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렇다고 사람들의 인식을 못 고칠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괴물들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생존 본능마저 억눌리지는 않아 보였으니까.
실제로 생명이 위험해지면 싸우려고 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의 생각이 김검천과 다른 건 상황이 절망적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혹은 일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숲 밖의 다른 사람을 만나본 것도 아니고.’
조만간 마물의 숲 밖 사정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평생 여기 마물의 숲 안에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김검천은 곧 이어진 쿠퍼의 불평으로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다 높으신 분들의 정책 탓이지요. 먹을 건 부족한데 사람은 그 이상으로 늘어나고. 그러니 높으신 분들은 영지 내 사람 같은 건 어디선가 다시 무한으로 생산되는 줄 아시거든요.”
“그런 자들은 보통 자신이 당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더군. 사실 그렇게 변하기라도 하면 다행이고. 높으신 분들은 대부분 끝까지 남을 원망하거든.”
권력을 쥔 자들의 부정 행위는 김검천도 실제로 군대에서 겪은 일이었다.
쿠퍼도 김검천의 말에 동의했다.
“세상 어디서나 높으신 분들은 그럴 겁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면 대부분 돈을 받고 괴물이나 사람을 퇴치하는 용병 일을 하기도 하지요. 용병은 칼만 쥐면 될 수 있으니까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니 그럴 것 같기도 하군. 그러면 용병에 대한 신뢰는 낮겠는데.”
“예. 용병 중 절반 이상이 범죄자나 추방된 사람이니까요.”
“그들은 어느 정도로 위험한거지?”
“범죄 조직에 몸을 담기도 하고 인간 사냥꾼과 어울려 다니기도 한다고 아시면 될 겁니다.”
“그런가. 그러면 오히려 괴물을 퇴치하는 용병들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겠군.”
“그래도 어딜 가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들도 있으니까요. 많은 수는 아니지만요.”
“적어도 눈앞에서 대놓고 강도짓은 안 한다는 말이군.”
“그런 용병도 왕족이나 귀족처럼 혈관에 푸른 피가 흐르는 자들보다는 낫다는 거지요. 그들은 괴물에게 사람을 던져주기도 하거든요.”
“제물의 일종이로군. 그런데 넌 괴물에게 죽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부류는 아닌 듯 한데.”
“그래서 우리가 이런 마물의 숲까지 오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김검천은 쿠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른 건 모르지만 하나는 약속하지. 너희들이 내 보호 아래에 있는 이상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그게 인간이든 괴물이든 아니면 초월자라고 불리는 존재들도 말이야.”
“설사 그게 말만이라도 든든합니다. 사실 떠돌이 대장장이를 별 대가도 없이 이렇게 거둬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러면 너도 내 일을 돕고 있으니 서로 도움이 되는 셈인가. 그건 그렇고 당분간은 인간 사냥꾼 일도 있으니 여기 근방만 돌아다니도록 하지.”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잠시 몸을 사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러면 전 일 하러 가보겠습니다.”
쿠퍼가 다음 정비를 위해 쇠망치를 들고 자리를 떴다.
둘의 대화가 끝난 듯하자 세이야가 다가와 김검천에게 말을 걸었다.
“김검천님.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지?”
“리에가…리에가…!”
“리에가 뭐?”
“리에가 저한테서 안 떨어져요!”
“세이야, 맡겨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 중인 것 같아 보기 좋구나.”
“임무 수행도 좋지만 좀 쉬고 싶어요.”
“얘들의 회복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하니까. 조금만 자고 일어나도 다시 날뛸 수 있지.”
“그러니까 제가 못 견딜 정도거든요.”
“어쩔 수 없지. 쿠퍼는 정비에 바쁘고 난 다른 일 때문에 시간이 없거든.”
“…지금 상황에서 인원 보충은 어떻게 안 될까요?”
“당분간은 힘들 거 같은데? 세이야. 내가 말했지. 이제부터 힘들 일이 시작될 거라고.”
“크흑. 설마 이런 일인줄은 생각도 못 했다고요.”
“그건 그렇고 얼마 전 지식 주입기로 얻은 지식은 제대로 활용하는 모양이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후로는 리에가 나한테 질문하러 안 왔거든. 대답할 사람은 내가 아니면 너밖에 없으니까.”
“헉! 김검천님. 당신마저!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믿던 사람에게 등 뒤라도 찔린 듯 한 표정을 지은 세이야였다.
김검천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부터 세상의 진리를 깨닫다니. 가르칠 게 없구나. 앞으로도 리에를 잘 부탁한다.”
“김검천님!”
김검천마저도 리에의 폭발적인 질문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리에의 호기심을 다 해결해주다가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 할 판국이었다.
김검천은 세이야의 등 뒤로 시선을 주다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세이야.”
“예. 김검천님.”
“리에가 너에게 오는 중이네. 오늘도 수고해라.”
세이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리… 리에야?”
“응! 세이야 오빠! 같이 놀자!”
귀엽기 짝이 없는 리에였지만 세이야는 두려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눈만 뜨면 옆에서 무한 질문 공세가 펼쳐졌으니까.
하지만 세이야도 어느 정도 리에에게 익숙해진 몸이었다.
대처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 세이야가 리에에게 주려는 선물도 그 대처법 중 하나였다.
“리에야, 잠시만.”
“안 놀아주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어때? 예쁘지?”
세이야가 품속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게 박혀 있는 목걸이를 꺼냈다.
그 보석이 푸른색이 감도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마석이라서 그런 것이었다.
부전원실의 동력원으로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 에너지를 다 쓴 것이다.
그래서 필요 없어진 마석은 세이야가 기념으로 가지게 되었다.
세이야가 가지고 있던 작은 마석을 동력원으로 쓰자고 내놓았으니까.
그 마석이 지금은 리에 대책을 위한 목걸이의 보석 장식이 된 것이었다.
리에가 눈을 빛내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거 리에 주는 거야?”
“그럼. 그런데 리에야. 이 목걸이 받으면 잠시 동안 조용히 혼자 놀고 있어 줄래?”
“응! 그럴게!”
리에가 활짝 웃으며 세이야로부터 목걸이를 받았다.
그렇게 리에가 목걸이를 받아들고 만지는데 마석에 점차 푸른색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 푸른 기운이 강해질수록 리에의 안색도 나빠져 갔다.
리에가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비틀거렸다.
“세이야 오빠. 리에 어지러워…”
이마를 부여잡더니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자 세이야가 급히 리에를 부축했다.
“리에야? 리에야?
“무슨 일이냐? 세이야.”
미리내에게 앞으로의 할 일에 대해 지시를 내리던 김검천이 급히 달려왔다.
리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쿠퍼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김검천님. 목걸이를 가지고 놀던 리에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정해라. 갑자기 몸이 나빠진 게 네 탓은 아니니까. 미리내. 의료 기능을 쓸 수 있나?”
[아직 의료실이 개방되지 않아 회복은 무리지만 간단한 진단 정도는 현재로서도 가능합니다.]
“일단 원인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군. 회복 방법은 그 다음 어떻게든 찾아내도록 하지.”
[예. 생체진료 스캔 개시. 0%, 3%,…,100% 완료. 진단 종료.]
“어떤 상태지?”
[신체 각 부위의 건강 수치는 기절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몸 자체는 큰 이상 없습니다.]
“갑자기 기절했는데 이상이 없다고? 다른 요인이 있지 않을까?”
[그 이상의 정보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의료실이 개방되면 가능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팔팔 날아다니던 아이가 힘이 빠져서 기절을 한 상황이야. 세이야.”
“예. 김검천님.”
“쿠퍼를 찾아와라. 지금 리에의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세이야가 급히 달려가 쿠퍼를 데려왔다.
리에가 쓰러진 모습을 본 쿠퍼가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군. 세이야의 말에 의하면 목걸이를 가지고 노는데 갑자기 쓰러졌다고 하더군.”
쿠퍼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목걸이에 내려꽂혔다.
리에가 만지기 전에는 투명했던 목걸이의 마석이 지금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김검천과 세이야는 리에의 현재 상태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쿠퍼가 목걸이를 품속에 넣어 숨겼다.
수상한 행동을 취한 쿠퍼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리에가 저런 상태… 그러니까 병의 회복에 필요한 약초를 알고 있습니다. 다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라도 한가?”
“재해가 시작될 시기이기도 하고 인간 사냥꾼도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고 혼자 나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약초가 없으면 리에는 위험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니 혼자 약초를 구하러 가는 게 위험을 줄일 수 있겠지요.”
“그렇게는 가는 건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게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너희들은 내가 지켜준다. 거기에는 당연히 쿠퍼, 너도 포함되어 있고.”
겉치레로 두꺼운 근육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쿠퍼가 머쓱한 듯이 머리를 긁었다.
수십 킬로의 쇠망치도 가볍게 휘두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 쿠퍼의 근육이었다.
그런 만큼 자신이 보호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김검천의 말에 쑥스러웠던 것이다.
“말하시긴 했지만 이런 제가 보호의 대상에 포함된다니 좀 우습긴 하군요.”
“강함은 상대적인 거니까. 그리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혼자보다는 둘이 해결하기 낫지.”
“그래도 재해는 가끔 예측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리에가 아픈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같이 할 건지 말건지만 정해.”
“혼자보다는 둘이 더 마음 든든한 법이지요. 그 사람이 김검천님이면 더욱 그렇고요.”
“좋아. 그러면 같이 가기로 했으니 해결책을 들어보도록 하지.”
“제가 원래 살던 곳 근처에서 자라는 약초를 구해 다른 것과 제조해서 먹이면 됩니다.”
“간단하군. 그러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지금 말입니까? 계획이 엉망이 되었군요.”
“계획은 항상 바뀌는 법이거든. 어차피 해결해야 할 문제니 빨리 처리하는 게 낫지 않나?”
결정을 내린 김검천 일행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인간 사냥꾼들은 북쪽을 향하게 되었고.
며칠 후 그들이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
그렇게 김검천이 괴물을 만난 건 인간 사냥꾼들을 만나기 전의 징조였던 모양이었다.
“크룩!”
“뭐래? 기왕이면 사람 말로 해주면 좋겠군.”
김검천은 자신보다 2배는 될 듯한 나무가 덮쳐오는 걸 피해 하늘로 뛰어오르면서 말했다.
그의 발아래에는 5미터는 될 만한 갈색 피부의 인간형 괴물이 나무를 휘두르고 있었다.
쿠퍼의 말에 의하면 오우거라는 괴물이었다.
오우거.
5미터의 신장에 근육 또한 그에 못지않게 두꺼워 트윈헤드 트롤의 천적이기도 했다.
재생력이 뛰어나도 바위를 한 손으로 부수는 오우거의 괴력이라면 장난감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괴력도 어디까지나 맞출 수 있어야 힘을 쓸 수 있었다.
오우거가 아무리 나무를 휘둘러보아도 10미터는 뛰어오른 김검천에게는 닿지 않았다.
김검천이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멍청하기는. 괴물은 머리도 장식에 불과한 건가.”
“크캬룩!”
아무리 뻗어도 잡히지 않는 김검천을 향해 오우거가 나무를 쥔 채 가슴을 두들겼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뒤로 당겨 나무를 김검천을 향해 겨누었다.
“어라? 앞에 한 말은 취소. 그래도 머리는 도는데. 하긴 지구처럼 큰 것도 돌잖아.”
오우거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곧이어 나무가 힘껏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성문도 꿰뚫을 기세로 쏘아진 그건 화살이라기 보기에는 너무 크고 단단했다.
뛰어오른 여력이 다해 공중에서 떨어지는 중인 김검천은 꼼짝없이 당할 것 같이 보였다.