다.
그리고는 불이 붙어 몸부림을 치는 나무뿌리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지면이 파이며 뿌리와 연결되어 있던 나무 본체가 보였다.
김검천은 망설이지 않고 나무뿌리를 당겨 5미터는 될듯한 나무 본체에다가 감아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키엑!”
주먹 한 방에 주먹 모양의 구멍이 귀엽게 난 나무는 다시 듣기 싫은 소리를 내질렀다.
구멍 너머로 건너편이 보일 정도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김검천의 눈에 여전히 기세 좋게 타고 있는 모닥불이 보였다.
“식물형이라서 그런지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네. 하지만 나무에 불이 붙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