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김검천은 날아드는 뿌리 공격을 피하며 다가가 나무 본체를 잡은 후 모닥불 위로 던졌다.
큰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불똥이 피어올랐다.
나무 주제에 고통을 느끼는지 몸을 꿈틀거리던 흡혈나무가 붉은 연기를 뿜어냈다.
붉은 연기가 많아질수록 몸에 붙은 불이 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붉은 수액으로 불을 방어하는 건가? 몸속에 수액이 많으니 작은 불 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 모양이네. 하지만 말이야…”
“케엑?”
김검천은 아까 집어던진 불타는 나무 조각을 집어 근처 다른 나무에다가 불을 붙였다.
흡혈 나무보다 더 큰 나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닥불은 막아도 이 정도로 불꽃이 커지면 못 막아낼테지! 합!”
김검천은 파워드슈츠에 힘을 주고 양팔로 5미터는 넘어갈듯한 불타는 나무를 감싸 안았다.
파워드슈츠에 장착된 인공섬유질 근육이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몇 배로 팽창했다.
- 우드드득!
1000킬로는 가볍게 넘어갈 듯한 나무가 뿌리째로 허공으로 들렸다.
김검천은 뽑아내는 동시에 나무 무게마저 이용해 모닥불을 향해 불타는 나무를 내려쳤다.
“키엑!”
비명을 유언으로 남긴 흡혈나무는 불타던 나무와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검천은 커다란 횃불이 되버린 흡혈나무에게 다가가 양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좋네. 역시 야외에서는 이 정도 캠프 파이어는 되야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는 법이지.”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김검천은 마음을 놓고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이런 걸 만난 것 같기도 했고.
아무래도 죽음이 반복되었을 때 만난 괴물들 중 비슷한 녀석들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것들과의 싸운 경험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던 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괴로운 경험을 떠올리고 싶어 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기억을 떠올려서 얻은 정보라도 필요해 보이지만.”
[제가 정보를 분석해 드릴 수 없는 게 아쉽군요.]
“미리내? 에너지가 회복되었나 보네. 혹시 지형이나 위치 및 성분 분석이 가능한 거야?”
[필요한 에너지가 충분하다면요. 지금으로서는 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것만 해도 어디야. 나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저도 혼자 남게 되는 건 싫으니 당분간은 잘 때도 파워드슈츠 장착을 권유드립니다.]
“괴물들에게 죽어간 경험이 즐거운 건 아니지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것 같군.”
[이해합니다.]
“그런 공감은 안 해줘도 네가 있어 주는 것만 해도 위로가 되거든. 일단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밤을 보내는 방법도 생각해볼까.”
그렇게 이세계의 첫날은 최악이었다.
그 후로도 최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매일 바꾸어 갔지만.
한번만 겪는 일보다 반복해서 겪는 일이 더 화가 나지 않은가.
김검천은 밤만 되면 귀찮게 되는 흡혈 나무에게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나무면 나무답게 낮에 광합성이나 할 것이지 늦은 밤에 날 원하다니. 잠 좀 자자!”
그렇게 나무만 있는 숲속을 헤맨 지 벌써 4일째가 된 날이었다.
지금까지 본 것과 만난 것이라고는 큰 나무와 작은 나무, 그리고 흡혈 나무밖에 없었다.
인간 같은 지적 생명체는 물론이고 곤충 같은 것도 보기 힘들었다.
함선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체가 증발이라도 한 세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 수확도 없는 하루가 다시 저물어 갔다.
“숲속이라서 그런지 더 빨리 날이 어두워지는 것 같네.”
[내장된 시계로 확인하니 이 행성의 주기는 지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목성처럼 하루가 10시간이라든지 금성처럼 100일이 넘어가지는 않으니까요.]
“그건 다행이지. 지구와 전혀 다르면 언제 야식을 먹을지 고민이거든. 늦으면 살찐다고.”
덮쳐오는 흡혈나무를 때려잡은 모닥불로 뜨거운 저녁을 만든 김검천이 고민에 빠졌다.
“벌써 식량과 식수를 절반 가까이 소모했는데 발견한 거라고는 나무밖에 없네. 아껴먹었는데도.”
[이대로 계속 가야 하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군요.]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다시 함선을 살펴보거나 반대쪽 너머로 이동할 기회가 있을지 몰라.”
[조금만 더 가면 지적 생명체, 적어도 뭔가 먹을 수 있는 거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느 쪽을 택해도 그럴듯 하긴 했다.
어느 쪽이라도 명확한 답이 아니라는 것만 뺀다면.
부족한 식량 때문에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김검천은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때 숲속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우드득! 쿵쿵!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뭔가 이동하는 소음이었다.
김검천은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이라면 나무만 아니면 뭘 만난다고 해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르륵.”
설사 나타난 것이 머리가 2개 달린 푸른 피부의 인간형 괴물 2마리라도 말이다.
김검천을 향해 4개의 머리가 입가로 군침을 질질 흘리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식사 거리로 환영받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거든.”
이번에 나타난 녀석들은 김검천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아 처음 보는 괴물들이었다.
함선 내에서 괴물들을 겪어보았다고 해도 이곳의 모든 걸 다 겪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더욱이 수상할 정도로 괴물들의 관계가 친근해 보였기에 김검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커플 따위는 난 절대 반대야! 하물며 너희들의 데이트 코스에서 주요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고!”
“우효? 크륵?”
괴물들은 김검천이 소리친 게 마음이 안 드는 모습이었다.
먹이감이 소리친 게 반항적으로 보였으니까.
하긴 김검천이 파워드슈츠를 장착 중이라도 2미터를 살짝 넘는 크기였다.
푸른 피부의 괴물들은 작은 녀석의 신장도 3미터에 달하고 큰 녀석은 4미터에 육박했다.
심지어 큰 녀석은 파워드슈츠를 장착한 김검천만 한 몽둥이를 손에 쥐고 있었고.
괴물들의 입장에서는 김검천이 만만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김검천은 근접해 오는 괴물들의 손과 입에서 붉은 액체를 발견했다.
흡혈 나무에서 흐르던 반투명한 빨간 수액과는 달라 보이는 시뻘건 색깔.
특히 바람에 실려 오는 피비린내가 나무의 수액과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김검천은 공격에 반응하기 쉽게 몸을 살짝 움츠려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하긴 저것들도 생명체일 테니 뭔가를 먹고 살기는 할 테지. 난 사실 주요리가 아니었군. 디저트였던 건가. 어느 쪽도 사양이지만 말이야.”
“크르르륵…”
김검천은 괴물들이 사정거리 내에 들어서자마자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푸른 피부의 괴물 중 큰 녀석을 먼저 노렸다.
“원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하던가. 상대가 이걸로 죽으면 공격당할 염려도 없느니 방어나 마찬가지지!”
지금의 김검천은 4미터 정도 높이의 괴물의 머리를 발로 강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 퍽!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큰 괴물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괴물의 둥근 머리가 사각형이 되었으니 살아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작은 괴물은 느닷없는 공격에 당황했는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김검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작은 녀석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냥 주먹이라도 성인 남자가 겨우 감싸 안을 두께의 나무도 일격에 관통하는 공격이었다.
괴물이라고 해도 결국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 아니겠는가.
작은 괴물 또한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서서히 지면으로 얼굴을 처박았다.
괴물의 가슴을 타고 흐르는 푸른색의 피는 평범한 생물체와 거리가 있어 보이긴 했다.
김검천은 괴물들을 처리하고 나자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전투였지만 실제로는 전력을 다해 공격한 것이었기에 제법 힘이 들었다.
파워드슈츠 에너지 또한 그만큼 소모되었고.
“기습 공격으로 다 처리하려고 해서 조금 무리했지만 시도한 보람이 있었네.”
[거기다 사람을 먹잇감으로 보더군요. 이세계에 지적 생명체가 있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날 먹음직스럽게 본 걸 반갑게 느낄 때가 있을 줄이야. 그런데 이 괴물 녀석들 혹시 먹을 수 있는 건가?”
[생명체는 먹어야 사는 법입니다. 비상시라지만 가능하면 익혀 드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러게. 이 녀석들을 회처럼은 못 먹겠지. 물고기는 아니니까.”
평상시라면 당연히 생각도 못 해볼 시도였다.
김검천은 몸을 돌려 주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나무껍질과 풀로 식사를 하는 방도는 최후로 남겨두고 싶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채식만으로는 힘이 나지 않으니까.
“크르르…”
식사 준비 중이던 김검천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자동 회피.]
“응?”
파워드슈츠가 김검천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대로 대각선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미리내가 슈츠 기동에 강제 개입한 모양이었다.
- 쿵.
피하자마자 등 뒤로 지면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수동 조작으로 전환되자 김검천은 지면에 손을 짚어 원을 그리며 몸을 돌렸다.
자동 기동을 끝낸 미리내는 침묵을 지켰고.
돌아본 김검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상태로도 살아있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김검천을 공격한 녀석은 아까 머리를 으깨진 큰 괴물이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었을 만한 타격을 받고도 멀쩡히 움직이다니.
더욱 어이가 없는 건 큰 괴물의 네모로 변한 머리가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는 것이었다.
“회복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실시간으로 수복되다니. 역시 이세계의 괴물은 뭔가 다르군.”
“꾸루룩! 캬!”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괴이한 모습에 기가 꺾일 것이었다.
실제로 김검천도 웜홀 진입 전 저런 괴물을 만났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김검천은 무수하게 죽은만큼이나 단련된 정신의 소유자였다.
살짝 놀라는 정도로 그칠 뿐이었다.
큰 괴물이 죽었다 살아나더니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했다.
덩치가 있는만큼 괴물의 공격은 힘이 잔뜩 실려 있어 보였다.
몽둥이에 검은빛이 맴도는 게 크고 아름다워 평범한 나무 재질 같지 않기도 했다.
저거에 맞으면 하나밖에 없는 파워드슈츠에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지금은 망가지면 수리할 방도가 없었다.
피할 수 있는 공격은 가능한 피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에너지도 걱정되는 와중에 사람 귀찮게 만드네.”
김검천은 시험 삼아 장작으로 쓰려던 두꺼운 나뭇조각 몇 개를 집어 던져 보았다.
워낙 두꺼운 나무라 조각으로 나누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 몸통만 한 넓이였다.
그것이 몽둥이에 부딪히자 순식간에 박살났다.
김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면 파워드슈츠가 고장날지도 모르겠네. 저거에게 배상을 요구해봤자 배를 쨀테고.”
김검천이 가운뎃손가락을 들며 큰 괴물을 도발했다.
큰 괴물은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기분이 굉장히 나빠지는 건 알 수 있었다.
말이 안 통해도 진심이 담긴 육체의 뜻은 통할 수 있는 법이었다.
욕 같은 종류는 특히 더 그랬다.
“쿠루캭!”
열 받은 큰 괴물은 아예 양손으로 몽둥이를 잡고 휘둘렀다.
방어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공격에 모든 것을 건 자세였다.
“하긴 머리가 움푹 들어갔는데도 회복될 신체라면 방어 같은 건 필요 없을 만하지. 전투 감각은 있네.”
김검천이 내린 평가에 감격이라도 한 걸까.
검은 몽둥이는 근처에 부딪히는 나무든 바위든 모조리 박살내며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김검천은 그대로 큰 괴물에게 뛰어들었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날 방도를 찾아 돌격한 것이다.
휘둘러지는 몽둥이의 파괴력이 가장 강해지는 건 무기의 바깥 끝 부위였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몽둥이를 쥐고 있는 부분은 맞아도 별로 타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쥐고 있는 부분이 파워드슈츠에 적중했지만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김검천은 그대로 주먹을 큰 괴물에게 찔러넣었다.
큰 괴물은 주먹이 몸을 관통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김검천을 감싸 안으려고 들었다.
도망 못 가도록 두 팔로 묶은 후 강력한 힘으로 압사시킬 작정인 것이었다.
“끌어안는 건 내 허락부터 받고 하라고!”
- 츠킹! 파즈즈즈!
몸속으로 파고든 파워드슈츠의 팔 부근이 하얗게 빛나며 기다란 강철막대가 튀어나왔다.
단순한 타격으로는 해치우기 힘들었기에 내재된 무장 중 하나, 뇌전권을 발동한 것이다.
뇌전권은 백만 볼트의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제압용 무기였다.
제압용이라도 해도 맞으면 정전기를 느끼는 수준으로는 안 끝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