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동 중에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쿠퍼의 나이는 생각보다는 젊었다.
겉보기에는 40대 중반은 된 것 같은데 물어보니 실제로는 30대 중반이라고 했다.
김검천은 쿠퍼가 자신보다 어릴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기에 어이가 없었다.
“역시 이쪽 사람들은 보기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네. 아니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건가.”
그 말에 쿠퍼가 히죽 웃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편이긴 합니다.”
“뭐, 젊을 때 나이 들어 보이면 나중에 젊어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그런데 짐은 그걸로 충분한 건가?”
쿠퍼가 들고 있는 건 무기로 쓰던 활과 화살, 그리고 쇠망치를 제외하면 리에의 짐뿐이었다.
집에서 중요한 물건만 챙겨서 김검천을 따라나선 것이다.
“제 물건은 나중에 따로 챙기러 와도 되니까요. 그런데 아까 사용하던 검은 몽둥이 말입니다.”
“보통은 아닌 것 같지? 재질이 뭔지 몰라도 단단하더군. 그래서 보여주려고 들고 온 거야.”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필요하다면 가져도 괜찮아. 기왕이면 유용한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하니까. 부숴도 괜찮아.”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검은 몽둥이를 받아 지면의 돌 위에 내려놓은 쿠퍼가 쇠망치 하나를 양손에 쥐었다.
쇠망치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쿠퍼의 양 팔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햡!”
- 두우웅!
검은 몽둥이와 쇠망치가 서로 부딪치자 두꺼운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건 단순한 금속 소재들이 부딪히는 울림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종소리?”
“귀가 울리는데요?”
“뭐라고? 안 들려!”
“와! 소리가 좋아요!”
김검천은 무덤덤한 표정이었고 쿠퍼는 쇠망치를 떨어트린 채 팔과 귀를 붙잡고 있었다.
리에가 소리가 마음에 드는지 활짝 웃는데 그에 비해 세이야는 귀를 틀어막는 중이었다.
사람마다 이 금속에 대한 반응이 다른 것이었다.
팔이 저린지 주무르고 있는데도 쿠퍼의 얼굴 표정만큼은 밝았다.
울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김검천이 쿠퍼에게 물었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 정체를 알아낸 모양이군.”
“이건 아다만임이라는 금속입니다. 방금 난 소리는 아다만임 특유의 것이거든요.”
“이 검은 몽둥이가 금속이라고? 그렇게 차가운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그게 이 금속의 신기한 점이지요. 단단하고 무겁기로는 3대 금속 중에서 최고입니다.”
“3대 금속?”
“이 아다만임과 오리하르콘, 비즈릴이 그거지요. 각각 특유의 능력을 자랑하고요. 어라?”
“왜 그러지?”
“실은 이런 아다만임이라면 보통 물건이 아니거든요. 몽둥이 형태로 가공될 정도 라면요.”
“인위적인 손길이 닿았다면 몽둥이보다는 검이나 칼 같은 게 무기로서 더 유용했을 텐데.”
“이 아다만임이라는 금속이 워낙 단단해야 말이지요. 이런 형태로 만든 것도 대단한 겁니다.”
“그런 걸로 놀란 건 아닌 거 같은데.”
“알아채셨습니까? 제가 놀란 건 아다만임에 검으로 보이는 뭔가의 흠집이 있어 그런 것이지요.”
“그거? 아, 내가 실험했던 자국인 것 같군. 광선검으로 잘라보려다가 흠집만 났거든. 그래서?”
쿠퍼가 깜짝 놀랐다.
아다만임에 자국이 남았다는 건 그만큼 김검천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상급 기사정도의 무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인 것이다.
“김검천 님이라면 이 아다만임을 가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간단히 말해봐.”
“가공하면 이거 더 비쌉니다.”
“이번에는 거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만한 아다만임이라면 수도 내 저택도 삽니다. 가공한다면 지방의 영지도 가능할 겁니다.”
“그러면 이 숲 밖으로 나가게 되어 어디서 군것질을 할 때에 용돈이 부족하지는 않겠군.”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닙니까? 아다만임이라고요. 아다만임. 세상에서 최고로 단단한 금속요!”
“그런 것 같군. 그런데 난 그보다 더 대단한 걸 알고 있거든.”
“예?”
아다만임 몽둥이는 광선검에 깊게 파여 흠집이 났었다.
하지만 함선 미르의 강화복합금속 차단문에는 광선검으로는 긁힌 자국도 찾기 힘들었다.
아다만임 정도는 김검천의 마음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쓸만한 재료 정도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보다 김검천 님.”
“음?”
“이 검은 몽둥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크고… 아름다운 게 보통 물건은 아닌 거 같은데요.”
“머리가 2개인 트롤을 때려잡고 얻었다. 트윈헤드 트롤이라고 하던가?”
“그 녀석을요? 과연 김검천 님이시군요. 외곽 숲 쪽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하는 녀석이거든요.”
“외곽 숲이라. 혹시 이 숲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쿠퍼가 의아한 표정으로 김검천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 숲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듯이 묻지 않는가.
“마물의 숲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 없습니까? 아니, 지금 거처하시는 곳이 대체 어디입니까?”
숨길만 한 건 없었으니 김검천은 기억나는 대로 거주하는 위치를 말해주었다.
쿠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주하는 곳이 숲 북쪽에 있다고요? 그건 숲의 중심에 있다는 말인데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지?”
“숲 안쪽으로 향할수록 강한 괴물이 있다고 알려져 있거든요. 그러니 수상하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곳에서는 블러드 트리를 빼면 괴물은커녕 다른 생명체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럼 그동안 상황이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군요. 마물의 숲을 정복하겠다고 군대를 보내면서 얻어낸 정보의 갱신 된 것도 백 년은 더 전의 일이니까요.”
“군대까지 동원할 정도라니 이곳이 위험한 곳이기는 한 모양이야.”
“그렇게까지 하고서도 마물의 숲을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이곳의 무서운 점이지요.”
“그런데도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니까요.”
“하긴 어떨 때는 괴물보다 사람이 더 무섭기도 한 법이지.”
“그런데 정말 안전한 게 맞습니까? 저야 그렇다 치고 리에가 걱정됩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거주할 곳은 세상 무엇보다 튼튼한 장소니까.”
“마음이 든든하군요. 성이나 요새보다도 더 견고한 거처라고 자신하는 것 같으시니까요.”
리에의 손을 붙잡고 뒤따르던 세이야가 웃었다.
“직접 눈으로 보시면 김검천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
쿠퍼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고 멍하니 벌려진 입가에는 침이 새어 나왔다.
“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쿠퍼는 김검천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김검천이 준 약으로 건강해진 리에가 쿠퍼의 옆에서 힘차게 뛰어다니며 활짝 웃었다.
“아빠! 아빠! 저기 봐요! 우리 집이 엄청 커요!”
“으… 응. 리에야. 이번에 살 집은 너무 커서 어디가 끝인지도 잘 모르겠구나.”
쿠퍼는 고개를 높이 들어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딜 봐도 보이는 건 미르뿐이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보아도 함선은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쿠퍼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옆에 다가와 말을 건 세이야 덕분이었다.
아니면 날이 새도록 그 자리에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쿠퍼 아저씨도 안 믿어지지요? 저도 처음 보았을 때는 초월적 존재라도 본 줄 알았거든요.”
“이건 작은 산보다도 더 크잖아. 이게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도대체 뭐라고 부르는 거지?”
“함선요.”
“함선? 이런 거대한 물체가 배라고? 우리 지방에 전승되는 초월 존재도 이것보다는 작겠다.”
“김검천 님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요. 우주라는 곳에서 타고 온 전함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거기가 김검천 님의 출신 국가인가?”
“아니요. 지구라는 곳이라던데요. 지구연합 우주방위군 소속 중령이라고 하시더군요.”
“뭔가 복잡하군. 그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 넌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구나.”
“김검천 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냥 따르면 되거든요. 거기다 처음 보았을 때는 쿠퍼 아저씨보다 더했다고요.”
“어떻게 했는데?”
“김검천 님이 이걸 지배하신다고 했을 때 뭐랄까. 부끄럽지만 초월적인 존재인 줄 알았거든요.”
“흐, 그게 부끄러울 거 없다. 처음 이걸 본 사람이 그걸 들으면 보통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쿠퍼는 다시 한번 함선 미르를 본 다음 고개를 돌렸다.
김검천이 다가와 말을 걸어서였다.
“이제 진정이 되었다면 들어가 보도록 할까? 대화하기에는 바깥보다 안이 좋겠지.”
김검천이 앞장서 사람들을 이끌고 차단문 앞에 섰다.
들어오려는 사람을 감지했는지 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보안 카메라가 뻗어 나왔다.
김검천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함선의 외부와 내부 기능 대부분이 망가져서 그런지 이거라도 동작하는 걸 보니 기쁘네.’
이 구역 부전원실에 동력을 넣었더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쿠퍼와 세이야가 처음 보는 모습에 움찔했다.
세상일을 잘 몰라서 그런지 오히려 리에가 재미있다는 듯이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김검천이 세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괴물 같은 게 아니야. 내 함선의 보안 기능이지. 일종의 경비병 같은 거라고 해둘까?”
김검천이 손을 내밀자 손등의 문양이 빛났다.
[1차 검증 완료. 문을 엽니다.]
동력실과 달리 사병용 훈련장 진입은 1차 검증만 해도 충분했다.
중요한 곳일수록 출입할 수 있는 보안 레벨이 다른 것이다.
그만큼 진입하기 힘든 것이 문제였지만.
인증이 끝난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바람에 쿠퍼가 뒤로 펄쩍 뛰었다.
“함선에 아무도 없다고 하셨지요? 문 뒤에 뭐가 있는 모양입니다!”
김검천이 웃음을 참는데 세이야가 쿠퍼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건 자동문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손을 안 대어도 알아서 열렸다 닫혀요!”
“허참, 그것 신기하구나. 사람을 가릴 줄 아는 문이라니.”
세이야가 쿠퍼의 말에 문득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혹시 이곳을 통과하려면 매번 김검천 님이 이렇게 해주셔야 하나요?”
김검천이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항상 해줄 수는 없으니 문 정도는 드나들 수 있게 두 명은 임시로 등록을 해줄 생각이야.”
“두 명이라면 쿠퍼 아저씨와 리에인가요? 저는요?”
세이야가 섭섭한 듯이 말하자 김검천이 웃었다.
“이미 이야기한 적 있었지? 넌 임시가 아니라 정식으로 함선 승무원 등록을 할 거야.”
“정말인가요?”
“난 내 사람에게 거짓말은 안 해. 상황에 따라 말을 안 할 수는 있어도.”
“전 뭐라고 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따르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좋은 마음가짐이군. 그러면 이제부터 고생하도록.”
“예! 무엇부터 할까요? 전투 훈련을 받는 건가요? 아니면 함선 외부의 괴물 퇴치인가요?”
“음. 세이야 일병의 첫 번째 임무는 일단 짐 정리부터 도와주는 것부터다.”
김검천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리에가 짐을 풀면서 고생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이야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엣? 그런 사소한 걸…”
“세이야. 하찮아 보여도 너의 첫 명령이다. 넌 명령이 사소하다고 지키지 않을 작정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세이야가 이동하자 쿠퍼가 옆에 다가오면서 입을 열었다.
“이것 참. 생각보다 상냥하시군요.”
“방금 전 어디가 상냥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집단의 수장의 말은 법과 같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지. 그런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서 엄격히 대하는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아니던데요. 전에 있던 곳에서는 말대꾸하면 일단 주먹부터 날아갔거든요.”
“그곳 사람들은 좋은 주먹 놔두고 왜 입 아프게 말을 하는지 고민하던 곳이었나 보군.”
“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전시상황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분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쿠퍼.”
“예.”
“자신에 대해서 숨기고 싶은 게 있다면 그런 식으로 말을 많이 하면 안 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